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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86화 (86/191)

86화

빈민가에서 카셀을 만나고 돌아온 이후, 루이제는 몇 날 며칠을 넋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지냈다. 이따금 하녀가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대답하고, 사소한 짜증을 부리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루이제가 어디 아픈 것은 아닌가 걱정했다. 그러나 의사를 불러오겠다는 말만 꺼내면 루이제가 무섭게 화를 내는 통에 눈치만 볼 수밖에 없는 불편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쯤 되니 하인들은 차라리 걸핏하면 신경질을 내고 제멋대로 패악을 부리던 이전의 루이제가 그립다고 생각하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아버님이야…….’

방으로 돌아간 루이제는 문에 등을 기댄 채 떨리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는 모든 것이 분명했다. 아르사크에 대한 소문을 퍼뜨리고, 온 수도를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은 자신의 아버지, 홀드빅 자작이었다.

카셀이 ‘나무 냄새 같은 향수’라는 말을 했을 때, 루이제의 머릿속에는 단 한 사람의 얼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바로 아버지의 측근인 슈로터였다.

그는 ‘녹나무의 신’이라는 이름의 독특한 향수를 언제나 들이붓듯이 많이 뿌리고 다녔다. 사람에 따라서는 짙은 나무 냄새라 좋아할 수도 있지만 루이제는 그 향이 무척 싫었다.

분명 나뭇결에서 나는 냄새와 흡사했지만, 풍족하고 광활한 자연이나 껍질에서부터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숲을 연상시키는 냄새는 아니었다. 그건 굳이 말하자면 나무로 만든 관에서 느껴질 법한 냄새였다. 이미 죽어버린 나무, 그리고 죽은 자를 데리고 가는 나무.

루이제는 나무로 만든 관에서 어떤 냄새가 나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루이제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이었다. 어머니를 땅에 묻지 말라고 울면서 관에 매달렸던 순간, 반들반들하게 윤이 나는 그 나뭇결에서 풍기던 스산한 냄새와 ‘녹나무의 신’의 냄새는 거의 똑같았다.

‘아버님이 그러신 거야. 틀림없어. 슈로터가… 샬롯에게 소문을 퍼뜨리라고 한 거야.’

그렇다면 샬롯의 고향 같은 건 이제 찾을 필요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루이제는 정치나 암투에 익숙하지 않았고 큰 관심도 없었지만, 슈로터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인간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일을 허투루 하는 법이 없었고, 후환이 될 만한 것을 남기는 성격이 아니었다. 샬롯이라는 하녀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체는 어딘가 모르는 곳에 버려졌으리라.

만약 자신이 이 사실을 안다는 걸 슈로터에게 들킨다면?

오싹한 한기가 들었다. 루이제는 얼른 촛대를 내려놓고 침대로 가 앉았다.

슈로터는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인 홀드빅 자작도 물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이제는 불안했다.

‘아르사크가 없어지면 내가 황후가 된다.’는 루이제의 기대는, 어찌 보면 철부지 꼬마의 현실성 없는 기대나 마찬가지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녀는 이기적인 응석받이였지만, 악랄한 인간은 아니었다. 아르사크가 더 이상 황후가 아니게 되는 과정에서 모함으로 인한 불명예나 암투, 죽음 같은 단어가 끼어들 것이라는 예상은 해보지 않았던 것이다.

루이제는 단지 그런 일들이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일어나리라 믿고 있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여름이 오면 비가 내리듯이, 가을이 되면 단풍이 들고 겨울에는 나무가 옷을 벗듯이. 소원을 빌기만 하면 이루어진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순진한 어린애처럼 생각했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꿈은 아주 작은 균열로도 쉽사리 깨지기 마련이다.

루이제는 아르사크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현실을 부정하려 애써보기도 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아버지가 나쁜 사람일 리 없다고 믿으려 했다.

누구보다 아르사크를 무시했던 자신이 아니었던가. 그때와 다름없이 아르사크는 지금도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 그런 여자라면 그럴 수 있어. 예절도 수치심도 모를 것 같으니까. 짐승처럼…….

아니, 정말 그런가?

내가 본 아르사크가, 황후가, 정말로 그런 사람이었나?

답은 간단하게 내려졌다. 그러나 루이제 자신의 문제는 그리 간단히 풀리지 않았다.

루이제에게는 의무가 있었다. 명령을 받은 대로 아르사크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의무다. 그러나 그 의무에 충실했다가는 이번에야말로 가문은 끝장이 난다.

아르사크가 약간의 자비를 베푼다면 루이제 자신의 목숨만은 살려줄 수도 있었지만, 루이제는 그런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아버지를 사랑했다.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이었다.

“어떡해? 난 어떡해야 하는 거야…….”

루이제는 조그맣게 우는 소리를 내며 무릎에 이마를 파묻었다. 몇 번 훌쩍거리긴 했지만 눈물은 별로 흐르지 않았다.

고개를 든 루이제는 머리가 헝클어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이를 펼쳤다. 그리고 무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듀터스가 아르사크를 공식적으로 지지한다는 소문이 퍼진 후, 귀족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움직임이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운트겔 장군과 랜크버 백작가가 황후를 지지한다는 성명을 낸 일이었다.

운트겔 장군은 그 이름만으로도 귀족들을 술렁이게 하기에 충분했고, 정치나 사교계의 문제에는 관심도 없던 랜크버 백작이 나선 것이 또한 의외였다.

