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침대에서 재워준다는 말은 안 했는데?”
풀썩, 가벼운 소리와 함께 아르사크의 몸이 뒤로 눕는다. 들은 척 만 척 대답도 하지 않는 그녀를 향해 코웃음을 친 에리히는 시종을 부르지 않고 스스로 옷을 갈아입은 뒤 얼굴을 씻었다.
아르사크는 진탕 뛰어다니다 지친 어린애처럼 두 팔을 활개 치듯 뻗은 채 미동도 없이 누워있었다.
“그 머리 장식, 끊어지면 세공비가 어마어마하게 들 테니 그거라도 좀 벗고 눕지 그래.”
그러자 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미동도 않던 아르사크가 갑자기 키득거리며 웃는다.
에리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르사크의 옆에 앉아 머리카락에 고정된 핀 부분을 열어 빼낸 뒤 치렁치렁하게 늘어진 아래쪽 가닥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해 한쪽에 놓아두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런 걸 다 준비하셨다니. 상자를 열었다가 기절할 뻔했답니다.”
그 장신구는 에리히가 보낸 선물이었다. 아르사크가 어떤 드레스를 입을지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기막히게 들어맞는 장식이었다.
벗어 던진 구두 역시도 그랬다. 드레스와 같은 재질의 비단을 대어 실루엣을 따라 꼬임 장식을 덧대고, 매듭의 사이, 사이에 다이아몬드를 고정해 마치 요정의 신발처럼 아름다운 구두였다. 지금은 고꾸라진 주정뱅이처럼 융단 위를 따로따로 굴러다니긴 했으나.
“마음에는 들었나?”
“보석 같은 건 탐내지 않는다는 걸 아시면서요.”
“그럼 뭐가 탐나는데? 땅?”
농담 삼아 건넨 말에 아르사크의 감았던 눈이 떠졌다. 그러나 화가 난 기색은 아니었다. 에리히는 드러눕느라 흐트러진 아르사크의 머리카락을 잠깐 바라보다가, 자신을 똑바로 올려다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무언가를 탐낸다는 감각은 어떤 것일까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에리히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아르사크가 던진 질문의 의미를 이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 무언가를 욕심낼 처지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원하는 것이 있었다면, 도저히 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일상이었으리라. 그러나 그 마음에 욕심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내가 대답해 줄 수 있는 질문이 아닌 것 같은데.”
“왜죠? 당신은 모든 것을 가졌으니까? 그래서 원하는 것이 없으니까?”
아르사크는 웃고 있었지만 에리히는 쉽사리 그 질문에 대꾸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을 가졌다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하지만 탐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아르사크가 농담을 하듯 질문한 바로 그 순간에도, 에리히는 이런 감정이 바로 ‘원한다’는 것임을 깨닫고 있었다. 너무나 간절한, 단 하나의.
“원하는 것이 없진 않지.”
“그럼 대답해 보시지요. 탐내고 원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가요?”
이 감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에리히는 잠시 무의미한 고민에 빠졌다.
마음 한구석을 에는 듯한 찰나의 고통을, 그리고 그 고통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안타까운 간지러움을.
한순간 폭발한 열망에 억지로 찬물을 끼얹고, 뿌옇게 시야를 가린 수증기로 안개 속을 헤매는 듯한 기분을 느낄 때의 착잡한 만족감을.
에리히의 손이 아르사크의 뺨 위에 닿았다. 서늘한 손이다. 열 오른 뺨을 기분 좋게 식히는 감각에 아르사크는 만족스레 눈을 감았다.
시선이 거둬지자 식었던 열망에 다시금 불이 붙는다. 벌겋게 끓어올라 넘칠 것 같다.
“알고 싶어?”
“무엇을요?”
“원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를.”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낮아져 있었다. 아르사크는 눈을 뜨지 않은 채 생각했다.
‘아, 이 순간이구나.’
잔잔하던 수면이 서서히 요동치기 시작하는 것을 아르사크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깊은 곳에서부터,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부풀어 솟구치는 움직임이 마음에 파문을 그렸다.
에리히의 손이 조금 움직이자, 그의 손바닥 안쪽이 입술 위를 부드럽게 누르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 그의 손목을 붙잡아 당긴다면, 그다음은 어떤 일이 벌어질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에리히의 몸이 천천히 기울었다. 아르사크는 눈을 뜨고 그의 매끄러운 입술이 자신을 향해 느리게 가까워지는 것을 보았다. 열띤 뺨을 감싼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달콤한 향기가 나는 숨이 서로 뒤엉키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입술이 맞닿는 일은 없었다. 찰나의 순간에, 가까워졌던 입술의 감촉이 드디어 느껴졌다고 생각한 순간, 에리히는 고개를 약간 기울여 아르사크의 더운 뺨에 가볍게 키스했다. 그러고는 아무런 미련도 없다는 듯이 덤덤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르사크 역시 이럴 것을 예상하기라도 했다는 듯이 태연한 시선으로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이런 기분인가요?”
아르사크의 질문에 에리히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하지만 그대가 날 원치 않는다는 건 알겠어.”
“왜 그렇게 생각하죠?”
“나를 원했다면 그 팔이 벌써 내 목을 휘감았을 테니까.”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은 팔을 힐끔 쳐다본 아르사크는 그제야 킥킥거리는 웃음소리를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머리를 멍하게 만드는 것 같던 달콤한 향기는 이제 없었다. 덩달아 술기운도 사라졌다.
“굿나잇 키스는 해줬으니 이제 자러 가도록 해.”
“재워주는 줄 알았더니 치사하게.”
“술이 덜 깨면 그러려고 했는데, 이미 다 깬 것 같아서.”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은 아르사크도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내보내려 하지 않았다면 아르사크 쪽에서 먼저 가겠다고 일어섰을 것이다.
