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폐하, 그들은… 로이폰의 난민들은 너무나 절박했습니다. 모두들 절망하여…….”
“개인의 절망이 제국의 법을 좌지우지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가?”
병사는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의 말에 동의할 수도, 동의하지 않을 수도 없었던 것이다.
몰려든 난민들을 맞닥뜨렸을 때,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간이 서늘해질 만큼 무섭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난민들이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바싹 다가온 죽음에 쫓겨 생기를 모조리 빼앗긴 사람들의 모습이 섬찟했기 때문이었다.
솔크 단장의 허가증은 모든 것을 잃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잡을 구원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소한 구원을 베푼 일로 단장은 벌을 받게 되었다. 불명예스러운 퇴직 정도가 그가 바랄 수 있는 가장 나은 길이리라.
그러나 그는 결국 마음 약한 상관을 위해 용서를 청하지 못했다. 에리히로부터 명령서를 전달받은 다른 병사가 그를 지나쳐 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자리에 앉은 에리히는 손가락을 까딱여 집정관 한 명을 가까이 오게 했다.
“로이폰의 영지민들은 허가 없이 황궁 안으로 들어올 수 없다. 수도 부근에 그들이 임시로 머물 만한 곳을 찾고, 앞으로의 구제 방안에 대해서는 따로 통보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전하라. 당분간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필요한 것들을 빠짐없이 준비하도록.”
“맡아 처리하겠습니다, 폐하.”
“모두들 이만 물러가라.”
72장 소녀의 우울 (1)
위트레트는 카툴라에 속한 여러 지역 중에서도 특히 작고 외딴곳이다. 북부 외곽의 경계와 영지의 경계가 맞물려 있으며, 북쪽 경계 바깥으로는 드높은 바위 산맥이 까마득히 이어져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도 없고, 반대로 이동해 올 수도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동쪽은 강으로 막혔고 영지로 드나들 수 있는 곳은 남쪽과 서쪽의 입구뿐인데, 그나마 서쪽은 깊은 숲과 연결되어 있어 이따금 길을 잃은 여행자 이외에는 사람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았다.
“비키라는 말 안 들려?”
루이제는 문을 지키고 선 남자를 향해 바락바락 악을 썼다. 목이 거의 쉴 지경으로 소리를 질러댔건만 그는 정말로 귀먹은 사람이기나 한 것처럼 묵묵부답인 채 눈썹조차 까딱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 알고 이따위로 행동하는 거야! 돌아가기만 하면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당장……!”
습관적으로 튀어나온 말이 찬물 맞은 촛불처럼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루이제는 핏기가 하얗게 가시도록 입술을 깨물었다가 발을 탕탕 구르며 테이블 앞으로 돌아가 앉았다.
유리창을 통해 쏟아져 들어온 여름 햇빛이 흰 손등 위에서 천진난만하게 반짝거렸다. 루이제는 갑자기 울컥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필사적으로 참았다.
마차에서 기절했던 루이제는 생소한 방 안에서 눈을 떴다. 분명 집안의 별장 중 하나일 텐데, 루이제가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 처음 며칠 동안에는 어느 지역인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녀들은 아침저녁으로 음식을 차려다 방 안까지 들여주고 간단한 시중을 들 뿐, 루이제가 묻는 질문에는 일체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담이 좀 약한 듯한 견습 하녀 하나를 윽박질러 이곳이 위트레트라는 이름의 작은 지역이라는 것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루이제는 위트레트를 다스리는 영주가 누구인지, 아버지나 슈로터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너희 전부 다 교수형에 처할 거야.”
분을 이기지 못한 루이제가 씨근덕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문 앞에 선 남자는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에 대해서도 루이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었다. 눈으로 보이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하루 종일 루이제의 방문 앞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말 한마디 하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뒷짐을 지고 석상처럼 선 채 표정조차 변하지 않았다. 물은 언제 마시고 식사는 언제 하는지, 잠은 언제 자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단정한 차림새나 큰 키, 연한 구릿빛인 피부 같은 것으로 미루어 영지의 병사나 아니면 기사단 소속이겠거니 추측만 할 뿐 그마저도 확실하지는 않았다.
눈매와 콧대가 날카롭고 선이 굵어 준수한 생김새였지만,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는 무표정함이 루이제를 질리게 만들었다.
“날 내보내 주지 않으면 이 방에 불을 지를 거야.”
루이제가 말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얄밉다 못해 기가 껌뻑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에게는 위협조차 되지 않을 주먹을 꼭 쥔 채 파르르 떨고 있던 루이제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 의자를 걷어찼다. 그다음에는 테이블을 넘어뜨리고, 찻주전자와 찻잔도 바닥에 내던졌다. 본가였다면 온 집의 하인이 모두 달려왔을 요란한 패악으로도 그를 움직이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문이 열리고 하녀가 들어왔다. 루이제는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나가! 누가 들어오라고 했어?”
하녀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사색이 되어 쩔쩔매는 시늉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큰 소리가 나기에 걱정이 되어서…….”
“나가! 나가란 말이야!”
루이제가 마구 발을 구르자, 하녀는 진저리를 치듯 어깨를 떨며 문을 닫고 사라졌다.
