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이해가 잘 안 되는군.”
“보통 연회나 모임의 초청장은 가문의 대표에게 발송되죠. 하지만 아직 미혼이거나, 나이가 다소 어리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당당히 초대를 받는다면 더 기쁘지 않을까요? 참석해야 하겠다는 의무감도 생길 테고요. 게다가 아시다시피 저를 싫어하는 귀족들이 많고, 지난번 신관들이 저를 지지한 일로 골은 더 깊어졌을 겁니다. 어쩌면 서로 눈치를 보느라 연회에 참석할 마음을 먹기 힘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아직 가문의 대표도 아니고,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오랜만에 황궁의 연회를 구경하고 싶은 젊은 사람들의 수가 더 많을 테니까요.”
굴러떨어진 말을 쳐다보던 에리히가 고개를 힐끔 들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생각보다도 이번 연회의 성격과 목적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하게 새겨진 눈의 수를 에리히가 다 헤아리기도 전에, 아르사크는 신난 표정으로 테이블을 탁 두드렸다.
“다 합쳐서 8. 또 제가 이겼군요.”
“뭐? 거짓말하지 마.”
“세어서 합쳐보시죠?”
아르사크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에리히는 미간을 좁힌 채 말을 하나씩 쥐고 신중하게도 눈의 수를 살피고 또 살폈다. 1, 2, 4, 1. 아르사크의 말대로 모두 합쳐서 8이다. 에리히가 말을 던질 기회는 이번이 마지막이었는데, 에리히가 이기려면 적어도 10 이상의 수가 나와야 했다.
“재미없어.”
“고작 두 판 진 것 가지고 벌써 우는소리 하시면 곤란한데요.”
“말이 이상하게 생겼잖아.”
“재료가 재료다 보니 어쩔 수 없어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가지고 노는 방식은 민간에서도 자주 하는 주사위 놀이와 별 다를 바 없었지만, 에리히의 말대로 희한한 것은 말의 모양이었다.
주사위처럼 여섯 면이 매끈하게 깎인 것이 아니라 굴곡지고 울퉁불퉁했다. 도저히 제대로 던질 수 없을 것 같은 모양인데도, 테이블 위에 굴리면 그래도 자리를 잡고 서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뭘로 만들었는데? 돌인가?”
“한번 맞춰보시죠.”
이건 또 난데없는 수수께끼다. 에리히는 어려운 시험 문제를 맞닥뜨린 학생처럼 이맛살을 찡그린 채 말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골똘한 표정이었다.
“나무는 아닌 것 같고.”
“이렇게 하얗게 만들기는 어렵죠. 값도 비쌀 테고요.”
“돌이라기엔 너무 가볍고 촉감도 독특하군. 색깔도…….”
순간, 에리히의 머릿속에 번개같이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설마 뼈인가?”
“네. 양의 복사뼈를 다듬어 만든 거예요.”
양에게도 복사뼈가 있다는 사실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다. 에리히는 한층 호기심이 생긴 표정으로 같은 듯하면서도 각각 다른 말을 새삼스럽게 살폈다.
토르갈뿐만 아니라 몇몇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놀잇감이라고 했다. 십수 개의 말 중 같은 모양을 손가락으로 퉁겨 맞추는 놀이도 할 수 있고, 몇 개만 골라 던졌다 받는 놀이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방금 아르사크와 에리히가 한 것은 말을 던져 나온 눈금의 수만큼 전진하는, 주사위 놀이와 거의 비슷한 놀이였다.
“겨울이 되어서 춥고 집안에만 있어야 하면 심심했으니까요. 이걸 가지고 많이 놀았죠.”
“그런데 이건 어디서 난 거야? 설마 요리장에게 가서 양 뼈를 달라고 한 건 아니지?”
아르사크는 눈을 가늘게 뜨며 실크로 된 주머니 안에 말들을 쓸어 넣었다.
“티리야가 보낸 거예요.”
“그대가 요즘 너무 얌전한 것 같아서 난 걱정이 되거든.”
“설마 제가 날뛰는 걸 바라고 계신 줄은 몰랐군요. 지금이라도 당장 기대에 부응해 드릴 수 있는데, 한번 해볼까요?”
“원래 폭풍 전의 하늘이 제일 맑고 조용한 법이지. 지금 당장 보지 않아도 조만간 보게 될 것 같아.”
이죽거리러 온 건지 놀러 온 건지 분간을 할 수가 없다. 이럴 때마다 아르사크는, 그나마 혼란스레 술렁거리던 마음이 깨끗하게 가라앉는 것을 느끼곤 했다.
‘언제는 망나니처럼 군다더니, 기가 막혀서.’
“어렸을 때 뭘 하고 노셨나요?”
말이 든 주머니를 한쪽으로 밀어두며 아르사크가 묻자, 에리히가 들고 있던 찻잔 너머로 눈을 힐끔 치켜떴다.
“놀 시간이 별로 없었지. 황태자는 바쁜 몸이거든.”
짐짓 뻐기는 태도로 농담을 하자 아르사크는 콧잔등을 실룩이며 코웃음을 쳤다.
“공부만 해서 애가 이렇게 된 모양이로군요.”
“‘이렇게 된’이라는 건 대체 무슨 뜻이지? 무척 궁금한데.”
아르사크가 대답하지 않고 딴전을 피우자, 에리히는 얄밉다는 듯이 눈을 흘기면서 턱을 괴었다.
“놀이라고 할 만한 게 많이 없었던 건 사실이야. 시간보다는, 상대가 거의 늘 테오뿐이었으니까.”
“여동생은요?”
“여동생은…….”
