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기온 백작의 서명이 찍힌 편지가 에리히 앞으로 날아들었을 바로 그 당시만 하더라도, 테오도르는 정말로 에리히가 귀족들의 요구를 수락할지, 그러지 않을지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는 상태였다.
연회나 만찬 초청에 좀처럼 응하는 법이 없는 에셴이 요 며칠 내내 수도의 내로라하는 귀족가를 빠짐없이 돌아본 결과, 아르사크를 둘러싼 추문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났다는 것은 테오도르도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아르사크를 탐탁잖게 여기는 이들이 언제라도 황후의 행실을 구실로 삼아 끌어내리려 할지 알 수 없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패가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손에는 아직 없었다. 민감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에리히가 기온 백작과 그 이하 귀족들의 알현을 물리친다고 해도 별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전쟁이나 내란 등의 다급한 사안이 아니면 몸이 아프다는 핑계 정도로도 얼마든지 귀족들의 발을 묶어둘 수 있었다.
그러지 않은 것은, 아르사크를 결코 이보다 위험한 상황까지 내몰지 않겠다는 에리히의 의지라고 할 수 있었다. 그들이 감히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다.
“폐하, 기온 백작과 열네 가문의 가주들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여보내라.”
문이 열리자 에리히는 비스듬히 앉아 있던 자세를 소리도 없이 바꾸었다. 조금 전까지 투덜거리는 꼬마 같았던 그의 표정이 한순간에 타협도, 자비도 없는 냉정한 얼굴로 변한 것을 보고 있던 테오도르 역시 슬그머니 띠었던 미소를 감추며 딱딱한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귀족들은 저마다 에리히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 원래대로라면 작위 고하의 순서대로, 또는 연장자부터 차례로 한 사람씩 황실의 문장이 찍힌 반지에 입을 맞춰야 했지만 눈치를 봐서 적당히 생략되었다. 그만큼 에리히의 분위기가 살기등등했기 때문이다.
보수적이고 예의에 엄숙한 기온 백작조차도 감히 에리히에게 인사를 받으라 잔소리를 하지 못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침잠들이 없군.”
침묵을 깨고 에리히가 처음 내뱉은 말은 그렇지 않아도 가라앉은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각 가문의 문양이 찍힌 마차의 문을 열고 기세등등하게 내렸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길쭉한 접견용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열다섯 명의 표정은 꽤 궁상스러웠다.
그나마 기온 백작 한 사람만은 이 일이 황실의 명예를 위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아, 그들 중 가장 당당한 기색을 애써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식사도 하지 못하도록 새벽같이 나를 불러낸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누가 대표로 입을 열 텐가? 기온 백작인가?”
이 자리에서 에리히가 아침 식사를 멀쩡히 마쳤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테오도르밖에 없었다. 아예 점심 식사까지 하고 나가겠다는 것을 말린 것이 테오도르였으니까.
에리히가 본격적으로 빈정거리기 시작하자 귀족들은 입술이 붙어버리기도 한 양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황제가 알현을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사실 정도야 각오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의 싸늘한 반응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기온 백작을 제외한 열네 명의 가주들 중에는 홀드빅 자작의 세력에 의탁한 자들이 네댓 명은 되었다. 홀드빅은 그들에게만 몰래, 에리히가 언젠가는 아르사크를 폐후로 만들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을 귀띔해 주었던 것이다.
홀드빅 자작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었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러나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을 감지하고 나니 그게 얼마나 믿을 만한 정보인가를 한 번쯤 고민했어야 한다는 엉뚱한 후회가 치밀었다.
세력 싸움이 가장 치열한 자리에서 별의별 일을 다 겪은 그들에게도 에리히는 섣불리 맞서기 힘든 상대였다. 차라리 그가 멍청했더라면 일이 쉬웠으련만.
“저를 비롯한 여러 가문의 수장들이 폐하를 찾아뵌 이유는, 황실의 명예를 어지럽히고 무지한 백성들을 동요하게 만드는 소문 때문입니다.”
