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93화 (93/191)

93화

“그런데 오늘은… 영애가 보이지 않는군요.”

아르사크는 빙그레 웃는 홀드빅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입꼬리는 흡족한 사람처럼 치켜 올라갔으나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여식은 잠시 요양을 떠났습니다. 마마께서 안부를 물어주신 것을 안다면 매우 기뻐할 것입니다.”

“저런, 자작의 심려가 크겠군요.”

“아비 된 몸으로 아픈 여식의 곁을 지키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그 아이에게 늘 공과 사를 구분해야 한다 가르쳤지요. 부모로서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혼자 머무르고 있습니다.”

“훌륭한 교육이로군요. 내 마음이 다 안타까워요. 루이제에게 내가 염려하고 있더라고 꼭 전해주기 바랍니다.”

“물론, 바로 전하겠습니다.”

“참, 어디로 요양을 떠났는지 알려주겠어요? 기운을 차릴 수 있도록 작은 선물을 보낼까 하는데.”

홀드빅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마치 웃는 모양의 가면을 뒤집어쓰기라도 한 것처럼 그대로다. 무언가 꿍꿍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아르사크는 짐짓 무표정하게 홀드빅을 바라보았다.

“존귀하신 마마께서 염려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부족한 여식에게는 은혜가 차고 넘치니 부디 말씀을 거두어 주시길 청합니다.”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겠다는 뜻이로군요.”

“작은 별장일 뿐입니다. 조용한 곳이니 여식의 몸도 곧 좋아질 것입니다. 수도로 돌아오면 가장 먼저 황후 마마께로 보내어 안부를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더 이상 실랑이를 해봐야 소용이 없을 것이다. 아르사크는 은은한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쾌차를 빌지요.”

홀드빅은 다시 한번 입가를 올려 웃고는 가볍게 절을 하고 물러났다. 고개를 든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와 눈빛을 주고받고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홀드빅 자작이 설마 딸을 가두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그토록 아끼던 딸인데 설마 그랬을까. 일단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알아보는 게 순서겠지. 반응을 보아하니 루이제가 수도에 없다는 것은 정말인 것 같아. 수도 안에 있다면 눈에 띄지 않을 리 없으니까.”

“자작가의 별장은 수가 꽤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에셴도 그렇게 말하더구나. 하지만 아무리 많은들 설마 개미굴처럼 많기야 하겠어? 찾다 보면 언젠가는 나올 거야. 일이 이렇게 된 데에는 내 책임도 어느 정도 있으니, 일단 루이제를 찾는 게 순서겠지.”

“너무 급하게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아르사크 님.”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아르사크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로즈안나의 눈에만 띌 정도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69장 이상한 분위기 (7)

연회가 언제쯤 무르익는다는 정확한 기준은 없지만, 황실 연회에는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 올리는 특별한 순서가 하나 있었다.

시종장이 에리히에게 무어라 귀엣말을 하자, 에리히는 연회장을 한번 응시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종장이 어디론가 허둥지둥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쪽 입구에서 높고 맑은 종소리가 울렸다.

황궁 연회에 처음 참석한 사람들은 웬 종소리인가 싶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으나, 종소리의 의미를 아는 사람들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소곤거리며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다들 기대에 부푼 표정이었다.

이윽고 입구를 가렸던 휘장이 양쪽으로 열리자 가까이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서부터 놀라운 비명과 찬탄이 물결처럼 연회장 전체에 퍼져나갔다.

바퀴가 달린 은색 테이블 트레이 위에, 마치 눈으로 뒤덮인 산의 일부분을 작게 줄인 듯한 얼음덩어리가 올라가 있었다.

정교하게 다듬지 않아 오히려 아름다운 그것은 맨 위쪽에서부터 연보라색, 연녹색, 그리고 옅은 하늘색으로 아름답게 물들어 있었다. 산등성이가 시작되는 아랫부분에는 마치 알록달록한 숲처럼 보이도록 조각을 내어 꾸민 갖가지 과일들이 산을 둥그렇게 감싸고 있었다.

“세상에, 이건 셔벗이군요! 이렇게 아름답게 만들 수가!”

“얼음으로 깎은 산 같아요. 어쩌면, 가까이 서 있으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아요.”

황실 연회의 분위기를 가장 무르익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순서였다. 접시가 비워질 틈도 없이 테이블 가득히 쌓여 있는 수많은 요리들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애피타이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가장 솜씨 좋은 요리장이 바로 이 순간만을 위해 고심하여 만든 대형 디저트가 서빙되는 것이다.

어떤 디저트가 나올지는 극비에 부쳐졌으며, 가끔은 의외의 즐거움을 위해 일부러 보고를 받지 않는 황제도 있었을 만큼 연회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요리장은 가운데가 옴폭하게 팬 유리그릇에 셔벗을 조금씩 담아 황제와 황후에게 직접 바쳤다. 그리고 난 후에야 다른 시종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유리그릇에 셔벗을 조금씩 담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도저히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색색의 얼음산이 순식간에 나부죽이 가라앉았다. 셔벗이라면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디저트였지만, 일단 규모가 어마어마했거니와 물들인 방식이 아름답고 독특해 사람들은 신이 났다.

“달콤하네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대체 무슨 방법을 썼는지, 얼음은 마치 눈처럼 부드럽고 입에 넣자마자 달콤한 향기를 남긴 채 순식간에 녹았다. 곁들인 과일은 청포도와 살짝 절인 복숭아, 그리고 수박 조각이었는데 셔벗의 맛과 무척 잘 어울렸다.

