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 * *
루이제는 책상에 놓인 종이를 빤히 바라보며 눈매를 찡그렸다. 동그랗고 말간 눈동자가 곧 촉촉하게 젖어 드는가 싶더니, 복숭앗빛으로 물든 뺨을 타고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또래의 남자들이 보았더라면 사흘 밤낮을 애태우며 상사병에 빠지고도 남을 가련하고 사랑스런 모습이었지만, 누군가 지금 루이제에게 열렬한 사랑 고백을 한다면 그녀는 잉크병을 집어던질 것이 분명했다.
“안 돼! 못 하겠어!”
글씨가 여백을 반쯤 채운 종이를 마구잡이로 구겨 내던진 루이제는 책상에 이마를 파묻으며 어린애처럼 울음을 훌쩍거렸다.
아침부터 지금껏, 반나절이 지나도록 책상 앞에 앉아 아르사크에게 쓸 편지의 내용을 고민했건만 아무리 해도 제대로 된 내용이 떠오르지 않았다.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던 루이제는 동이 트자마자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여러 장의 편지지를 꺼내 왔다.
아버지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안 이상, 앞으로 아르사크에게 들키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뒤늦게 자신이 사실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 발각된다면 그때야말로 큰일이 날 것이라고 루이제는 생각했다.
결국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르사크에게 솔직히 고하되, 제발 한 번만 아버지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것이었다.
‘아무도 죽지 않았잖아, 쫓겨나지도 않았고! 그러면 한 번쯤 용서할 수도 있는 거지!’
루이제는 그렇게 순진한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편지를 쓰면 쓸수록, 자신이 너무 안일한 것은 아닌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용서라니, 그것을 결정하는 건 아르사크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아르사크에게 모든 사실을 알리면 그것은 자동적으로 에리히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르사크라면 모를까, 에리히는 결코 자신의 아버지를 용서할 리 없었다.
그런 이유로 루이제의 책상 위에는 쓰다 만 편지가 아무렇게나 뭉쳐진 채 벌써 수십 장이나 구르고 있었다.
책이라곤 도통 읽지 않는 그녀가 이토록 오랜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었던 것만 해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어깨며 허리, 뒷목에서부터 등줄기 아래까지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렇게나 고생을 했는데도 사태를 해결할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루이제 아가씨, 황궁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노크 소리와 함께 하녀가 들어왔다. 기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루이제는 새끼 새처럼 팔딱거리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누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무… 무슨 일로? 왜?”
“주인님과 아가씨 앞으로 온 연회 초청장입니다.”
하녀는 초청장이 놓인 은쟁반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책상 위가 너저분한 것이 낯설었던 것이다. 루이제는 짐짓 성난 표정을 지으며 초청장을 탁 소리가 나도록 집으며 말했다.
“뭘 보고 섰어? 나가, 얼른.”
“아, 네. 저, 루이제 님, 책상을 치울까요?”
“내가 할 테니까 나가.”
이번에는 하녀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손수 책상을 치우겠다니, 오늘 아침 해가 서쪽에서 떴던가?
루이제는 꼼꼼하게 봉해진 봉투를 들여다보다 작은 편지 칼도 쓰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봉투를 찢었다.
안에 든 것은 분명 초청장이었다. 향료를 쓴 종이를 사용했는지 향기로운 은방울꽃 향기가 났다. 그럴싸한 초대의 말끝에 적힌 것은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었다.
“갑자기 웬 연회…….”
구시렁거리던 루이제는 한숨을 푹 쉬며 초청장을 손에 든 채 밖으로 나갔다. 하도 오랜 시간 머리를 쓴 탓인지 피곤하고 배가 고팠다.
간식을 먹은 루이제가 정원의 그늘 가에서 한가로운 낮잠에 빠진 사이, 초청장을 들고 왔던 하녀와는 다른 하녀가 루이제의 방을 청소하기 위해 들어왔다.
