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결례를 너그러이 용서해 주시니 감사하나이다. 예, 마마. 저는 확실한 보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질적인 증표는 필요치 않습니다. 마마께서 흔들리시는 일이 없을 거라는 약속을 하신다면 저는 돌아보지 않고 마마의 배에 올라 누구도 마마를 여정을 침해할 수 없도록 힘을 보탤 것입니다.”
“물질적인 증표가 왜 필요하지 않지요? 나의 무엇을 믿고요?”
“송구한 말씀이옵니다만 마마 한 분만을 믿고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남을 믿지 않으니까요.”
“그렇다면, 에셴 랜크버 백작 부인. 당신은 무엇을 믿죠?”
“저는 저의 안목을 믿습니다, 마마. 저는 평범한 풍경 속에서도 단 한 가지 탁월한 것을 찾아내는 안목을 갖고 있지요. 그러니 저의 눈을 믿고, 마마께 최소한의 보증만을 부탁드리는 것입니다.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 약조하시겠습니까?”
에셴의 말은 얼핏 무례하게 느낄 수도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르사크를, 아니, 아르사크의 면모를 알아본 자신의 눈을 믿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상대방의 믿음에는 믿음으로 보답하는 것이 토르갈의 방식이다. 아르사크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지요, 에셴. 나는 어떤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배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도 힘을 다해 마마를 돕겠습니다.”
아르사크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로서는 든든한 첫 번째 지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그리고 에셴에게도 흡족한 동맹이었다.
에리히는 에셴이 아르사크를 돕는 대가로 무엇이든 한 가지, 그녀가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에리히의 성격은 괴팍하지만, 신임하는 자의 신용은 결코 깨지 않는다는 걸 에셴은 알고 있었다. 언제고 그의 힘이 필요할 때가 올 것이다. 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가치가 있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라.
“이로써 저는 마마의 측근이 되었으니, 마마께 도움이 될 만한 첫 번째 조언을 한 가지 드리고자 합니다.”
“말해봐요.”
“마마께서는 파도를 하나 넘으신 것이라고 제가 말씀을 드렸지요. 몰아치려던 폭풍이 잠시 주춤한 이때를 놓치셔서는 안 됩니다. 잠잠해진 틈을 타 폭풍이 다가오지 못할 곳까지 배를 몰아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황후 마마, 조만간 황실의 연회를 여세요. 최대한 성대하게 여시고, 마마께서 주연이 되셔야만 합니다.”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아르사크이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위기를 넘긴 것과 연회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러나 에셴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마마의 진면목을 보여주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성공적인 사냥을 위해서는, 가끔 화려한 미끼가 필요한 법이지요.”
64장 이상한 분위기 (2)
“…라고 랜크버 백작 부인이 말하더군요. 폐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질문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앞에 놓인 납작한 접시를 눈싸움이라도 하듯 노려보았다.
원래대로라면 수프를 담을 때나 쓸 법한 그 접시에는 생전 처음 보는 희고 걸쭉한 뭔가가 듬뿍 들어 있었는데, 도무지 먹을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안 드는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어떻게 생각하냐니까요?”
“열어. 그까짓 연회,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열면 되지.”
에리히가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에셴이 도대체 무슨 말로 구워삶았기에 아르사크 쪽에서 먼저 연회 같은 귀찮은 걸 열자고 하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그런 궁금증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요리 시중을 드는 시종이 볶은 견과류와 꿀, 잼, 젤리에 마멀레이드, 말린 과일을 종류별로 가져다 놓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에리히는 노려보고 있던 접시에서 눈을 떼고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그 전에 묻겠는데, 이건 대체 뭐야?”
“야우르티라는 간식이에요, 폐하.”
“그게 ‘독살 시도’라는 말은 아니겠지, 설마.”
“당신을 독살할 것 같았으면 양파 수프 같은 걸로 했겠죠. 귀찮게 이런 걸 만들었겠어요?”
“이걸 만들었다고? 누가 만들었는데?”
“제가 만들었습니다.”
“참으로 훌륭한 황후로군. 상으로 줄 테니 그대가 다 먹어도 좋아.”
아르사크는 한숨을 푹 쉬며 에리히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나무 스푼으로 꿀을 듬뿍 떠 흘려 넣고, 설탕을 많이 넣어 달콤한 크랜베리잼도 한 스푼 넣었다. 볶은 견과류와 말린 살구도 조금씩 집어넣었다.
“…뭐 하는 거지?”
“드세요. 이렇게 먹는 겁니다.”
“상한 냄새가 나.”
“발효 식품이니까요.”
“먹으면 안 될 것 같은 냄새가 난다니까.”
“아, 사내자식이 말도 많네.”
에리히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뒤에 서 있던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는 아예 기절할 뻔했으니 그 정도는 약과이긴 했다.
그러나 주변의 반응이 어떻든 아르사크는 개의치 않았다. 스푼 가득 뜬 야우르티를 에리히의 입속에 쑥 밀어 넣은 것은 순간이었다. 에리히는 순간적으로 입에 든 것을 뱉어내려 했지만 보고 있는 눈들이 너무 많았다.
