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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92화 (92/191)

92화

68장 이상한 분위기 (6)

초청장을 개인별로 나누어 보낸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연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도 전에 각 가문의 문양이 찍힌 마차들이 속속 황궁의 정원을 가로질러 도착했다.

가느다란 주렴을 달아 장식한 비단이 테이블 위에 깔리고, 싱싱한 향기를 뿜어내는 꽃을 장식하고, 곧 수십 가지나 되는 요리와 디저트가 누구나 자유롭게 먹을 수 있도록 줄줄이 놓였다.

연푸른 휘장을 두른 듯 장식한 무대에는 악사들이 활기차고 가벼운 음악으로 분위기를 흥겹게 만들고, 올해 새로 맞춘 여름 드레스와 예복을 입은 젊은 층이 먼저 홀을 채우고 저마다 즐겁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아르사크가 예상했던 대로, 연회에 참석한 손님들은 이제 갓 사교계에 진출했거나, 본격적으로 얼굴을 내민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법한 귀족의 젊은 자제들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부모와 마찬가지로 아르사크에 대해 반감을 가진 이들도 있었지만, 아직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지 않았거나 젊은 만큼 사고가 유연해 은근히 아르사크를 지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조용히 연회장을 누비며 나직하게 나누는 대화를 듣던 에셴은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결과에 은근한 미소를 띠었다. 겉으로는 뚜렷한 명분이 없는, 단순한 깜짝 파티로 여기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에셴이었다.

아르사크를 둘러싼 소문의 여파가 아직 남아있는 이때에, 갑작스럽게 그럴싸한 명분을 갖다 붙인 연회는 오히려 경계심을 사기 쉬웠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소문 같은 것은 황후에게도 황제에게도 아무런 타격이 되지 않았다는 듯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마침내 아르사크와 에리히가 나란히 연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자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던 귀족들이 일제히 절을 했다. 인사를 겸한 황제의 짤막한 연설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연회가 시작되었다. 춤곡이 연주되고, 포도주 잔을 건네는 시종들의 손이 바빠졌다.

에셴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아르사크 곁으로 다가가 마치 처음 만난 것처럼 치맛자락을 펼쳐 절한 뒤 고개를 들었다.

“무척 아름다우십니다, 마마.”

드레스를 칭찬하는 에셴의 말을 들은 몇몇 사람이 아르사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일부러 목소리를 조금 틔워 말을 건 이유를 알아차린 아르사크는 턱을 살짝 올리며 평소와는 다른 느긋한 미소를 띠었다.

“백작 부인의 안목도 훌륭하군요. 오늘 그대의 모습은 사람이라기보다 초여름의 햇살 같으니.”

에셴은 전체적으로 금빛이 도는 옅은 크림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여름 연회에서는 자주 보기 힘든 색인 데다 자잘하게 잡힌 주름의 레이스 이외에는 별다른 장식이랄 것도 없어서 그리 눈에 띄지는 않았다.

그러나 황후가 직접 칭찬을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에셴이 입었던 드레스와 비슷한 색깔의 드레스가 곧 몇몇 귀부인의 옷장 안에도 채워질 것이다.

그러나 에셴이 그런 색의 옷을 입은 데에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아르사크를 바라보던 몇 사람이 저도 모르게 낮은 감탄사를 흘리고 마는 것을 들으며 에셴은 또 한 번 보이지 않게 웃었다.

“급히 단장하느라 보잘것없는 차림을 칭찬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마마께옵서는 가장 푸른 여름밤의 신과 같이 우아하신데.”

이번에도 귀족들의 시선은 아르사크에게 집중되었다. 은은한 광택이 도는 검푸른 남청색의 로브 데콜테는 아랫단에만 금사로 수를 놓고 가슴께에서 천을 한 번 접은 것 이외에는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옷 자체는 단조로운 모양이었지만 다른 것은 그렇지 않았다.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칼을 굽슬굽슬한 모양으로 다듬어 복잡하게 땋고, 가느다란 사슬처럼 금을 세공하여 마치 베일처럼 늘어뜨린 머리 장식을 달았다.

촘촘하게 엮인 금줄 사이에는 매우 작은 다이아몬드를 엮어 빛을 받을 때마다 찬연하게 반짝거렸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서로 엮인 사슬의 가닥이 더욱 많아져, 별다른 장식 없는 드레스 위로 드문드문 늘어진 모양은 그야말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처럼 보였다.

옆에 서 있던 에리히는 아르사크와 에셴이 나눈 대화가 사전에 미리 말을 맞춰 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짧게 웃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다른 사람들은 황제마저 흡족한 듯이 미소를 띠는 황후의 차림에 대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이윽고 몇몇 사람이 아르사크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의 시선과 표정은 각기 달랐지만 아르사크는 미리 연습했던 대로 ‘황후다운’ 미소로 그들을 맞았다.

다소 쭈뼛거리던 아가씨들이 용기를 내어 아르사크에게 인사와 칭찬을 건네는 사이, 에셴은 언제 그 자리에 있었냐는 듯 은근슬쩍 몸을 비켰다.

“무대에 서도 되겠군.”

에리히의 목소리가 곁에서 들렸다. 한쪽 구석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있던 에셴은 에리히를 힐끔 쳐다보며 한쪽 입가를 올리고 웃었다.

“마마께서 준비를 많이 하셨지요.”

“대본은 누가 짰죠?”

“대체로 마마와 제가 짰습니다. 로즈안나도 조금 거들었지요.”