그녀 역시도 루이제의 책상이 너저분하게 어질러진 것에 한 번 놀라고, 구겨진 채 여기저기 뒹구는 종이들이 수도 없이 많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아가씨도 참… 무슨 편지지를…….”
둥글게 뭉쳐진 종잇조각을 치우던 하녀는 문득 호기심이 생긴 표정으로 열린 문틈을 살짝 내다보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녀는 구겨진 종이 중 한 장을 슬그머니 펼쳤다. 혹시 제멋대로인 막내 아가씨가 사랑에라도 빠진 건 아닌지, 그래서 밤새 연애편지를 쓰느라 골머리를 썩인 건 아닌지 궁금했다. 단지 그 정도의 호기심이었다.
“아!”
저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지른 하녀는 갑자기 문밖에서 들린 발소리를 눈치채지 못했다. 구겨진 종이를 든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그 손가락 사이에서 종잇조각이, 누군가의 손에 의해 쑥 빠져나간 순간, 그녀는 그제야 주변을 가득 채운 짙은 향수 냄새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슈로터… 님.”
“안 되지, 틸. 아가씨의 편지를 함부로 읽는 것이 네 일이냐?”
“죄, 죄송… 죄송합니다. 저, 저는 그저… 단지…….”
슈로터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어지러운 책상을 돌아보았다. 그는 아직 편지의 내용을 읽기 전이었다.
“어느 댁 도련님과 눈이라도 맞으셨나? 아가씨께선.”
“아, 저, 슈, 슈로터 님. 저… 저는, 저는 청소를…….”
“나가봐라. 한 번 더 이런 짓을 했다가는 쫓겨날 각오를 해야 할 거야.”
“알겠, …잘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틸이라는 이름의 하녀는 슈로터가 당장 자신을 붙들기라도 할 것처럼 허둥지둥 방을 뛰쳐나갔다. 하녀의 부산한 몸가짐에 잠시 불쾌한 표정을 지은 슈로터는 잉크가 여기저기 번진 편지로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그의 표정이 천천히 굳었다. 그는 구겨진 채 나뒹굴던 다른 편지지를 펼쳤다. 그리고 또 하나, 그리고 또 하나를.
편지지의 내용들은 모두 엇비슷했다. 서툰 표현은 조금씩 달랐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똑같았다. 슈로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그중 한 장을 집어 주머니 깊숙한 곳에 밀어 넣었다. 루이제가 있는 정원 쪽을 쏘아보는 그의 눈빛은 송곳처럼 날카로웠다.
65장 이상한 분위기 (3)
어느 날, 로즈안나는 뜻밖에 평범하고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아르사크를 주인으로 모시게 된 이후로는 매우 드물었던 일이다. 사실, 지금의 로즈안나는 수석 시녀장과 동등한, 아니 그보다 더 높은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었으므로 이제껏 발을 동동 구르며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일이 더 드물어야 마땅한 일이기는 했다.
원래대로라면 로즈안나가 아르사크 옆에서 할 만한 일이란 그녀의 대화 상대나 좀 되어주고, 치장이 필요할 때 안목을 발휘해 장신구 따위를 추천하고, 시녀가 차를 날라 오면 찻잔을 채워주고, 그 정도가 전부였으리라.
아르사크를 만나기 전까지는 로즈안나도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일이 그 정도로 간단할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이민족의 ‘족장’이라는, 황궁에서는 이제껏 만나본 적 없던 희한한 배경의 아가씨를 후녀로 섬겨야 한다는 데에 관해서도 아무런 감정을 갖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아르사크에 대한 적의도, 호의도 없었다. 단순한 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로즈? 여기서 뭘 하고 있지?”
나무 그늘 아래의 벤치에서 한가롭게 수를 놓고 있던 로즈안나는 불현듯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역시나 테오도르가 의아한 표정을 지은 채 다가와 있었다.
“테오도르 님, 어디 외출하시는 길인가요?”
“잠시 집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겨서… 너는? 마마와 함께 있지 않다니 별일이구나.”
