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당황한 얼굴들이 서로를 마주 보며 대답을 구했지만 애초에 없는 것이 튀어나올 리 없었다.
사실 근거 같은 것은 필요하지도 않았다. 책봉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황후가 외간 남자와 함께 추문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폐위를 요구할 이유는 충분했다. 때에 따라서는 추방되거나, 평생 탑 안에 감금되어 살게 될 수도 있었다.
이 시점에 아르사크가 폐위된다면, 아무리 처벌이 후하다고 해도 추방은 면할 수 없다. 그리고 추방을 당하는 순간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달려들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에리히도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버텨야 했다. 누군가 아르사크의 목숨을 노린다면, 꼭 그래야만 한다면 그건 차라리 자신이어야 했다. 다른 놈의 손에 내맡길 일은 결코 없었다.
“아무래도 그대들의 말 역시 근거가 없는 모양이군.”
“폐하,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소문은 근거가 없다 하나, 그간 황후에게 자질이 부족했다는 것은 누구나……!”
“무슨 짓을 저질렀든 황후는 아직 황후다. 지금부터 예의를 갖춰 호칭하지 않으면 그게 누구든 아교로 입을 봉하고 탑에 처넣을 것이다.”
말을 꺼냈던 로덴 남작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속이 덜컹 내려앉을 만큼 험악한 협박이었다.
그때 접견실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별안간 벌어진 일에 고개를 돌렸던 귀족들은 누구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모조리 경악한 얼굴로 입을 딱 벌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두 명이었다. 한 명은 당사자인 황후, 아르사크였고 또 다른 한 사람은 최고 신관인 듀터스였다.
아르사크의 등장은 그나마 그들의 상식에서 이해할 수 있을 법한 일이었으나 듀터스는 아니었다. 기온 백작은 너무 놀라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그들이 에리히에게 설명을 요구하기도 전에, 에리히는 느긋한 태도로 의자에 등을 붙이면서 말했다.
“늦었군.”
“에레벤나의 은총을 받으시고 모든 법과 군중 위에 군림하시는 황제 폐하께 인사를 드리나이다. 늙은이의 걸음이 느려 결례를 범했습니다.”
“부디 걸음만 느렸던 것이길 바라오.”
듀터스는 에리히의 빈정대는 소리쯤이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고고한 태도가 거슬리기는 했지만 오늘은 그에게 시비를 걸어 좋을 것이 없었으므로 에리히 역시 듀터스의 딱딱한 눈빛을 못 본 척 눈감아 주었다.
“폐하, 이건 대체……! 최고 신관이 어찌 이 자리에 왔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신관들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는 것이 제국의 법입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귀족들이 한꺼번에 웅성거리듯 불만을 터뜨렸다.
그러나 에리히는 소란 속에서도 차분한 태도로 듀터스를 바라보았다. 귀족들의 입을 다물게 한 것은 에리히가 아닌 듀터스였다.
“오늘 제가 이 자리에 온 것은 정치에 관여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저는 단지 에레벤나 님을 모시는 신관으로서, 제국을 수호하고 축복하는 에레벤나 신의 뜻을 상기시켜 드리고자 참석하였습니다.”
“에레벤나 신의 뜻이라니,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황후 마마께서는 에레벤나의 축복을 받으시어 그분의 뜻대로 선택된 분입니다. 에레벤나의 빛이 황후 마마를 선택하신 이상, 세속적인 소문이나 규율로 황후 마마를 재단할 수 없음을 신관 일동은 감히 알리나이다.”
신관 일동이라면 듀터스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듀터스 이하의 모든 신관들이 아르사크의 폐위를 막고자 나선 것이 분명했다.
귀족들로서는 어리둥절하다 못해 억울하게까지 느껴질 일이었다. 신관들의 엄격한 기준이 아니더라도, 에레벤나 신앙이 없는 땅에서 온 아르사크는 이교도였다. 그런데 최고 신관인 듀터스가 그녀를 감싸기 위해 나서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신관의 의무를 모르시오? 신관은 언제, 어느 때라도 신앙을 지키며 제국의 모든 일이 공정하고 신성하게 이루어지도록 이끄는 존재인데, 어째서 저런……!”
‘저런 여자’라는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입을 다물어 다행이었다. 로덴 남작은 허옇게 질린 얼굴로 입을 막으며 필사적으로 에리히의 시선을 피했다.
다른 귀족들은 로덴 남작만큼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미가 아니었다. 그리고 기온 백작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 중 누구보다도 에레벤나에 대한 신앙이 두터운 자였다. 그런 그가 최고 신관의 말에 정면으로 반박을 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설마 폐하께서는 그런 것까지 노리고…….’
패배한 장수처럼 침통하게 입술을 떨던 기온 백작이 문득 그런 생각을 했을 무렵, 에리히의 한쪽 손이 소리도 없이 들렸다.
“그대들 모두 최고 신관의 말을 이해했으리라 믿는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에리히는 느리고 고상한 동작으로 손을 내리고, 천천히 자세를 바꾸어 몸을 일으켰다.
“황후를 음해하는 헛소문에 대해서는 그 출처를 철저히 조사하고 있음을 알린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주범을 밝혀내어 혼란을 종식시킬 것이니 그대들 각자의 입을 조심하고 그만 물러가도록 하라.”
그리고 에리히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황제가 일어난 이상 그를 붙들고 늘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기온 백작은 여전히 침울하게 어두워진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고, 그 뒤를 따라 다른 귀족들도 각자 떨떠름하거나 입맛이 영 더럽다는 표정으로 일어나 황제를 배웅했다.