에리히는 잠시 생각에 잠긴 사람처럼 말을 잃었다. 유레나는 어렸다. 다섯 살 터울이었지만, 에리히는 일찌감치 황태자로 책봉되어 또래들보다 어른스럽게 행동하는 법부터 배운 반면 유레나는 형제가 많은 집의 막내처럼 자유분방하게 자랐다.
유레나가 세 살 때까지는 신발이 모두 새것이었다고 한다. 유모나 시녀들은 말할 것도 없고, 어머니인 선황후나 심지어는 선황까지도 유레나를 안고 다녔기 때문이다.
소문처럼 신발을 단 한 번도 신기지 않은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에리히의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도 어린 유레나는 항상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노는 것을 좋아했고 에리히나 테오에게도 틈만 나면 같이 놀아달라 졸라대곤 했지만, 다섯 살 어린 여동생과 인형 놀이를 하는 것은 왠지 쑥스러워서 에리히는 매번 내키지 않는 척했다.
“로즈안나가 온 뒤부터는 나에게 놀아달라는 말을 별로 하지 않게 됐지.”
에리히도 로즈안나가 처음 황궁으로 왔던 날을 테오도르만큼이나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깡마른 손목에 우울한 눈빛, 황녀의 놀이 동무가 되어야 하니 옷만큼은 잘 차려입었지만 유행하는 아동복의 아기자기한 장식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
덫에 걸린 새끼 토끼처럼 겁을 먹은 것 같았고 자신이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지방에서는 행세깨나 한다는 남작의 딸이라는데 어째서 태도가 그 모양인지. 여동생이 소중한 마음에 에리히는 한동안 로즈안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유레나를 가장 잘 아는 건 로즈안나였다. 아마 로즈안나를 가장 잘 아는 것도 유레나였겠지. 둘은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처럼 사이가 좋았어.”
“로즈가 말하기로는, 폐하께서 자신을 많이 살펴주셨다고 하더군요.”
“그래. 나도 할 수 없었던 일을 로즈안나가 대신해 주었으니.”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이란 죽어가는 여동생의 곁을 지키는 일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유레나에 대해 아르사크가 무언가 더 물으려던 찰나, 좀 쉬라고 보냈던 로즈안나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폐하, 황후 마마. 차를 더 올릴까요?”
“아니, 됐다. 이제 가봐야 해.”
에리히가 몸을 일으키자 로즈안나는 문간에서 살짝 비켜섰다. 뒤따르는 시종들과 함께 그가 나가버리고 나자,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의 곁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아르사크 님, 차를 더 드시겠어요?”
“아니, 괜찮아. 그보다 루이제에게 보낸 전갈은 어떻게 됐지?”
“아직 답이 오지 않았습니다.”
“이상한걸. 평소엔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말이야.”
클루이트가 관련된 소문이 신관들의 지지로 일축된 후, 루이제는 한 번도 아르사크를 찾아오지 않았다. 그전까지만 해도 뻔질나게 드나들며 영양가 없는 수다를 떨던 일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설마 일이 다 해결됐으니 이제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물론 아르사크는 루이제가 자신을 염탐했건 말았건 크게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지만, 랜크버 백작 부인보다 좀 더 젊고 어린 계층, 다시 말해 루이제 또래들 사이에서 오가는 정보를 획득할 필요가 있었으므로 루이제를 완전히 포섭하는 것은 꽤 중요한 과제였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루이제가 오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아르사크 쪽에서 입궁하라는 전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루이제는 거기에도 반나절 내내 대답이 없었다.
“아르사크 님, 자작 영애를 너무 가까이하시는 건 좋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홀드빅 자작이야말로 아르사크 님의 실각을 바라 마지않는 사람일 테니까요.”
“나도 잘 알아, 로즈. 그래서 루이제를 더 가까이 두려는 거야. 애지중지하는 딸이 황후 옆을 드나들면 홀드빅 자작도 행동을 좀 신중하게 하겠지. 물론 그런 사람이 변하리라 믿진 않지만, 적어도 또 이번처럼 섣불리 추문을 퍼뜨리는 짓은 하지 않을 거란 이야기야.”
아르사크의 말에 로즈안나는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르사크 님, 설마 이번 일이…….”
“확증이 있는 건 아니야. 하지만 때로는 직감이나 정황이 물증보다도 더 정확할 때가 있거든. 그자가 아니라면 누가 날 이토록 미워하겠어? 내가 부정한 짓을 저질러 일찌감치 폐후가 되면 가장 득을 볼 사람이 누구겠니?”
“폐하께서도 아르사크 님의 생각을 알고 계신가요?”
“글쎄, 알 수 없지. 말한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왠지 알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알면서도 확증이 없으니 움직이지 못한 거지. 기온 백작이라는 자와 다른 귀족들이 폐하를 알현하러 왔을 때, 홀드빅 자작은 그 자리에 없었어. 알아보니 결혼한 큰딸을 보러 갔다더구나. 결혼한 지 벌써 육 년쯤 되었는데, 그사이 단 한 번도 찾은 적 없다는 큰딸을 왜 하필 그날 만나러 가야 했을까?”
아르사크뿐만 아니라 에리히도 그 점을 일찌감치 의심했다. 그런 자리에 얼굴을 내밀지 않을 홀드빅 자작이 아니었던 것이다.
수도 귀족들의 세력을 자기 휘하에 있는 대로 끌어모으려 혈안이 되어 있는 지금, 기온 백작이 아니라 자신이 앞장서 귀족들을 이끌고 와야 했을 판에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의심을 불렀다.
“그럼 아르사크 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작 영애를 끌어들일 필요가 있으신 거군요.”
“맞아. 랜크버 백작 부인이 나를 돕겠다고 나섰지만 그 사람 하나로는 부족해. 홀드빅 자작가는 랜크버 백작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발이 넓지. 루이제가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수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필요한 것도, 필요치 않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