98화
“이걸로 당신을 찔러도 가만히 있을 거야? 입 다물고 있을 수 없겠지?”
루이제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남자는 루이제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루이제가 다시 말했다.
“하나도 걱정되지 않는 것 같네. 내가 당신을 못 찌를 것 같아? 찌르기 전에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당신은… 당신이 마음만 먹으면 날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이제 루이제의 말은 밖에서 듣기에는 거의 횡설수설하는 헛소리에 가깝게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칼을 든 손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온몸으로 번져 루이제는 그야말로 사시나무 떨듯이 떨고 있었다.
그녀는 살면서 이런 일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고, 가끔 읽곤 하던 엽편소설 같은 데서도 이런 장면이 나오면 눈살을 찌푸리며 책장을 덮어버리곤 하던 루이제였다.
새삼스럽게 자신이 처한 상황이 실감 났는지, 루이제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하게 고였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당신이 날 내보내 주지 않겠다면, 좋아! 어차피 이런 방에 갇혀서, 당신 같은 사람한테 소리나 지르고 있다가는 머잖아 미쳐버리고 말 텐데 난 그러긴 싫어. 미쳐서 죽는 건 싫단 말이야!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루이제의 목소리가 높아질 때마다 부들부들 떨리는 칼끝이 조금씩 위로, 위로 올라갔다.
남자는 여전히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루이제가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 그는 기민한 시선으로 루이제의 움직임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죽어버릴 거야. 어차피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을 텐데, 미쳐버리기 전에 죽을래. 알겠어? 죽어버릴 거야! 당신은 거기에 멍청한 허수아비처럼 서 있기나 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이제는 좀처럼 칼을 휘두를 수 없었다. 뾰족한 칼끝이 목덜미에 살짝 닿기만 했는데도 온몸의 솜털까지 곤두서는 기분이 들었다. 숨을 너무 크게 몰아쉬느라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 같았다. 눈에서는 눈물이 쉴 새 없이 떨어졌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어떡하지? 아플까? 아프겠지. 단번에 못 죽으면 어쩌지? 아버지는? 슈로터, 그 나쁜 자식이 날 요양 보냈다고 거짓말을 했겠지. 아니, 그렇지만 아버지가 한 번도 날 찾아오신 적이 없잖아. 설마 정말로 아버지가 날 이런 곳으로 보내신 건 아닐까? 그러면 난 어쩌면 좋지? …그런데 저 목석은 도대체 뭘 보기만 하고 서 있는 거야!’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남자는 선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아 루이제는 슬슬 치켜든 팔목이 뻐근하게 당기기 시작했다.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칼을 고쳐 쥔 루이제가 다시 말했다.
“나, 난 분명히 말했어! 죽어버릴 거라고! 이건 다 당신 때문이야! 알겠어? 당신 책임이야!”
루이제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빽 질렀다. 이건 효과가 있을까?
효과가 있었다.
루이제는 순간 남자의 키가 우뚝우뚝 커진다고 생각해 기겁했지만 곧 착각이라는 걸 알았다. 키가 커진 게 아니라 자신에게로 다가온 것이었다. 가죽을 덧댄 신발의 굽이 바닥을 디디자 뚜벅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루이제가 가까이 오지 말라고 소리를 치기도 전에 남자는 벌써 눈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구릿빛의 커다란 손이 머리 옆으로 쑥 뻗치자, 루이제는 방금 전까지 죽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고 가느다랗게 비명을 질렀다.
“죽을 마음을 먹은 사람치고는 겁이 많군요.”
어깨를 움츠렸던 루이제는 갑작스럽게 들린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팩 돌렸다. 언제 가져갔는지, 남자는 루이제가 가지고 있던 편지 칼을 든 채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 말을, …말을 할 줄, 알았어?”
루이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남자는 대꾸 없이 등을 돌리려 했으나, 그전에 벌써 루이제가 그를 가로막고 서 있었다.
약이 올라 번쩍번쩍 타들어 가는 것 같은 루이제의 눈동자를 마주 보던 남자가 무감동한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벙어리라고 생각한 것치고는 잘도 떠드시더군요.”
“감히 날 속여? 이러고도 네가 무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말은 이제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을까요. 당신은 아직도 당신의 처지가 어떤지 모릅니다.”
남자가 말했다. 루이제는 갑자기 서늘한 두려움이 발목을 훑고 지나가는 듯한 감각에 소스라쳤다.
“그게… 무슨, 무슨 말이야? 내 처지가 뭐가 어떻다는 거지? 내가 여기 있는 건 전부 슈로터 그 자식 때문이야. 그 자식이 감히 내 방에 몰래 들어와서…….”
“아니요. 그자가 아닙니다.”
분에 차 종알거리던 루이제의 말이 뚝 멎었다.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랄 만한 것이 드러난 것을 통쾌해할 여유도 없었다.
루이제는 덜덜 떨리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애쓰면서 바싹 마른 목으로 침을 넘겼다.
“그게… 무슨 소리야?”
“당신을 여기 가두고 아무 데로도 나갈 수 없게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린 사람은 다름 아닌 당신의 아버지입니다. 설마 모르고 있진 않았을 텐데요.”
