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89화 (89/191)

89화

“유레나 님이 살아 계셨을 때… 에리히 님도, 테오도르 님도, 참 자주 꽃을 꺾어 오셨죠. 유레나 님도 그걸 무척 좋아하고 기다리셨고요. 에리히 님은 장미며 백합, 작약 같은… 정원사가 온갖 고생을 해서 키운 꽃들 중 가장 아름답고 풍성한 것을 자주 가져오셨지만 테오도르 님은 조금 달랐죠. 마치 에리히 님과 일부러 반대되는 것을 고르기라도 한 것처럼, 가끔은 누구도 이름을 모르는 들꽃 같은 것들을 더 많이 가져오셨어요.”

테오도르와 다르게, 로즈안나에게는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 기억이었다. 눈을 감으면, 유레나 황녀가 아직 살아있을 때가 너무도 쉽사리 떠올랐다. 금빛과 장밋빛, 세상에 존재하는 오색찬란한 빛깔을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마치 햇빛처럼 부드럽게 채워 넣었던 방.

온갖 좋은 것들과 아름다운 것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대부분이 평생을 살아도 구경하기 힘들었을 것들이 유레나의 방에는 흔한 장난감처럼 많이 있었다.

달콤한 꿈결의 한 조각 같은 그 방의 주인이었던 유레나. 보석으로 장식한 침대에 앉아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찬란한 미소를 가졌던 소녀는 오랜 옛날에 사라져 지금은 세상에 없다.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로즈안나는 보이지 않는 바늘이 자신의 가슴속에 고통스러운 무늬의 자수를 놓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한 땀, 한 땀, 수가 놓일 때마다 로즈안나의 가슴속에 난 상처에서는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제고 멈추지 않았다.

“네가 아직까지 그 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 로즈.”

테오도르가 나직하게 말했다. 바늘을 쥔 로즈안나의 손이 조금 느려졌다. 벤치 아래로 짧게 늘어진 그림자를 바라보는 테오도르의 눈빛도 약간 우울해 보였다.

“그때 네게… 아무런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는 걸, 나는 계속… 마음에 두고 있었어. 빚을 진 것처럼. 실제로 빚을 졌지. 나뿐만이 아니라 폐하께서도,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선황과 선황후께서도 네게 빚을 진 거야. 너만이… 너만이 유레나 님의 곁에 있었으니까. 너만이 유레나 님의 마지막을 지켜주었으니까.”

“빚을 졌다는, 그런 생각은 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건 저에게 있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요. 아무도 유레나 님을 돌보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남은 게 아니었어요. 수십 명, 수백 명, 설령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유레나 님의 곁을 지키겠다 나섰더라도 저 역시 유레나 님의 곁에 있었을 겁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유레나 님의 손을 잡아드릴 수 있는 바로 그 자리에요.”

유레나를 향한 로즈안나의 한결같은 충성은 유레나가 아프기 전까지는 그다지 남들 앞에 드러나지 않았다. 둘이 처음 만난 나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으니 오히려 그것이 당연했다.

로즈안나를 궁으로 데리고 온 선황후도 로즈안나가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모두 이해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그 당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왜 언니나 오빠들과 달리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지, 아버지가 자신을 왜 한 번도 안아주지 않는지, 집안의 하인들이 왜 자신을 못 본 척 피하는지, ‘서녀’라는 말이 무슨 뜻이며, 어떤 존재인지도.

다만 어린 로즈안나가 몰랐던 것은 그게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었다.

엄연히 귀족가의 딸임에도 불구하고, 로즈안나는 선황후에 의해 황궁으로 불려오기 전까지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아버지가 체면치레는 한답시고 건성인 보모 겸 교사를 하나 붙여주어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줄 알았지만, 장차 귀족가의 아가씨로 자라며 필요할 예절이나 소양은 전혀 교육받지 못했던 것이다.

“선황후 마마는 제 은인이나 다름없는 분이세요. 그분이 저를 구해주셨고, 살 수 있는 자리를 주셨지요. 선황후 마마의 눈에 띈 것은 정말 운이 좋았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일이었어요.”

로즈안나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로즈안나가 어떻게 궁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테오도르도 그 사정을 자세히는 몰랐다.

다만 로즈안나의 부친의 친척 누나뻘 되는 사람이 로즈안나를 가엾게 여겨 황궁 구경이나 시켜줄까 하고 데리고 왔다가 선황후의 눈에 띄었다는 사실밖에는 몰랐다.

집에서 홀대받는 서녀에 불과한 로즈안나를 선황후가 어째서 하나뿐인 딸의 놀이 동무로 선발했는지,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이제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유레나 님은… 유레나 님은 제게 아주 소중한 분이 되었어요.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죠. 우리는 처음 만난 날부터 친구가 되었고, 자매가 되었어요. 선황 폐하와 선황후 마마도 제게 크나큰 은혜를 베푸셨지만, 유레나 님은 제게 있어 하나뿐인 친구이고, 가족이셨어요.”

그 사실은 테오도르도 알고 있었다. 로즈안나가 유레나의 놀이 동무가 되어 황궁에서 살게 된 첫날은 아직도 눈에 선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살구색 드레스를 입고 양 갈래로 앙증맞게 땋아 내린 머리칼이 다 흐트러지도록 신나서 펄쩍펄쩍 뛰던 유레나, 그리고 그 옆에 쭈뼛거리고 선 채 고개도 제대로 들지 못하던 로즈안나.