집에 다녀와야 한다면서, 테오도르는 마치 로즈안나와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옆에 앉았다. 로즈안나는 잠시 수틀을 만지작거리다 바늘을 쥔 손을 좀 더 빠르게 놀렸다.
“폐하께서 와 계셔서요. 아르사크 님이 잠시 쉬었다 와도 좋다고 하셔서 한가롭게 수를 놓고 있던 중입니다.”
“수놓는 것을 쉬는 것이라 보긴 어려울 것 같다만.”
“그야 그러시겠지요. 테오도르 님은 수를 놓아본 적이 없으실 테니. 꽤 기분 전환이 된답니다.”
그러나 일생 바늘을 잡아본 일이라곤 단 한 번도 없는 테오도르로서는 로즈안나의 말을 이해는 하되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테오도르가 무슨 생각을 하거나 말거나, 로즈안나는 앵두 빛 입술을 조그맣게 움츠리면서 수를 놓는 일에 집중했다.
연녹색 줄기가 한 가닥, 그 위로 마치 분수대에서 뿜어 올린 물줄기처럼 여러 갈래로 갈라진 더 가느다란 줄기 끄트머리에 고깔모자를 뒤집은 듯한 노란 꽃들이 오종종하게 매달린 모양이었다. 벌써 하나의 꽃줄기는 완성되었고, 로즈안나는 두 번째 꽃줄기를 수놓고 있는 중이었다.
“이건 무슨 꽃이지? 처음 보는 것 같아.”
테오도르가 말했다. 그러나 로즈안나는 진심이냐는 듯이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가, 이내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기억이 안 나시나요?”
“기억? 글쎄… 본 적 없는 꽃인 것 같은데.”
“제 자수 솜씨가 형편없는 모양입니다. 옥슬립 꽃이에요. 이렇게 말씀드리면 기억이 나실까요?”
잠시 대답이 없던 테오도르가 갑자기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왠지 귓가가 빨개진 채 변명하듯이 허둥거렸다.
“아니, 로즈. 네 자수 솜씨가 나쁜 게 아니야. 내가 기억력이 좋지 않았던 거지.”
“테오도르 님의 기억력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보다는 저의 자수 솜씨가 좋지 않다는 말이 훨씬 신빙성 있지요. 무리도 아니에요. 저도 직접 수를 놓아본 건 꽤 오래전의 일이었으니까요.”
수를 놓아본 게 오래전이라는, 그것만은 납득할 만한 말이었다. 실제로 테오도르도 아주 오랫동안 로즈안나가 수틀을 들고 있는 장면을 보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최근 로즈안나를 떠올려본다면 한가로이 수나 놓고 있을 형편이 아니라는 것도 금방 알 수 있었다.
“바빴으니까 어쩔 수 없지.”
“맞아요, 돌이켜 보면 정말 바빴죠. 그렇게 절 바쁘게 만들어주신 데에 대해서는 테오도르 님께도 감사하고 있어요.”
어디로 들어도 농담이었지만 정곡을 찔렀다. 아르사크를 모시기 위한 인물로 로즈안나를 추천한 것이 테오도르였기 때문이다. 그는 조금 전과 비슷하게 얼굴을 붉히며 목덜미를 문질렀다.
“너보다 적격인 사람은 없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한 일이다. 네 능력, 네 인내심… 모든 것을 따져봤을 때 내릴 수 있는 최고의 결론이었어.”
“그러니까 감사드린다는 거예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이 살던 저를 그렇게 기억해 주시고, 또 높이 평가해 주셔서. 비록 이 꽃은 잊어버리셨지만요. 테오도르 님이 그토록 자주 꺾어 오신 꽃인데.”
로즈안나가 말했다. 테오도르는 그 말에 대답은 없이 묵묵히 천 위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미완성인 데다 빼어나게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는 솜씨였지만, 병아리 잔등처럼 보송보송한 노란색을 보고 있자니 잊고 있었던 기억이 바로 어제의 일처럼 되살아나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