이토록 세찬 흔들림을 감당할 자신은 없었다. 빛 없는 밤이 다행스럽게 여겨졌다. 술에 취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감각으로 뺨이 달아올라 식을 줄 몰랐다.
아르사크는 더 말하지 않고 벗었던 구두를 도로 주웠다. 그러나 굳이 신지는 않고, 놀리기라도 하듯이 에리히를 향해 까딱까딱 흔들고는 인사도 없이 침실을 나갔다.
방 안은 금세 조용해졌다. 아르사크가 누웠던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에리히는,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은 채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70장 난민들 (1)
로이폰 영지는 제국의 수도에서 동쪽으로 쭉 뻗은 산맥과 숲을 따라 닷새쯤 밤낮으로 말을 달리면 도달할 수 있는 곳에 있었다.
북쪽에서부터 굽이치듯 내려오는 산맥과 티얀 강을 끼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드문드문 이어진 거대한 숲이 있어 삶의 터전을 일구기에 그리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목재업과 양잠업을 중심으로 카툴라의 전성기와 함께 번영을 누렸으나, 주요 생산품이던 목재 몇 가지가 무역 거래에서 가치가 크게 떨어진 이후로는 자체적으로 개간 사업을 추진하여 일찌감치 농지를 만든 곳이기도 했다.
에리히가 황제로 즉위한 뒤 개간 사업에 본격적으로 손을 대기 시작한 것도, 어느 정도는 로이폰 영지의 성공을 밑그림 삼아 일으킨 것이었다.
대대로 양잠을 생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자란 니타니는 아침 일찍부터 잠실의 온도에 신경을 쓰느라 바빴다.
누에는 자라면서 딱 알맞은 생활환경이 매번 달라지기 때문에 시기를 잘 맞추어 습도와 온도를 적절하게 조절하지 않으면 그해 누에 사육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기 십상이다.
“귀여운 것들. 밤새 잘 있었니?”
4령에 접어든 누에들은 몸통이 제법 굵직하고 탐스러웠다. 니타니는 가지째 꺾은 뽕나무를 차곡차곡 쌓아 누에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로이폰에서 양잠을 해 먹고사는 집은 니타니의 집을 포함해 세 곳뿐. 니타니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는 마을 곳곳에서 누에를 치고 뽕나무를 길렀다지만 그것도 다 옛말이다.
영지 사람들 대부분은 일찌감치 돈이 안 되는 양잠과 목재업을 걷어치우고 널찍하게 개간된 땅에서 호밀을 재배했다. 강줄기의 상류 지점에 댐을 세워 거대한 저수지를 세운 후로는 한 해 거두는 밀 생산량이 더욱 늘었다.
“엄마도 올해까지만 누에를 치자고 하시던데……. 에휴, 내 귀여운 것들을 내년에는 못 본단 말이지. 하긴, 너희에게는 그게 더 행복한 삶일까? 응?”
니타니는 그 나이대의 소녀들이 으레 그러듯 누에를 보고 질겁을 하며 도망가거나 하지 않았다. 꼼지락거리며 뽕잎을 갉는 누에를 손끝으로 살살 건드리던 니타니는 바닥에 흩어진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고 기지개를 켜며 잠실을 나섰다.
날씨가 차츰 더워지고는 있지만 아직은 습기가 덜했고, 올해 누에들도 이대로만 자라준다면 내년쯤에는 엄마를 설득해 취미 삼아 꾸릴 수 있는 조그만 잠실을 가질 수도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소리지?”
잠실을 나선 니타니는 하늘에서 무언가 우르릉, 하는 듯한 소리에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햇빛도 이렇게나 좋은데 설마 번개라도 치는 건가. 소나기가 오려나?
그러나 올려다본 하늘은 여전히 새파랬다. 그 대신 발을 딛고 선 땅이 갑자기 우르르 떨리는 듯한 진동이 느껴졌다. 순간, 니타니는 저수지가 있는 절벽을 등진 영주의 성 꼭대기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보았다.
로이폰 영주의 성은 카툴라 제국이 건국된 이래 여러 번의 재건을 거쳐 매우 튼튼하게 지은 성이다. 게다가 지금은 늦보리를 수확해 거둘 시기라 많은 사람들이 성안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니타니의 부모도 아침부터 성에 가 있었다. 니타니는 본능적으로 엄마를 부르며 성을 향해 뛰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절벽 위에서부터 순식간에 쏟아져 내린 어마어마한 강물이 영지의 평야를 모조리 덮쳤다.
* * *
딱, 하는 소리와 함께 테오도르의 체스 말 하나가 자리를 옮겼다. 에리히는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수를 고민하다가 이내 자신의 앞에 있던 말을 옮겨 테오도르의 진로를 막았다. 이번에는 테오도르가 조금 전의 에리히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아르사크 님과 잘 지내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둘 수를 고민하느라 아무 말이나 하는 거냐?”
놀리듯이 말한 에리히는 몸을 약간 젖히며 느긋한 태도로 판을 바라보았다. 박진감 넘치는 몇 수를 주고받은 이후 판세는 지지부진했지만 한 수, 한 수를 거듭할수록 테오도르에게 조금씩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체스를 잘 두는 편은 아니었다. 이따금 생각지도 못한 수를 두어 상대방을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거의 대부분 우연이었다.
“두 분이 잘 지내시는 건 저로서도 기쁜 일입니다.”
몇 개 남지 않은 졸을 전진시키며 테오도르가 말했다. 에리히가 방금 옮긴 졸을 금세 잡아내자, 테오도르는 낭패한 기색으로 마른 입술을 훑었다. 에리히가 말했다.
“그런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들었는데?”
“로즈안나가 말해주더군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는 언제까지 로즈를 그대로 놔둘 생각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