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67장 이상한 분위기 (5)
왠지 머리가 아팠다. 루이제는 묵직한 두통을 느끼며 서로 달라붙은 듯한 눈꺼풀을 억지로 떼었다.
깨어난 바로 그 순간, 루이제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깨닫지 못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몸은 딱딱한 벽에 기대어 있었고, 굽이진 나무 장식이 멀지 않은 모퉁이에 딱 달라붙어 있는 것이 보였다. 나뭇가지에 매단 의자에 앉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몸이 자꾸만 흔들렸다. 방이 움직이는 것 같다……. 방이 움직인다고?
“일어나셨습니까? 아가씨.”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순간, 루이제는 코끝에 끼치는 짙은 나무 향기를 알아차렸다.
“무슨… 이게 무슨 짓이지? 대체 내가……!”
몸을 일으키려 해보았으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손발이 묶인 것도 아닌데, 마치 몸 전체가 의자에 달라붙은 것처럼 무거웠다. 억지로 일어나려 하자 머리가 핑 돌았고, 연약한 몸은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귀가 의자의 시트에 닿자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보다 확실해졌다. 달그락거리는 말발굽 소리와 바퀴 구르는 소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차에 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런 경우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려 있었다’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슈로터! 대체 뭘 하는 거야!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이런,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시다니. 주인님이 슬퍼하시겠군요. 루이제 아가씨는 주인님의 기쁨이 아닙니까. 좀 더 웃으시지요.”
“웃기는 소리 집어치워! 이게 무슨 일인지 말해!”
“루이제 아가씨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주인님과 주인님의 가문을 위해 오랫동안 충성을 바쳤습니다. 당연히 주인님의 가장 소중한 자식이신 아가씨도 저의 충성을 받으실 권리가 있으시지요……. 제가 판단하건대, 요즘 아가씨께서 불필요한 일로 크게 무리를 하시는 것 같아 주인님께 아가씨의 요양을 청했습니다. 허락하시더군요.”
“요양이라고?”
루이제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슈로터의 눈앞에서 쓰러진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다시 한번 몸을 일으키려 애썼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힘을 주면 줄수록 머릿속이 쩡쩡 울렸고, 온몸의 기력이 손끝으로 줄줄 새 나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전신이 축 처졌다.
“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일을 아버님께서 아시면 너를 가만히 두실 것 같아?”
“저는 아가씨께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가씨께서 초콜릿을 드시고 쓰러지셨을 뿐이지요.”
슈로터가 느긋한 태도로 말했다. 루이제는 그제야 천천히 끊어진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황궁에서 전갈이 왔고, 자신은 그것을 읽었다. 아르사크로부터 온 전갈이었으므로 한참을 망설였다.
결국 편지를 쓰는 데에는 실패했으니, 차라리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전처럼 또 울면서 매달리면 매몰차게 거절하지는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황궁으로 갈 채비를 마쳤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루이제는 자신이 입고 있는 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황궁에 가기 위해 골라 입은 드레스였다. 옷을 입고 무엇을 했더라? 머리를 다듬었고, 마구간에서 말들이 소동을 피우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고… 지체된 틈에 하녀가 초콜릿을 가지고 왔다. 누구였지? 그 아이의 이름이 뭐였더라?
“초콜릿에… 약을 탄 거야? 내게…….”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슈로터의 입가에는 희희낙락한, 그러면서도 음험한 미소가 매달려 있었다. 속내를 숨기지도 않는 그의 태도에 루이제는 소름이 끼쳤다.
“나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면 아버님께서 네 목을 잘라 광장에 내버리실 거야.”
“저런, 그 버릇 나쁜 황후에게 배우셨습니까? 무시무시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래서는 훌륭한 숙녀가 될 수 없지요…….”
“감히 너 따위가 황후 마마를 두고 무엄하게 지껄이다니!”
그렇게 외친 것은 순전히 슈로터를 윽박지르고 싶은 순간의 기분이었을 뿐, 루이제가 진심으로 아르사크에 대해 존경심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슈로터는 소리를 지른 루이제를 향해 불쑥 몸을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지른 루이제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자, 슈로터는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언제부터 그런 천한 계집과 친밀한 관계가 되셨습니까? 이것 참, 자작 영애의 체면이 말씀이 아니군요. 심지어 그런 천것과 손을 잡고 도모하여 낳고 길러주신 아버님을 고발하려 하다니……. 보석과 드레스밖에는 없던 요 조그만 머리에 누가 그런 깜찍한 생각을 불어넣었는지 이 슈로터는 참으로 궁금합니다.”
루이제는 숨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지 않으려 해봐도 소용없는 일이다. 사냥꾼 냄새를 맡은 사슴처럼, 몸속의 핏줄 한 가닥까지 모조리 예민하게 곤두서고 마는 것이다.
자신은 여전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고, 움직일 수 있다 해도 마차는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것인지도 모르는데 중간에 뛰어내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루이제는 아버지가 정말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기나 한지 의문스러웠다. 요양이라니, 슈로터의 그 말을 정말로 믿으셨단 말인가?
어쩌면 아버지가 이자에게 이 모든 걸 지시한 것은 아닐까?
“겁먹은 표정이 무척 귀여우시군요.”
“닥쳐!”
“걱정하지 마십시오. 말씀드렸다시피 아가씨는 요양차 수도를 떠나시는 것뿐입니다. 이전에도 여러 번 별장에서 머물다 오시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그 비슷한 것이라 생각하시면 됩니다. 편안히 쉬시다가, 돌아가실 때는 황후의 왕관을 머리에 얹고 돌아가시면 되겠지요.”