루이제가 처음부터 이곳에 감금되어 지냈던 것은 아니다. 위트레트에 도착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루이제는 대담하게도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수도와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인지도 모르고, 도망칠 수 있는 뾰족한 방법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런 시도를 한 것은 역시 물정을 모르는 탓이 컸다.
수도의 본저택에 있을 때는, 그녀가 손가락만 까딱이면 사람들이 줄줄이 몰려왔다. 하나부터 열까지 시중을 받는 생활에 익숙해져 있었으니 대책 없이 낙관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저택 밖으로 나가 마을을 찾으면, 자신을 위해 마차를 몰 사람 정도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리라고만 생각했다.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저택의 현관을 막 벗어났을 때였다. 운 좋게도 문이 잠겨 있지 않다 싶었더니, 루이제가 미처 달음박질을 시작하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병사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수도에서 보았던 황궁의 병사들과는 다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저마다 허리에 검을 차고, 손에는 창을 든 채 무장한 사병들이었다.
“들어가셔야 합니다. 루이제 아가씨.”
병사들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루이제는 그들을 겁내야 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횃불과 창을 든 병사들 앞에 당당히 서서, 날 순순히 보내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이라며 엄포를 놓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들은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고, 난생처음 남의 손에 끌려간 루이제의 충격은 컸다.
그날 이후로 루이제는 두 번 다시 도망치려는 시도를 하지 못했다. 밤낮으로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문지기가 생긴 탓이었다. 그게 바로 저기 서 있는 과묵한 남자였다.
루이제는 엉망진창이 된 바닥을 노려보다가 깨진 도자기를 발로 걷어찼다. 구두코에 꽤 정확히 맞았는지, 어린애 손바닥만 한 조각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남자의 무릎에 부딪혔다.
거기까지 조각이 날아가 맞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루이제는 순간 깜짝 놀랐지만, 그러고서도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에 두 배로 화가 치밀었다.
“내가 언제까지 여기 갇혀있기만 할 줄 알아? 두고 봐. 아버지 도움 같은 건 이제 필요 없어. 내 손으로 직접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
예전 같았으면 이런 험한 말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속으로 생각하는 것이야 얼마든지 했겠지만, 수도에서는 역시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여 말을 조심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러나 위트레트의 저택에 갇힌 지 열흘이 지나자 루이제는 더 이상 말을 가리지 않았다. 가끔은 더 심한 욕을 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아는 것이 별로 없어 답답하기까지 했다.
“넌 아버지가 보낸 게 아니지? 분명 슈로터, 그 작자가 네 주인이겠지. 안 그래? 말해봐. 입이 붙었어? 아니면 넌 돌로 만들어진 건가? 확 둘로 쪼개버렸으면 속이 시원할 텐데!”
잠깐 가라앉는가 싶더니 또다시 폭언이 터졌다. 남자는 숨조차 쉬지 않는 것 같았다.
분을 이기지 못한 루이제는 다시 한번 입술을 깍 깨물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성큼성큼 그에게로 다가갔다. 깨진 찻잔의 파편들이 구두에 밟혀 섬뜩한 소리를 냈다.
“말을 하란 말이야!”
외마디 새된 소리로 비명을 지른 루이제의 손이 갑작스럽게 남자의 멱살을 휘감아 당겼다. 그러나 쓸 만한 완력이라고는 없는 루이제가 건장한 남자를 휘청거리게 만들 수는 없었다.
그가 입은 옷은 예상외로 부드러운 재질이어서 오히려 루이제의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중심을 잃고 발을 삐끗한 그녀의 몸이 옆으로 휙 넘어가다가 순간 턱 멎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던 루이제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그녀는 자신의 어깨를 붙든 남자의 큼직한 손을 마치 뱀이나 되는 듯이 쏘아보다가, 뿌리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벌써 이레째, 석상처럼 움직임이 없던 남자가 드디어 사람다운 반응을 보인 것이다. 루이제가 말했다.
“그래, 바위로 만들어진 건 아니란 말이지? 알겠어.”
루이제는 왠지 모를 모멸감에 뒤늦게 몸을 떨면서 그를 뿌리쳤다. 단단한, 마치 물오른 나무뿌리처럼 흔들림이라고는 없던 손은 루이제의 약한 손짓에도 쉽사리 떨어져 나갔다.
“네가 사람이라면 언제까지고 그렇게 가만히 서 있을 수는 없겠지.”
허공에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리던 루이제는 몸을 휙 돌려 침대 쪽으로 뛰어갔다.
언제나 한 점만을 응시하던 남자의 시선도 이번만큼은 루이제를 쫓아갔다. 푹신푹신하게 부풀린 깃털 베개를 들춘 루이제의 손에 무언가 작고 반짝이는 것이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때까지 아무런 변화도 없던 남자의 미간이 아주 약간이나마 움직임을 보였다. 루이제가 베개 밑에서 꺼낸 것은 편지 봉투를 뜯을 때 쓰는 조그만 칼이었다. 방 안의 서랍을 온통 뒤지다 우연히 찾아내어 하녀들 몰래 숨겨놓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