에리히는 어쩐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에셴이 혼자 생각했다기엔 너무 시적이고, 아르사크가 생각했다기엔 지나칠 정도로 격식에 맞았다. 로즈안나와의 합작이라니 이해가 되었다.

“잘 해내실까요?”

“의외로 친구를 잘 사귀더군요. 저렇게들 모여들었으니 아마 한두 명은 건지겠죠.”

“그 점은 폐하와 비슷하지 않아 다행이로군요.”

농담 같은 어조였지만 에셴은 진심이었다. 그 점을 아는 에리히는 미간을 찡그리며 짧게 웃었다. 에셴이 말했다.

“그럼, 폐하. 저는 이만 보이지 않는 곳으로 퇴장하겠습니다. 무대가 시작되면 원래 연출가는 커튼 뒤로 숨는 법이니까요.”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이자, 에셴은 가볍게 허리를 숙인 후 금세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사이 아르사크는 세 번째 무리와의 대화를 끝낸 뒤 왠지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에리히는 마치 아까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가갔지만, 그를 올려다보는 아르사크의 눈빛은 다소 험악했다.

“왜?”

“왜? 지금 그런 말이 나오시나요? 내가 그 많은 사람들 틈에서 식은땀 흘릴 동안 대체 어딜 갔던 거예요?”

“식은땀 흘리는 꼴 좀 구경할까 싶어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다만.”

“지금부터 제가 폐하를 그렇게 만들 예정입니다. 아마 연회가 끝날 무렵이면 잘 말린 살구처럼 되어 있으시겠네요.”

“지금껏 식은땀 흘린 걸 모조리 수포로 만들고 싶다면 그렇게 하든지.”

한껏 느긋한 태도로 에리히가 말했다. 다른 때는 상관없지만 오늘만은, 이 순간만큼은 천하의 아르사크라도 ‘황후’의 모습을 연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아는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놀려먹을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멀찌감치 선 귀족들은 몰랐을 것이다. 나란히 앉은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미소를 띤 채 폭언과 농담을 오가는 살벌한 소리를 주고받고 있다는 사실을.

에리히가 무어라 말하자 연극배우처럼 웃고 있던 아르사크가 몸을 일으키는 척하며 드레스 자락 아래로 그의 발목을 걷어찼고, 물이 든 잔을 가지고 아르사크가 돌아오자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손 안에서 잔이 휘청인 순간, 아르사크는 얼른 상체를 꼿꼿하게 세우며 에리히의 발등을 밟았다. 뒷굽으로 밟았기 때문에 무척 아팠다. 아르사크가 자리에 앉자마자 에리히는 눈을 부라리며 나직하게 말했다.

“장난해?”

“폐하야말로요.”

“발등에 구멍이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

“어머, 그럼 침실까지 업어드릴게요. 내일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겠죠. ‘황후의 등에 업혀 간 황제 폐하’라고요.”

아르사크의 뒤쪽에서 그들이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있던 로즈안나가 초조한 표정을 짓는 사이, 에리히는 입술을 내밀어 앞머리가 훅 들리도록 입김을 불고는 벌떡 일어섰다.

“두고 봐.”

“지금 맘껏 보시죠? 두고 보자는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서우니까요.”

에리히가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자 아르사크는 괜히 키득거리고 웃었다.

그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쥘부채지만 아르사크의 손목에 매달린 쥘부채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펼쳐진 적 없이 기묘한 장신구인 양 그대로다.

한참을 웃던 아르사크는 몇몇 사람들의 시선이 자기 쪽을 흘끔거린다는 것을 깨닫고서야 작게 헛기침을 하며 자세를 고치고 앉았다. 옆에 선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옆에 그림자처럼 붙어 선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로즈, 그렇게 서 있으면 답답하지 않니? 춤이라도 추고 와.”

“저는 아르사크 님을 모시는 시녀인걸요. 연회를 즐기고자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득 로즈안나가 귀족 가문의 서녀였다는 사실을 떠올린 아르사크는 뭐라 설명하기 힘든 복잡한 미소를 띠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 가문에서 로즈안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그것을 딱하게 여긴 선황후가 동갑내기인 황녀의 놀이 동무 겸 시중을 들 시녀로 그녀를 입궁시켰다고 했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의 부모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섣불리 물어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사람이 많구나. 놀라울 정도야.”

아르사크가 불쑥 말했다. 휘황찬란한 불빛과 빙글빙글 돌며 춤추는 사람들, 테이블 사이를 우아하게 거니는 자들, 포도주나 샴페인이 든 잔을 손에 들고 즐겁게 웃는 아가씨들.

사방에 가득한 어지러운 향기에 아르사크는 갑자기 눈앞이 아스라이 흐려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이었다.

“참으로 훌륭한 연회입니다.”

고개를 든 아르사크는 앞에 선 홀드빅 자작의 얼굴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참석하지 않은 줄 알았는데 느지막이 들어온 것 같았다.

저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르사크의 말은 생각보다 한 박자 늦게 나왔다.

“반갑군요, 자작.”

“다소 격조하였지요. 불찰을 탓하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홀드빅은 마치 혀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처럼 미끈한 말만 골라서 뽑아냈다. 문득, 이자도 혹시 오늘 내 앞에서 할 말을 연극하듯 준비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아르사크는 킥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다지 위엄이 있는 태도라고는 할 수 없었으나 피차 서로의 본질을 아는 사이다. 초면인 귀족들을 대할 때처럼 굳이 가면을 쓸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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