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왜 여기에 와 있지?”
여태껏 아르사크가 먼저 에리히의 방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 그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손에 든 길쭉한 무언가를 가볍게 휘두르며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얼핏 세검이 아닌가 싶었던 그것은 자세히 보니 벽난로 바깥에 꽂혀 있던 불쏘시개였다.
“그건 왜 휘두르고 있는 거야? 이 날씨에 불이라도 피우려고?”
“그럴 리가요. 몸이나 좀 움직일까 하는 거죠. 이렇게.”
섬세하게 세공된 손잡이를 손바닥 안에서 휙 돌려 방향을 바꾼 아르사크가 위험천만한 묘기를 몇 번 선보였다. 팔목에 건 가느다란 팔찌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보던 에리히는 실소를 터뜨리며 의자에 앉았다.
“말 타고 활 쏘는 것만으로는 이제 몸이 덜 풀리는 모양이지?”
“여름에는 활줄의 아교가 녹으니까 활을 쏘기 힘들어요.”
“그렇다고 내 방에서 불쏘시개를 들고 칼춤을 출 필요가 있을지는 의문이군.”
“마음에 안 드시는 모양이네요.”
단단하고 얇은 금속이 휙! 하는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다. 금속의 날카로운 감촉이 턱 아래를 간지럽히듯 닿자 에리히는 앉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살짝 들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날 죽이고 싶다면 그걸론 어림없어.”
아르사크는 불쏘시개를 쥔 손을 움직이지 않은 채 낮게 웃었다.
“머리가 복잡할 것 같아 위로 좀 해주려 했더니.”
“이걸 지금 위로랍시고 하는 거야?”
“턱 밑에 칼이 들어오면 정신은 번쩍 들 테니까요.”
“그래. 덕분에 찬물이라도 맞은 것 같군.”
에리히는 턱 밑에 바싹 닿은 불쏘시개를 그대로 둔 채 왼팔을 뻗어 아르사크의 허리 뒤를 감아 느리게 당겼다.
아르사크는 물결에 떠밀리는 수초처럼, 별다른 저항 없이 에리히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드레스 위로 얇게 겹쳐 입은 로브 자락 안쪽에 매달려 있던 작은 비단 주머니가 가볍게 흔들렸다.
“이건 뭐야?”
어린애 주먹만 한 크기의 주머니 안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고, 가까이 들어 올리자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안에 무엇을 넣었지?”
“약초와 꽃잎을 말린 것들입니다.”
“향이 좋군. 두통이 좀 가시는 것 같아.”
“마음에 드시면 폐하께서 가지시지요.”
에리히는 고개를 저으며 주머니를 놓았다. 잠깐 만졌던 것뿐인데 손끝에까지 향이 배었다.
불쏘시개를 내려놓은 아르사크는 자신의 허리를 감은 에리히의 팔을 잠시 내려다보고, 그다음으로는 그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예전 같았으면 그가 자신에게 이토록 스스럼없이, 이토록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르사크는 언젠가부터 에리히와 자신의 사이에 존재하던 보이지 않는 경계가 느슨하게 허물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이따금, 아직 서늘한 새벽 공기를 느끼며 눈을 뜨는 아침이면 아르사크는 복도의 창문에서 내다보이는 반대쪽 궁에서 에리히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가만히 생각할 때가 있었다.
이따금 아직 이슬이 덜 마른 정원으로 내려가 말을 타고 궁을 한 바퀴 돌아볼 때면, 높다랗게 솟은 창문 어딘가에서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 때도 있었다.
“수해로 영지가 큰 피해를 입었다죠?”
아르사크는 시선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머리를 기울이며 말했다. 에리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사크는 한숨 섞인 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안타깝게도…….”
“최선을 다해 구제할 테니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어.”
“폐하께서 아무리 정성을 다하신들, 잃어버린 삶까지 구제하실 수는 없겠지요.”
그 말 속에 담긴 씁쓸한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할 에리히가 아니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예전처럼 빈정대는 어조로 받아치는 대신 잠시의 사이를 두고 단어를 고르듯 침묵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야겠지.”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팔 안에서 빠져나갔다. 그녀가 떨어트린 불쏘시개를 주워 원래 자리로 되돌려놓는 동안, 에리히는 유유히 멀어져 간 주머니 속의 향기를 쫓고 있었다.
입속의 수분을 바싹 말리는 듯한 기묘한 긴장감은 아르사크가 에리히를 향해 몸을 돌림으로써 퉁, 소리를 내며 튕기는 줄처럼 끊어졌다.
“폐하께서 그들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시는 동안, 저는 저대로 조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지 말라고 해도 듣지 않을 것이 아닌가?”
“그렇죠.”
에리히의 입가에 짧은 웃음이 지나갔다.
“뭘 할 건지 얘기나 해봐.”
“루이제 홀드빅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에리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자세를 바꾸어 등을 세운 그는 아르사크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에리히가 말했다.
“안 돼.”
“어째서요?”
“또 한 번 꼬투리를 잡히면 이번에야말로 저들이 그대를 가만 놔두지 않을 테니까.”