남자의 목소리는 건조하고 높낮이가 없었다. 루이제의 눈동자가 서서히 크게 벌어지면서, 가느다란 어깨가 애처롭게 떨렸다.
“아니, 아니야! 아버지는 내게 그럴 분이 아니셔!”
루이제의 목소리는 거의 비명에 가까웠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스스로 혼란스러운 표정을 거둘 수 없다는 점이 루이제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이곳으로 보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다. 슈로터가 자신의 편지를 훔쳐보고 아버지에게 뭐라고 고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은 슈로터가 꾸민 일이고, 아버지는 그에게 속아 막내딸이 정말로 병 때문에 요양을 간 것이라 믿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정말로 아버지가, 날… 날 이렇게 가둬놓으라고 하신 거야?”
창백하게 질린 뺨 위로 눈물이 후두둑 굴러떨어졌다. 남자는 우는 루이제를 아무 말 없이 쳐다보고만 있다가 원래 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루이제는 화도 내지 못했다. 덩그러니 선 채로 황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루이제를 위로해 줄 사람은 이곳에 아무도 없었다.
73장 소녀의 우울 (2)
“왜 갈 수 없게 되었다는 거예요?”
튈브리크 외곽, 큰 번화가와는 멀리 떨어져 비교적 조용한 마을 어귀가 아침부터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자기 어깨만큼도 오지 않을 소녀에게 붙들린 병사는 잘못 걸려도 된통 잘못 걸렸다는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를 거들어 줄 사람을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창과 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조차 학을 떼게 만들 만큼 서슬 푸르게 악을 쓰는 소녀는 니타니였다.
“말해봐요! 왜 우릴 여기에 잡아두는 거예요! 우리는 황궁까지 갈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았어요!”
“이봐, 아가씨. 몇 번이나 말했잖아. 잡아두는 게 아니라 거처를 제공하는 거라고. 게다가 그 허가증은 수도로 입성하는 문을 통과하는 허가증이지, 황궁으로 갈 수 있는 허가증이 아니야. 황제 폐하를 제외하고서는 그런 허가증을 발급할 수 있는 놈이 없어.”
“그럼 허가증 없이 황궁으로 가겠어요. 그러니까 비키란 말이에요!”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거기가 어디라고 막무가내로 들어간다는 말이야? 내가 보내준다고 해도, 황궁 문턱도 못 넘고 모조리 감옥행일 거라고! 그걸 몰라?”
병사가 고함을 질렀으나 니타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를 노려보았다. 병사가 손에 쥐고 있던 창대의 아랫부분을 퍽 걷어찬 니타니는 그가 당황해 휘청거리는 사이 경갑에 덮인 어깨를 밀어 넘어뜨렸다.
“어, 어! 조심해!”
“니타니!”
주위를 둘러 서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달려들었다. 꽉 움켜쥔 주먹이 병사의 얼굴을 가격하려는 찰나, 다른 병사들이 니타니를 동료의 몸으로부터 떼어놓았다. 한쪽 팔을 붙들린 채 니타니는 악을 써댔다.
“놔! 이거 놓으라고! 우릴 보내줘!”
“계집애가……! 얌전히 좀 있어!”
“황궁으로 가봤자 뭘 어떡하겠단 말이야! 황제 폐하더러 죽은 사람이라도 살려내라고 할 참인가?”
“그래! 살려내라고 할 거야! 왜 둑을 더 높이 쌓지 않은 거야! 왜 튼튼하게 쌓지 않았어! 그 댐을… 그 댐을 제때 보수하기만 했더라도! 우리 가족들이! 마을 사람들이 죽지는 않았을 거야!”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지르던 니타니는 울음을 터뜨리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마을 사람들 중 몇몇이 병사들의 손을 뿌리치고 니타니를 데려갔다.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고, 병사들은 북받친 화를 가라앉히며 입맛이 쓴 표정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황제에게 읍소하기 위해 황궁으로 향했던 로이폰의 난민들은 튈브리크 경계 지역에서 병사들에게 가로막혔다. 영지가 보수될 때까지 임시 거처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소식에 그들은 분노했다.
로이폰의 개간이 이루어진 것은 에리히가 즉위하기 한참 이전의 일이었으나, 댐을 정기적으로 보수하는 일은 그에게 책임이 있노라는 것이 난민들의 주장이었다.
물론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으나,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로이폰의 영주로부터는 댐의 보수 사업에 관한 보고서가 몇 년 단위로 한 번씩 제출되었다. 에리히는 작년에야 처음 보고서를 받아보았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내용을 꼼꼼히 점검하고 영주가 바라는 만큼의 세액을 감면해 주었다. 그러니까 댐을 보수하는 금액은 원칙적으로 황궁에서 치러주는 것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실제로 로이폰의 댐이 제대로 보수된 적은 개간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이었다.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황궁에서 사람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그들도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로이폰의 영주는 그런 식으로 꽤 많은 액수의 금액을 착복해 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제대로 알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황궁에서 금액을 배정해 주지 않아 댐을 제대로 고칠 수 없다는 영주의 거짓말에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고, 결국 황제가 로이폰을 돌보지 않아 이런 사고가 발생했다고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황궁으로도 들어갈 수 없게 되니, 난민들의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