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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95화 (95/191)

95화

에리히의 말에 흠칫한 테오도르의 손이 퀸을 넘어뜨렸다. 허겁지겁 말을 다시 세운 테오도르는 이마께까지 시뻘게진 채 에리히를 보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설마 아니라고 발뺌할 생각은 아니겠지? 얼굴은 난로에 달군 사과 같은 꼴을 해서 말이야.”

“아니, 전… 저는 로즈안나와 그저…….”

“그저, 뭐? 남매 같은 사이라고?”

반사적으로 그렇다고 대꾸하려던 테오도르는 자기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옛날이라면 모를까, 지금도 남매 같은 사이라고는 입이 열 개라도 말하지 못하겠지. 네가 로즈안나를 보는 시선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내가 다 민망해질 지경이다. 로즈안나도 이미 다 알고 있을걸?”

“네? 그, 그럴 리가요. 아니, 제가 무슨… 노골적인… 시선을… 그런 적 없습니다.”

테오도르가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사이 에리히는 다음 수를 두었다. 세 번째 체크다.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던 테오도르가 말을 쥐고 우왕좌왕하는 사이 에리히는 팔짱을 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렇게 열렬하게 쳐다보지만 말고 뭐라도 해봐.”

“뭐, 뭐라도 하라뇨……. 뭘 하라는 말씀이신지…….”

“꽃이든, 선물이든, 아니면 같이 산책을 하자는 제안이든. 뭐든 해야 진전이 있을 것 아니야?”

“폐하께서 하신 것처럼요?”

“건방 떨기는.”

딱, 하는 소리가 났다. 외통수다. 테오도르는 양 손바닥을 펼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졌습니다. 벌써 세 판째 내리 지기만 했군요.”

“넌 체스 상대로는 영 꽝이야.”

“아르사크 님은 체스를 못 두시나요?”

“배워보라고 말은 했는데, 글쎄. 별 흥미는 없는 것 같던데.”

대전 게임이라면 종류를 가리지 않고 좋아할 것 같았는데 의외였다. 반대로 에리히는 토르갈 부족민들이 자주 한다는, 체스와 비슷한 대전 게임을 하나 배우고 있는 중이었다. 규칙이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달라서, 아직까지 아르사크에게 이긴 적은 없었다.

“요즘 아르사크 님께 드나드는 귀족들이 꽤 늘었다고 그러더군요.”

“그것도 로즈안나에게서 들었나?”

테오도르는 멍하니 에리히를 쳐다보고는 말했다.

“아뇨, 누님께 들었습니다.”

“나도 알고는 있어. 쓸 만한 인물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그렇고, 홀드빅 자작의 막내딸이 요즘 안 보이던데. 황후궁을 문이 닳도록 드나들더니 말이야.”

“아, 그것도 누님께 들었습니다. 요양을 떠났다고 하던데,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그 음흉한 작자가 또 무슨 수작을 꾸미고 있는지 모를 일이지.”

홀드빅에 대한 에리히의 신뢰도는 한없이 낮았다. 아르사크를 위태롭게 만들 뻔했던 예의 추문에 관한 것도, 에리히는 홀드빅의 입김이 닿은 일이리라 진작부터 추측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짓이라는 것을 입증할 만한 증거는 끝내 찾지 못했다. 죽은 병사가 도박판에 드나들 때 가지고 있었다는 다이아몬드의 행방도 끝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용한 것이 수상해.”

“어쩌면 포기한 것은 아닐까요?”

순진한 질문에 에리히는 미간을 찡그리며 헛웃음을 쳤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를까, 홀드빅이라면 결코 이런 식으로 순순히 물러날 인물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적이었던 볼핀 후작이 없는 지금, 그는 중앙 귀족들을 더더욱 자신의 휘하로 규합하고 싶을 것이 분명하다.

아르사크를 끌어내리는 것이 그 계획의 첫 단계였을 테지만, 귀족들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듀터스 신관이 나섬으로써 일단 무산되었다. 그러나 다음 수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자작의 딸이 어디로 요양을 갔는지 조사해야겠다.”

“별장으로 사람을 보낼까요?”

“그게 좋겠지. 하지만 한꺼번에 조사하면 뒤를 밟히기 쉬워. 가장 가능성이 높은 곳을 몇 군데 추린 다음 시작해야지.”

“알겠습니다.”

어쩌면 아르사크가 쓸 만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에리히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디로 가십니까?”

“황후의 처소에. 물어볼 것이 있다.”

그가 아르사크를 더 이상 ‘망나니’니,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것으로 호칭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테오도르는 문득 깨달았다.

에리히와 테오도르가 방을 나서려던 바로 그 순간, 누군가 다급하게 문을 노크했다. 테오도르가 문을 열자, 온몸의 핏기가 다 빠져나간 것처럼 사색이 된 의전장관이 머리칼마저 온통 흐트러진 채 숨을 몰아쉬며 구르듯이 들어왔다. 뭔가 심각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에리히는 미간을 깊게 좁히며 그를 보았다.

“무슨 일이지? 보고하라.”

“폐하… 동문의 경계처에서 급한 전갈이… 왔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말하라니까.”

의전장관은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황망한 표정으로 에리히와 테오도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핏기가 없어 푸르죽죽하게 보이는 입술을 떨며 그가 말했다.

“티얀 강 상류의 댐이 붕괴하여… 그 아래 로이폰 영지 대부분이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로이폰의 영주와 성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죽었고… 목숨을 건진 난민들이 지금 수도를 향해 오고 있다는 급보입니다.”

수도의 동문 경계처를 지키는 병사들은 꾸역꾸역 몰려드는 난민들을 다 감당할 재간이 없었다. 영지민 일부만이 목숨을 건졌다고는 하나, 로이폰 영지 자체가 매우 규모가 큰 곳이었으므로 난민의 수는 상당했다.