“시럽으로 색을 입힌 것일까요? 독특한 향기가 나는데.”

“요리장에게 물어봐. 순순히 알려주려 하진 않겠지만.”

“폐하께서도 모르시나요?”

“난 오늘 셔벗이 나오는 줄도 모르고 있었어. 이 순서는 모르는 게 더 재미있거든.”

과연 얼마나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 올 것인가 하는 기대는 손님들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요리사들 사이에서 ‘디저브’라고 불리는 이 순서는 매번 연회 때마다 디저트의 종류가 달라지기 때문에 철저히 비밀에 부치기만 한다면 주방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조차도 그 메뉴를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연회가 열리는 계절에 맞추어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재료를 이용한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었다.

유리그릇은 금세 비었다. 절정의 분위기에 다다랐던 연회가 서서히 파할 때쯤, 아르사크는 문득 뭔가 이상한 느낌에 눈을 깜빡였다. 배 속이 기묘한 열기로 따끈따끈하게 달아오른 듯했다.

“얼굴이 잘 익은 체리 같은데.”

에리히가 놀리듯 말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평소처럼 재빨리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얼굴을 보고 소리 없이 기겁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아르사크 님, 취하셨어요?”

“응? 취하다니… 술은 거의 안 마셨는걸.”

“그런데 얼굴이…….”

“아까 그 셔벗이야.”

이번에는 로즈안나와 아르사크, 둘 다 놀랐다. 그러고 보니 에리히의 뺨도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주변이 못 견디게 홧홧한 공기로 가득 찬 것 같은 느낌에, 아르사크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체 무슨 술로 만들었기에 이렇게 독한 거예요?”

“글쎄, 그것도 요리장에게 물어보면 알겠지. 설마 다 먹을 때까지 모를 줄은 나도 예상 못 했는데.”

“술맛이라고는 안 났으니 당연하죠! 맙소사.”

그러나 맛이 어떻든 술 셔벗의 위력은 대단했다. 적어도 아르사크에게는 그런 것 같았다.

로즈안나가 겨우 아르사크를 데리고 자리에서 내려가려는 순간, 에리히가 아르사크의 반대쪽 팔을 가볍게 잡았다.

“내가 데리고 갈 테니 시종들은 물리고, 정리를 부탁한다.”

“폐하, 괜찮으시겠습니까? 혼자서…….”

“글쎄, 날 업겠다고 큰소리를 쳐대기까지 했으니 그리 쉽지는 않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장 발등에 구멍을 내버리는 수가 있어요.”

능청을 떨던 에리히의 말을 뚝 끊은 아르사크는 팔을 휘젓듯이 그의 손을 뿌리치는 시늉을 하며 한두 걸음을 걸었다. 그러나 쓸데없이 굽이 높은 구두 때문에 금세 걸음이 흔들렸다.

로즈안나는 순간적으로 아르사크를 향해 달려가려다, 먼저 다가간 에리히를 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부디 조심하시고 편안히 쉬십시오, 폐하. 황후 마마.”

에리히가 부축하는 솜씨는 의외로 훌륭했다. 침실까지 가는 복도를 중간쯤 지났을 때, 아르사크는 취기와 불편한 구두 때문에 체중의 거의 절반 이상을 에리히에게 지탱한 채 거의 허공에서 발만 움직이는 수준이었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나란히 걷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날이 환했더라면 이따금 비틀거리는 아르사크의 걸음이 더 눈에 띄었겠지만, 다행히 군데군데 밝힌 촛불을 제외하고는 달빛조차 드문 그믐밤이었다.

“여긴 내 침실로 가는 길이 아니잖아요.”

“주정뱅이가 말은 따박따박 잘도 하는군.”

“누가 주정뱅이예요? 대체 무슨 술을 쓴 거야? 구두도 불편해 죽겠네!”

술이라면 유목 생활을 할 때도 어지간히 마셨고, 포도주 정도로는 취하지도 않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르사크가 벌컥 역정을 내는데도 에리히는 낮은 소리로 웃기만 했다.

“호밀을 증류해 만든 술이지. 아무 맛도 없고, 냄새도 없고, 색깔도 없어. 거의 물이나 비슷하지만 매우 독해. 단번에 그 정도를 먹어도 이만큼 버티니 주정뱅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뭐겠나?”

“그러는 폐하도 멀쩡하잖습니까. 저보다 더 멀쩡하니 더한 주정뱅이라고 불러드려야 하겠네요.”

“귀한 술이라 황실에서는 자주 마시거든.”

“잘났다.”

술기운 탓인지, 아니면 본심인지, 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래도 에리히는 재밌어 죽겠다는 듯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여긴…….”

“여기가 가까워서 데려왔을 뿐이니 오해는 하지 말고.”

누가 뭐랬나. 아르사크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뺨을 실룩이고는 드레스 자락을 휙 걷어붙이며 열린 문으로 앞서 들어갔다. 그새 취기가 좀 가셨는지 그나마 휘청거리지는 않았다.

에리히의 침실이었다. 예전에 한 번, 습격하다시피 쳐 들어왔던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들어오는 곳이다. 엄숙하지만 화려한 인동초무늬의 자수가 놓인 커튼이 눈에 띄었다. 아르사크는 신고 있던 구두를 아무렇게나 벗고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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