처음에는 오히려 유레나가 로즈안나의 놀이 동무로 뽑힌 것 같았다. 사소한 움직임에도 겁을 먹고, 아프거나 배가 고파도 감히 누구에게 무엇을 달라고 요구하지 못하던 로즈안나가 풀이 죽어 있으면 유레나는 평소보다 더 소란을 떨고 노래를 부르고 정원을 뛰어다녔다.

같은 여섯 살이면서도, 마치 로즈안나의 기분을 알고 그것을 달래주려는 것처럼 행동했다. 인형을 나눠주고, 동화책을 읽어주고, 간식을 얻으러 주방으로 달려가는 동안 로즈안나는 서서히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아이, 모자람도 슬픔도 모르는 천진난만한 황녀가 영원히 천진난만하게 빛날 수 있도록 자신이 여기에 온 것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깨달아도 로즈안나는 오히려 기뻤다. 드디어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만난 것이다. 모두들 자신을 거부해도 이제 괜찮았다. 유레나가 그 종달새 같은 목소리로 ‘로즈! 오늘은 뭘 하고 놀까?’하고 말해주기만 한다면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미움을 받아도 견딜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로즈안나, 유레나 님은 널 정말 좋아했어.”

갑자기, 엉뚱한 소리라도 하는 것처럼 테오도르가 불쑥 말했다.

“알아요.”

“아냐, 넌 다 알지 못할 거다. 너도 그때는 꼬마였으니까. 똑똑하고 눈치 빠르고 조숙했지만… 그래도 역시 아이였잖니. 유레나 님은 정말로 너를 자매처럼 생각하셨어. 결혼을 하더라도 너와 헤어지지 않겠다고, 동화책 속에 나오는 착한 요정이나 마법사처럼… 너를 더욱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

갑자기 눈앞이 무섭게 흔들렸다. 그 이유를 깨닫기도 전에, 로즈안나는 방금 수를 놓은 자리 위로 물 자국이 둥그렇게 번지는 것을 보았다.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흐느낌조차 나오지 않는데 양 뺨을 타고 눈물은 계속 흘렀다.

“천사 같은 아이였지. 누구에게나 다정했지만, 로즈안나. 너도 유레나 님께는 특별한 존재였던 거야. 그러니까… 슬픔만으로 유레나 님을 기억하지 마.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으로, 유레나 님이 웃고 노래하고 정원을 뛰어다니던 그런 모습도 떠올리면서 웃어다오. 그래서 네 마음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길 유레나 님도 원하실 테니까.”

말을 마친 테오도르는 소매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로즈안나에게 건넸다.

“그리고 내가 그런 조그만 꽃들을 꺾어갔던 건 유레나 님을 위해서가 아니었어.”

눈물을 닦던 로즈안나가 고개를 들었다. 양쪽 눈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너를 위해서였지. 어쨌든 유레나 님의 방에 장식된 것이긴 하지만… 에리히 님이 유레나 님을 위한 꽃을 잔뜩 꺾었으니, 나는 널 위해서 꽃을 꺾었던 거야. 하지만 나는 에리히 님이 아니니 감히 정원의 꽃에는 손을 대기 힘들었고… 그래서 결국 그렇게 조그만 꽃밖에 가져가지 못했지만, 네가 그 꽃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니 나로선 기쁘구나.”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고 있어 로즈안나의 표정은 알아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동그랗게 뜬 눈동자가 약간 흔들린 것 같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눈썹을 누그러뜨린 채 미소를 띠었다. 로즈안나. 처음 보았을 때는 슬픔에 잠겨 사라질 것 같았고, 너무 일찍 철이 든 탓에 유레나처럼 아이답게 뛰노는 것도 멋쩍어했던 소녀.

유레나가 죽은 후 로즈안나는 스스로 상복을 입었다. 황제가 그녀를 위해 마련해 주었던 작은 방에 틀어박혀 유레나를 따라 죽고 말 것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으려는 것처럼, 말마따나 죽은 사람처럼 조용히 일만 하며 살았다. 그런 로즈안나를 먼발치에서 지켜볼 때마다 테오도르는 마음이 아렸다.

“…늦었지만, 감사합니다. 테오도르 님.”

“전에도 말했지만, 요즘은 네가 잘 웃지. 아르사크 님을 모시느라 곤란해하면서도 즐거워 보여. 난 그게 무엇보다 기쁘고, 널 부른 일을 후회하지 않는다.”

“저도 후회하지 않아요. 감사할 따름입니다.”

테오도르는 복잡한 표정으로 미소를 띠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떠나고 난 후에야 로즈안나는 손수건을 돌려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테오도르의 손수건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밋밋했다. 얼룩덜룩하게 젖은 부분을 손끝으로 가만히 쥔 채, 로즈안나는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 있다가 다시 바늘을 쥐었다.

66장 이상한 분위기 (4)

아르사크가 황후로 책봉된 후 처음으로 열리는 황실의 공식 연회는 이례적일 만큼 크게 치러졌다.

보통 축일이나 황족의 생일처럼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고서야 몇몇 가문에게만 초대장이 돌아가 소규모로 치러지는데, 아르사크는 에셴과 의논 하에 수도 내에 거주하는 모든 귀족가에 빠짐없이 초대장을 보냈다.

독특한 점은, 가문을 대표하는 가주에게 자식이 있는 경우, 그리고 그 자식이 사교계에 진출했거나 진출할 수 있는 경우 그 자식들에게도 따로 일일이 초대장을 보냈다는 것이었다.

“왜 그렇게 귀찮은 짓을 했지?”

에리히가 부드럽게 그러쥐었던 주먹을 풀며 물었다. 딸그락, 소리를 내며 돌 조각처럼 생긴 조그만 무언가가 테이블 위로 굴렀다.

“자식들과 부모는 별개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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