듀터스도 에리히를 뒤따라 나갔다. 이윽고 접견실에는 귀족들과 아르사크만이 남았다. 그들은 아르사크가 에리히를 뒤쫓아 나가지 않는 이유가 궁금했지만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폐하께서 충분히 경고를 하셨으리라 믿지만, 당사자이니만큼 나도 그대들에게 한마디 하겠소.”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던 이들의 표정에 의아함과 당혹스러움이 번갈아 드러났다.
개중에는 아르사크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황후가 된 이후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나타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르사크가 이렇게 많은 수의 귀족을 마주하고 정식으로 발언하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 아무도 미래를 아는 자는 없었다.
아르사크는 황후의 예장을 올바르게 갖추어 평소와는 달리 엄숙해 보였다. 이국적인 외모 너머로 반짝이는 눈동자는 사람이라기보다 매서운 짐승, 창공을 날며 사냥감을 노리는 매나 숲속에 도사린 호랑이의 그것 같았다.
몇몇이 긴장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르사크는 부쩍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대들의 말처럼 나는 제국의 예법을 배우며 자라지 못한 이방인이오. 그러나 그대들 역시 내가 나고 자란 땅의 예법과 규칙은 모르겠지. 그러니 한 가지만 가르쳐 주겠소. 토르갈은 불명예를 용납하지 않고, 걸어 오는 싸움에서 도망치지 않으며, 비열한 방법으로 남을 해치는 자를 결코 용서치 않는다오.”
그 말을 끝으로, 아르사크는 에리히와 듀터스보다 한발 늦게 접견실을 나갔다.
그녀를 탄핵하기 위해 기세 좋게 몰려들었던 귀족들은 뭔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불안감에 허둥지둥 서둘렀다. 일이 쉽게 풀리지 않을 것이며, 자신들이 밟아서는 안 되는 금을 밟고 말았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63장 이상한 분위기 (1)
최고 신관인 듀터스를 위시한 황실의 신관들이 아르사크를 지지하고 나섰다는 소문은 에리히의 기대보다 더 빨리 퍼졌다.
속도로 봐서는 아르사크와 클루이트의 난데없는 염문보다 더 빠른 듯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다가도 이를 갈며 일어날 만큼 충격적인 소식이기도 했다.
그만큼 충격을 받은 이들 중에는 물론 홀드빅 자작도 있었다. 그는 기온 백작과 열네 명의 중앙 귀족이 에리히를 알현하러 갈 때 장녀가 사는 톤라크로 떠남으로써 용의자로 주목받는 일을 피하고자 했다. 당장의 의심에서는 벗어나되,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황후를 폐위하라며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면 그 선두에 설 작정이었다.
어쩌면 뜻대로 되었을 것이다. 유일한 증인인 킨달은 죽었으니, 나머지를 아무리 들쑤시고 다녀봐야 에리히 쪽은 확실한 증거를 잡을 수 없었으리라.
듀터스가 아르사크를 지지하고 나서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 없었다. 만약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었다면 홀드빅 쪽에서 먼저 무언가 수를 썼을 것이다.
최고 신관의 자리에 있는 듀터스는 이전에 그 자리에 있던 탐욕스러운 인간과는 달랐다. 도통 말귀라고는 통하지 않는, 그야말로 벽창호였던 것이다.
그런 자가 황실의 낯을 땅바닥에 떨어트린 그런 여자를 두둔하고 나설 줄이야. 홀드빅은 그 생각만 하면 십 년 전에 먹은 푸딩이 얹힐 지경이었다.
“빌어먹을……! 폐후까지 이미 다 된 일이었는데, 신관 놈들 따위가 감히!”
밤이 늦은 시간이었지만 홀드빅 자작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테라스를 서성거렸다. 거의 다 된 일이었는데, 이제 단 한 걸음을 남겨두고 안심한 순간 갑자기 목적지가 뒤로 쑥 물러나는 걸 봤을 때처럼 황당하고 억울했다.
“아버님?”
분노로 눈앞이 하얗게 될 지경인 홀드빅은 루이제가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와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팔을 휘두르며 몸을 돌린 그는 루이제의 약한 비명을 듣고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흠… 루이제. 이 시간에 안 자고 왜 밖엘 나왔느냐.”
하마터면 막내딸의 따귀를 칠 뻔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평소의 홀드빅 자작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평상심을 잃고 있었다.
나이트가운을 걸친 채 촛대를 들고, 반짝이는 금발을 풀어 내린 루이제는 고요한 밤의 공기 속을 돌아다니던 요정이 장난삼아 인간의 모습을 한 것처럼 예뻤다.
그러나 오늘은 그토록 칭찬하던 딸의 미모도 짜증을 돋우는 요소에 지나지 않았다.
‘이토록 아리따운데, 이토록 흠잡을 데가 없는데, 어째서 이 아이가 황후가 되지 못했지. 망할 에레벤나 따위가 다 뭐란 말이야?’
“저, 잠이 안 와서… 바람이나 쐴까 하고…….”
촛대 위의 불빛이 가늘게 떨렸다. 아니, 루이제가 떨고 있었다. 평소처럼 응석을 부리고 제멋대로 투정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러나 홀드빅 자작은 자신만의 생각과 울분에 사로잡혀 딸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밤중에는 일찍 자야 한다. 그래야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지.”
“알아요, 아버님. 저…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갈게요.”
“음, 그래.”
자작은 루이제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리고 말했다.
아버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이제는 조그만 입술을 꾹 다물면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