그의 마지막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루이제는 이제 정확히 알았다. 눈물에 젖은 새파란 눈동자를 여유롭게 내려다보던 슈로터는 흥미가 다했다는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창밖을 내다보았다.
좁은 마차 안을 꽉 채운 향수 냄새에 속이 울렁거리고 정신이 희미해졌다. 저항하려 해보았지만 눈꺼풀이 다물리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루이제는 식은땀을 흘리며 다시 한번 정신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 * *
며칠 전 전갈을 보낸 후 아무런 소식도 없던 루이제가, 요양을 위해 수도를 떠났다는 사실을 아르사크에게 알려준 사람은 에셴이었다.
연회 당일, 일찌감치 황궁에 도착한 에셴은 아르사크에게 루이제의 소식을 전하며 사뭇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마마.”
“이상하다고?”
“네, 제가 마지막으로 자작 영애를 보았을 때, 건강에는 전혀 이상이 없어 보였습니다. 실제로 홀드빅 자작가는 지방 여러 곳에 별장을 가지고 있지만, 루이제가 몸이 아파 요양을 떠난 적은 제가 알기로 한 번도 없습니다.”
아르사크도 에셴과 비슷한 생각을 했다. 요양을 떠나야 할 정도로 몸이 아팠다면 뭔가 전조가 있었어야 한다. 노인도 아니고,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히 황궁을 드나들던 사람이 요양을 해야 할 정도로 급병을 얻다니?
“루이제가 요양을 떠났다는 별장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아보았나요?”
거기까지는 에셴도 알아내지 못했다. 그 점도 역시 미심쩍은 부분이었다. 요양을 하기 위해 떠난 것인데 굳이 행선지까지 숨길 필요는 없다.
그러나 에셴의 줄이 닿는 정보원은 저택의 고용인들 중 누구도 루이제가 간 곳을 모른다고 했다. 홀드빅 자작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겠지만, 자작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가 없었다.
“마마께서 직접 물어보시는 것은 어떠신지요?”
에셴이 조심스럽게 권했다.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수밖에 없겠군요. 하지만 루이제가 소문의 출처를 조사하고 있었다는 걸 자작이 알았다면 아마 내게도 알려주지 않을 거예요.”
“저도 따로이 수소문을 해보겠습니다. 마마께서는 오늘 밤 자작을 떠봐주세요.”
아르사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 폭넓고 상세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루이제의 존재가 필요하다는 데에는 에셴도 동의하는 바였다.
랜크버 백작가는 너무 오랫동안 사교계로부터 은둔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당장 스스럼없이 정보를 공유할 만한 상대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사교 모임에 자주 출석하고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루이제라면, 한담을 빙자해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있었다. 루이제가 에셴처럼 유도 신문까지 능숙하게 할 만한 실력은 못 갖췄더라도, 들은 것을 그대로 옮겨줄 수 있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마마, 드레스를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로즈안나의 말에 에셴은 가볍게 무릎을 굽혀 절을 한 뒤 방을 나섰다. 원래는 귀족 부인인 에셴이 옆에서 시중을 거들어주는 것이 예법에 맞았겠지만, 그런 것을 아르사크가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에셴이 나가고 나자 로즈안나와 시녀 두 명이 나무로 된 가림막과 드레스, 그리고 포장조차 풀지 않은 상자를 팔 안 가득 안고 들어왔다.
“로즈, 저 상자들은 다 뭐지?”
“아, 저것은… 이쪽으로 가지고 와라.”
시녀는 테이블 위에 상자를 얌전히 내려놓았다. 제법 커다란 상자가 하나, 그리고 납작한 모양의 상자가 하나, 길쭉한 상자 하나, 총 세 개였다. 아르사크는 그중 길쭉한 상자를 집어 리본의 매듭을 풀었다. 무게도 없이 흘러내리는 질 좋은 천 안에 검은 쥘부채 하나가 들어 있었다.
“부채?”
“폐하께서 오늘 연회를 위해 아르사크 님께 보내신 것입니다. 드레스에 맞추어 부채와 구두, 그리고 장신구를 보내셨습니다.”
아르사크는 부채를 펼쳐 보았다. 귀부인들은 어딜 가든 쥘부채를 하나씩 들고 다녔고, 말을 많이 하는 대신 부채를 움직여 자신의 뜻을 표현하기도 했다.
아르사크는 물론 부채로 의사 표현을 하는 것 자체를 웃긴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이건 더울 때나 쓰는 거지.”
“폐하께서도 그러시라고 보내셨을 겁니다. 아르사크 님께 뭘 강요하시는 것이 아닐 거예요.”
이 자리에 없는 에리히의 뜻이야 아무도 알 수 없었지만 로즈안나는 그렇게 말했다.
견고한 흑단목으로 살을 만들고, 그 위에 덧댄 검은 비단에는 금사로 공작의 꼬리 무늬를 수놓아 화려하게 장식한 물건이다. 자수만 살펴보아도 공이 얼마나 들어갔을지 짐작할 만한 고급품이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별 흥미 없다는 듯이 부채를 내려놓았다.
“아르사크 님?”
“긴장해서 식은땀이라도 흘릴까 봐 보내신 건가? 내가 생각하기엔 폐하께서 더 식은땀을 많이 흘리실 것 같은데. 정성을 봐서 부채질이라도 좀 해드려야겠구나.”
톡 쏘아붙이는 어린애처럼 말하면서도, 아르사크는 가림막 너머로 들어가 옷 갈아입을 준비를 했다. 로즈안나는 웃음을 참으며 아르사크의 드레스를 받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