독이 든 것이 아니고서야 한번 먹은 것을 남 앞에서 뱉는 것은 결코 준수한 식사 매너라 할 수 없었다. 아예 숨도 쉬지 않고 삼켜보려 했지만 그랬다가는 견과류가 목에 걸릴 것 같았다.
에리히는 결국 입속에 든 것을 우물거리며 불이 튈 것 같은 눈으로 아르사크를 노려보았다. 약간 역할 정도로 낯선 산미와 향취가 입안 가득 퍼지는가 싶더니, 이윽고 익숙한 꿀과 잼의 단맛과 견과류와 말린 살구의 맛이 산미를 천천히 중화시키며 어우러졌다.
에리히는 입맛이 까다롭고 입이 짧았지만 미각은 예민한 편이었다. 진짜로 맛이 없는 음식과 맛이 독특한 음식의 차이 정도는 충분히 구분할 수 있었다.
아르사크가 만들었다는 야우르티는 최초의 한순간은 ‘맛이 없는 음식’이었지만 곧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삼키고 나니, 꾸덕꾸덕한 치즈 덩어리를 먹었을 때처럼 입안이 약간 탑탑했지만 크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대체 뭘로 이걸 만든 거야?”
“양젖으로요.”
“대체 유목민들은 양젖을 얼마나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군. 그냥 마시는 걸로는 모자랐던 건가? 그래서 삭힌 양젖까지 먹는 거야?”
“글쎄요, 누가, 어쩌다 이걸 처음 만들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누군가 양젖을 짜놨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다가 발견한 음식인지도요.”
썩 구미가 당기는 설명은 아니었지만 에리히는 한 스푼을 더 먹었다. 먹다 보니 시큼한 맛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버터나 치즈에서는 느끼기 힘든 독특한 풍미가 있었다.
“근데 아까 뭐라고?”
부지런히 스푼을 움직이는 에리히를 바라보던 아르사크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기울였다. 간만에 보는 가증스러운—에리히의 표현에 따르면— 모습에, 에리히는 어깨를 부르르 떨면서 미간을 찡그렸다.
“‘사내자식’이 ‘말도 많네’라고 했나? 내게?”
“제가 언제 그랬지요? 기억이 안 나는군요.”
에리히는 약이 올라 견딜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남은 야우르티를 모조리 먹었다.
깨끗이 비운 접시를 보면서 아르사크는 놀리는 듯한 뿌듯한 미소를 지었고, 에리히는 그것을 모른 척했다.
“연회를 연다면 옷을 준비해야겠군.”
“이전에 만든 드레스들이 거의 다 준비되었어요. 가봉을 마쳤으니 제작을 마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그럼 새 드레스가 도착하는 날에 맞춰서 열도록 하지.”
귀족가는 물론이거니와 황실에도 큰 명분 없이 만찬 연회를 여는 정도는 매일이라도 할 수 있었다. 사실, 검소했던 선대 황제만 하더라도 열흘에 두세 번 정도는 연회를 열었다.
황실의 만찬 연회란 단순히 웃고 떠들고, 사치스럽게 즐기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누가 연회에 참가하는지, 누가 참가하지 않는지, 참가한 귀족들의 태도는 어떤지, 어떤 주제의 대화가 오가는지…….
말하자면 황궁을 비우기 힘든 황제나 황후가, 측근을 움직이는 수고를 들이지 않고 바깥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살필 수 있는 자리인 것이다. 정식 회의가 아니니만큼 대개 가벼운 사담이 주를 이루었지만, 정치적인 논쟁이나 논의도 충분히 오갈 수 있었다.
에리히는 역대 황제들에 비하면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연회를 여는 빈도가 적었다. 애초에 극소수를 제외하고서는 귀족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겠다고 결심한 탓이다.
그러나 사교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법인데, 에리히는 그마저도 귀찮게 여겼던 데다가 타고난 성격 자체가 북적거리는 자리와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연회나 만찬을 주관하는 것은 대개 황후의 소관이었으므로, 사람들은 에리히가 황후를 맞아들이고 나면 황실 연회도 보다 자주 열릴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것도 틀린 예상이 되고 말았다. 아르사크는 에리히보다도 더 그런 일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회를 여는 건 그렇다 치고…….”
다소 연극적인 태도로 턱을 괴며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준비는 잘할 수 있겠나?”
“준비요?”
무슨 말인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에리히는 이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픽 웃었다.
“황실의 만찬 연회는 보통 황후가 준비하는 것이 보통이야. 모든 것을 다 살필 필요는 없지만, 그날 메인으로 낼 요리라든가, 연회의 성격에 맞춰 전체적인 장식의 틀을 지시하고, 혹시 독특한 종류의 무도회가 좋다면 그것도 정하고.”
“독특한 종류의 무도회요?”
“내 어머니는 한 번도 하지 않으신 일이지만, 듣기로는 15대 황제의 두 번째 황후가 평민들의 문화를 동경했다더군. 그래서 평민들이 즐기는 가면무도회 같은 것을 자주 열었다고 해.”
아르사크는 가면무도회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으므로 그런 말에는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연회를 준비하는 데에 있어 황후가 직접 나서야 한다는 말에 일단 골치부터 아팠다.
“연회를 얼마나 잘 주최하는가도 귀족들이 황후의 안목을 평가하는 요인이 되지. 기대하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