경계처를 맡고 있는 단장은 급한 대로 병사용 보급품을 풀어 나누어 주었지만 식량에서부터 담요까지 그 수가 역부족이었다.

수도로 가려는 난민들과, 그런 난민들을 막는 병사들 사이의 크고 작은 소요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를 왜 막는 거야! 젠장, 집도 부서지고, 가족들도 죽었어! 황제 폐하께 지금 이 끔찍한 상황을 고해야 한다고!”

“일단 진정하시오. 황궁에는 이미 서신을 보냈소. 폐하께서 곧…….”

“그럼 우리더러 이 길바닥에서 몇 날 며칠이나 밤을 새라는 거예요?”

“병사들이 쓰는 천막을 배급할 테니…….”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라고! 이 사람들을 좀 봐! 고작 천막 몇 장으로 감당할 수 있느냔 말이야!”

목소리 큰 청년들이 앞다투어 외치자 여기저기서 동의하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단장은 골치가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지금 당장 수도로 간다고 해도 뾰족한 수가 없을 거요.”

“그건 가봐야 아는 것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릴 가게 내버려 두란 말이에요!”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지고 얼굴도 엉망진창, 눈물이 글썽한 눈빛에 독이 오른 소녀가 외쳤다. 그녀는 며칠 전 댐 붕괴 사건으로 양친을 한꺼번에 잃은 니타니였다.

단장은 표독스럽게 소리를 지르는 소녀의 모습을 눈으로 찬찬히 뜯어보았다. 수해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도망치느라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그녀는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것마저도 피로해 보였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이 수도까지 갈 수 있도록 허가증을 내준다고 해서, 황제가 직접 이들을 만나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오히려 여기에 머무르며 임시 거처를 제공받을 때까지 기다리는 편이 훨씬 옳은 선택이다.

하지만 단장은 너덜너덜한 난민들의 모습 앞에서 차마 ‘더 옳은 선택’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었다. 그에게도 니타니와 비슷한 또래의 딸이 있었다. 이제 니타니는 두 번 다시 부모의 얼굴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마 영영 시체조차 찾을 수 없으리라.

“알겠소.”

단장이 말했다. 웅성거림은 조금 잦아들었지만, 절망과 분노가 뒤섞인 눈빛들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허가증을 주겠소. 그러나 당신들 중에는 아이나 노인, 병자가 있잖소. 그런 사람들은 초소에 남도록 하시오. 수도 부근까지 걸어가려면 며칠이나 걸리는데, 병약한 자들은 가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으니까. 그간 필요한 식량 일부와 옷가지는 병사들의 보급품 중에서 추렴해 나눠주지. 불만 없소?”

난민들은 잠시 웅성거리며 저희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던 중 니타니가 앞으로 불쑥 나섰다.

“좋아요. 지금 당장 말씀하신 것들을 준비해 주세요. 우리는 꼭 수도로 가서 폐하를 뵈어야 해요. 우리가 살던 곳이 하루아침에 끔찍한 지옥으로 변했다고요. 이게 누구의 책임이겠어요?”

71장 난민들 (2)

티얀 강의 댐이 붕괴해 로이폰 영지가 쑥대밭이 되었다는 소식은 난민들보다도 빠르게 수도에 도착했고, 동네 꼬마들까지도 로이폰에 닥친 비극을 알게 되었다.

에리히는 의전장관과 그 이하의 귀족들을 소집해 급하게 대책을 논의했다. 일단 난민들을 수용할 수 있을 만한 거처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생존자의 수는 어느 정도지?”

“정확한 파악은 아직입니다만… 약식으로 보고받은 바로는 약 육백여 명 정도로 예상합니다.”

의전장관의 말에 참석한 귀족들은 물론 에리히까지도 놀랐다. 난민의 수가 너무 많아서가 아니었다. 너무 적기 때문이었다. 육백 명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로이폰 인구 중 거의 대부분이 수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죽었다는 말이다. 지도에 있던 마을이 하루아침에 통째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빠른 시일 내로 임시 거처를 마련하라. 정확한 피해 사실을 확인할 때까지 머물 수 있게 하도록.”

“알겠습니다.”

“로이폰에는 이미 인원을 보냈다. 피해 상황을 정확하게 보고받은 다음 이후 복구 계획을 논의하도록 하지.”

에리히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작스레 닥친 일로 해결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틀 밤을 꼬박 새느라 초췌해진 의전장관이 에리히의 뒤를 따랐다.

“폐하, 비록 육백 명 정도의 인원이라고는 하나 그들이 새로이 터를 잡고 생활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비용이 소모될 것입니다.”

“당연한 소리를 굳이 할 필요가 있나?”

“저, 그럴 뿐만 아니라, 만약 그들이 로이폰으로 돌아가기를 요구할 경우, 더욱 많은 시간이 필요한…….”

에리히는 고개를 홱 돌려 의전장관을 바라보았다. 새파란 눈동자가 차갑게 굳은 것을 본 의전장관은 어깨를 흠칫거리며 슬그머니 고개를 숙였다.

“비용이 드는 것도, 시간이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설마 의전장관인 그대가 그걸 모른다고는 하지 않겠지?”

움찔한 의전장관은 차마 다른 반박을 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에리히는 반듯하게 넘겼던 앞머리를 흩트리듯 고개를 흔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주로 업무를 볼 때 드나드는 대서재만큼은 아니지만 역대 황제들이 모아놓은 여러 가지 책과 고풍스러운 가구로 꾸며진 조용한 방이었다.

시중을 드는 시종들까지 전부 물리고 문을 닫은 에리히는 커튼이 쳐진 창문 근처에 서 있는 아르사크를 보고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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