운트겔 장군의 장녀인 에실리스 랜크버가 현재 랜크버 백작 부인의 자리에 있었으니 당연하다는 의견도 있긴 했다. 그러나 몇몇 사람들은 에셴이 고작 아버지의 뜻에 따라 정치에 끼었다가 빠졌다가 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운트겔 장군의 지지 성명이 황실에 대한 충성심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랜크버 백작의 지지 성명은 백작 본인이라기보다 에셴의 의견일 가능성이 높았다.

에셴은 아버지처럼 황실에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자가 아니다. 조용하긴 해도 위세를 무시할 수 없는 그녀가 본격적으로 정치권의 세력 싸움에 뛰어든다면, 지금까지의 판도가 크게 달라지리라는 분석이 조심스럽게 제기되었다.

귀족들 사이의 분석이 어쨌건, 지지 성명을 계기로 에셴은 드디어 아르사크를 독대하여 만났다.

두 사람은 첫눈에 서로가 마음에 들었다. 에셴은 아르사크가 가진 뛰어난 면모들을 발견했고, 아르사크는 에셴의 솔직한 말재간과 담대함에 감탄했다. 여태껏 귀족 부인들에게 가졌던 편견이 약간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토르갈의 요리법은 참 재미있군요. 저도 언젠가 한번 시도하고 싶습니다.”

“원한다면 요리법 몇 가지를 가르쳐 줄게요, 에셴.”

“감사합니다, 마마. 남편이 좋아할 것 같군요.”

에셴은 토르갈의 이색적인 문화에 순수한 호기심을 보였다. 남편인 랜크버 백작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녀도 지적인 흥미가 대단히 높았기 때문에, 새롭고 재미있는 이야기라면 몇 시간이고 들을 용의가 있었다.

차를 세 잔째 비울 동안, 에셴은 토르갈의 독특한 음식들과 유목민들이 겨울을 나는 법, 가축을 치는 법, 유르트를 세우는 법, 가죽에 자수를 놓는 법 따위를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경청했다.

“양젖을 발효시켜 만든다는 그 음식은 저도 꼭 먹어보고 싶네요. 맛이 아주 독특할 것 같습니다.”

“톡 쏘는 산미가 일품이죠. 우리들은 거기에 꿀이나 과일즙을 섞어 달콤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볶은 견과류나 말린 과일을 곁들여 먹기도 했어요.”

“그 음식의 이름이 뭐라고 하셨지요?”

“야우르티라고 해요. 제국에도 비슷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우유를 이용해 버터나 치즈를 만들긴 하지만 마마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음식은 없습니다. 제가 알기로는요.”

“그럼 내가 만들어볼 테니 시식을 해볼래요?”

아르사크가 장난스럽게 눈을 반짝였다. 에셴은 약간 놀란 표정이긴 했으나 곧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마께서 친히 만들어 주신 것인데, 당연히 기쁜 마음으로 응해야지요.”

아르사크는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했더니 갑자기 야우르티가 못 견디게 먹고 싶기도 했다.

“하온데 마마.”

소녀처럼 생기발랄하던 에셴의 목소리가 갑자기 차분해진다. 아르사크는 그녀가 뭔가 중요한 말을 하리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마찬가지로 침착해진 태도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마마께서는 바다를 보신 일이 있으십니까?”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르사크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없어요. 하지만 바다가 어떤 곳인지는 들어서 알고 있죠. 끝도 없이 파란 물이 펼쳐져 있다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바다에선 쉴 새 없이 파도가 치지요. 파도는 높을 때도 있고, 낮을 때도 있습니다. 어떤 때는 산처럼 높은 파도가 칠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아기의 숨결처럼 잔잔한 파도가 칠 때도 있습니다. 배가 목적지에 닿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크든 작든 무조건 그 파도를 넘어야만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배는 중간에 침몰하고 말지요.”

아르사크는 조용히 에셴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잠시 말을 고르듯 숨을 내쉰 에셴은 아르사크의 담담한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마마께서는 배입니다. 그리고 이제 막 한 개의 파도를 넘으셨습니다.”

“그 말은 앞으로도 계속 파도를 넘어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에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다행히 마마께서는 총명함과 용기, 행동력과 순발력을 갖추신 분입니다. 그것은 뱃사람들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조건이기도 하지요. 마마께서 바라시는 목적지가 어디든, 그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바다는 끊임없이 마마를 시험하고 또 시험할 것입니다. 끊임없는 파도와, 때로는 비바람과 폭풍도 동원하겠지요. 마마께서는 각오가 되셨습니까? 앞으로 이보다 더 큰 파도가 닥친다 하더라도 결코 중도에 침몰하지 않겠다고 제게 약속하실 수 있겠습니까?”

“당신에게 나의 약속이 필요한가요?”

“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침몰할 배에는 결코 오르지 않는 사람이니까요. 저는 명성 높은 운트겔 장군의 장녀이지만, 저의 아버님처럼 맹목적으로 충성을 바치는 신하는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불충이라는 죄를 뒤집어쓰고도 남을 발언이다. 그러나 에셴은 아르사크가 이러한 말에 일일이 트집을 잡아 걸고넘어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

잠시 말없이 에셴을 바라보던 아르사크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몹시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에셴, 그대는 과연 솔직하네요. 나는 솔직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아요. 내게 보증을 원한다는 말이지요? 나를 지지해도 결코 그대가 손해 볼 일 없을 거라는 보증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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