그것은 에셴도 한번 언급한 바 있는 이야기였다. 아르사크가 홀드빅의 뒤를 더욱 적극적으로 캐려 하자, 일단은 자신이 수소문을 해보겠다며 말렸던 것이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얌전히 손 놓고 앉아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만약 루이제의 신변에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건 자신의 책임이었다.
“만약 자작이 루이제를 어딘가 가두었거나 수도로 오지 못하게 발을 묶어놓았다면 그건 저의 책임입니다.”
“그게 어째서 그대의 책임이지?”
“제가 루이제를 협박했거든요. 소문을 퍼뜨린 자에 대해 조사하라고 말이에요.”
에리히의 미간에 가느다란 주름이 잡혔다가 곧 펴졌다. 아르사크의 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독단적으로 홀드빅의 뒤를 캐는 것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자작에 대한 조사는 내가 이미 테오도르에게 말해뒀으니 그대는 잠자코 기다려.”
“아뇨, 내가 해요.”
말린다고 들을 태도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했다. 에리히는 몇 발짝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아르사크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유리창 밖에서 들려오는 자잘한 소음들이 고요한 방 안을 드문드문한 음표로 채운다.
아르사크가 루이제의 행방에 대해 조사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에리히가 대놓고 그것을 도울 수는 없었다. 에리히가 사람을 움직이게 되면 어떤 방법으로든 홀드빅의 귀에 들어가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에리히는 단단히 다물린 아르사크의 입매를 가만히 바라보다 말했다.
“들키지 않고 찾아낼 자신이 있나?”
사실 아르사크도 그 점을 장담할 수는 없었다. 전면전이라면 결코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뒤에서 사람을 부리고 움직여야 하는 일은 아르사크에게 생리적으로 맞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내키지 않는 전쟁이라도 반드시 치러야 할 때가 있는 법이었다.
“조금 다른 약속을 드리죠.”
“어떤?”
아르사크는 에리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히, 그리고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제게 약속한 2년의 기한이 끝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나를 이 자리에서 끌어내릴 수 없을 겁니다. 그것만은 약속하겠어요.”
수도의 동쪽 경계처를 맡고 있는 단장으로부터 도착한 서신에는 난민 중 일부가 황제를 만나기 위해 수도로 떠났음을 알리는 내용이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서신을 전하기 위해 꼬박 밤을 새워 황궁까지 달려오느라 초췌해진 기통수를 바라보던 에리히는 테이블 위로 서신을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말했다.
“경계처를 담당하는 단장의 이름이 뭐지?”
느닷없는 질문에 병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도움을 청하려는 사람처럼 어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곳곳에 모여 선 귀족 중 그 누구도 그의 의아함을 풀어주지 않았다.
“내 말이 안 들리나?”
에리히가 다시 말했다. 병사는 그제야 퍼뜩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소… 솔크 단장님입니다.”
병사가 더듬더듬 대답하자 에리히는 천천히 머리를 끄덕이고 말했다.
“집정관.”
“예, 폐하.”
“지금 당장 솔크를 단장직에서 해임하고 신병을 구속하라는 전갈을 보내라.”
펄쩍 뛰듯이 고개를 든 병사의 얼굴에는 당혹함과 혼란스러움이 역력했다. 황제가 자신을 향해 명령을 내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금방 깨달았지만, 상관을 해임하라는 난데없는 명령의 의도까지 이해하지는 못했다.
“폐, 폐하… 어째서… 단장님을 해임하라는 명령을 하십니까?”
피로와 당황함으로 얼이 빠진 듯한 그의 질문에 대답한 것은 에리히가 아니었다. 집정관 중 한 명으로 참석한 홀드빅이 조소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무례하구나. 폐하께서 내린 명령에 반박해도 좋다는 말을 누가 했는가?”
홀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병사는 여전히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어릿어릿하게 움찔거렸다.
왕좌의 팔걸이에 새겨진 장식을 손끝으로 느리게 두드리고 있던 에리히가 몸을 일으키자 단상 아래의 양쪽에 서 있던 귀족들이 가볍게 어깨를 숙였다. 덩달아 휘청거리듯 허리를 굽힌 병사의 머리 위로 흩날리는 겨울바람 같은 에리히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내려앉았다.
“각지의 경계처에서 해야 하는 일이 뭐지? 말해봐라.”
이번에는 자신에게 하는 질문이 분명하다. 병사는 떨리는 입술을 한번 빨았다 놓으면서 제법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수도를… 수도와 황궁을, 그리고 황제 폐하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너의 상관을 해임하는 이유를 묻는 건가?”
그는 더욱더 당황한 얼굴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폐하, 그들은… 그들은 제국의 백성들입니다. 단장님께서도 그래서……!”
“그래, 분명 나의 백성들이지. 나 역시 그들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막무가내로 황궁으로 몰려와도 좋다고 허가한 적은 없다.”
서슬 퍼렇게 느껴질 만큼 냉정한 황제의 말에 병사는 입이 붙어버린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상관인 솔크 단장도 그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민들이 수도로 갈 수 있도록 허가증을 내준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에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가족과 집, 사랑하던 것들을 모조리 잃은 그들에게 남은 단 한 가닥의 희망을 짓밟기는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