거북하던 침묵을 뚫고 드디어 기온 백작이 입을 열었다. 에리히는 그의 입가나 미간에 진 주름을 빤히 쳐다보다가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말해보시오.”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다시피…….”
“서론은 치워. 본론만 말하시오.”
말이 끊긴 기온 백작의 얼굴이 순간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모든 방면에 있어 질서와 예의, 그리고 규칙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다.
신하가 황제에게 반기를 들 수 없듯, 황제 역시 신하를 존중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을 지고의 진리처럼 받들고 따르는 늙은 백작에게 에리히의 성미는 감당하기 쉬울 리 없었다. 그러나 연륜은 연륜, 그는 당황함과 모멸감으로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금방 추스르며 다시 엄숙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재의 황후께서는 제국을 자애롭게 품고 다스릴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 생각하기 힘듭니다. 본래 황후의 자리는 모든 국민, 신분을 막론하고 제국의 어떤 이들에게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경은 본론만 말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가?”
이번에는 제아무리 기온 백작이라도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의 주름진 미간이 노기로 일그러지는 것을 보던 로덴 남작이 응원이라도 보내듯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폐하, 중앙 귀족들은 현재 황후를 둘러싼 소문을 결코 가벼이 넘길 수 없다 판단하였습니다. 그토록 부정한 짓을 저지른 인물이 앞으로도 계속 황후의 지위를 누리며 존귀하다 칭송을 받는다면 황실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황후의 폐위를 청원하고자 아침부터 황궁으로 몰려왔나?”
에리히가 한 번 더 빈정거렸지만 로덴 남작을 보며 용기라도 얻은 것인지 귀족들은 찔끔거리며 물러서지 않았다. 끄트머리에 앉아 있던 이실다 남작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 황후는 민간의 아낙이 아닙니다. 복식에서부터 예법까지, 무엇 하나 규칙을 따르지 않는 그런 자가 만인의 모범이 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황후는 카툴라에서 나고 자라지 않아 제국을 세운 선대들에 대한 존경심도 없으며, 지엄하게 받들어야 하는 역사에 대해서도 무지합니다. 그런 와중에 이러한 추문에 휘말린 것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입니다.”
“자고로 황후란 올바른 교육을 받아 흠결이 없는…….”
“올바른 교육을 받아 흠결이 없다는 그 처녀가 대체 누군지 데려와 보라.”
기세 좋게 높아져 가던 목소리들이 뚝 멎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얼음장 같은 눈으로 귀족들의 면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실다.”
갑작스레 이름이 불리자 이실다 남작은 움찔 놀라 어깨를 들썩였다. 성마르게 움푹한 뺨이 긴장으로 떨리는가 싶더니 이내 네, 하는 짧은 대답이 눈치라도 보듯 흘러나왔다.
“그대는 지난번 예식에서 분명 볼핀 후작의 딸을 지지했었지. 그대에게 묻겠다. 힐데트로스 키클란 볼핀, 그녀는 올바른 교육을 받아 흠결이 없는 완벽한 처녀여서 그대가 지지한 것인가?”
추방되고 난 후 귀족들 사이에서 더는 이름이 오르내리지 않던 볼핀이다. 심지어 에리히의 변덕으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엄연히 죄를 지은 죄인이었다.
귀족들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다 이실다 남작을 보았다. 그가 나서서 힐데트로스를 황후로 추대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인 적은 물론 없었지만, 누구보다도 열렬하게 볼핀 후작을 따르던 추종자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당연히 힐데트로스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 그도 수많은 뒷공작을 했다.
이실다 남작의 안색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폐하, 그런 말씀은… 후녀의 선발은 공정하게 이루어져야 하며, 저는 단 한 번도 그녀를 공식적으로 지지하지…….”
“공정하게? 그럼 그대는 볼핀 후작이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만들기 위해 어떤 수작을 꾸미고 있었는지 전혀 몰랐다는 말이군?”
부정할 수도 긍정할 수도 없는 애매한 상황이다. 할 말이 궁해진 틈을 놓칠 에리히가 아니었다.
그를 상대하기 까다로운 이유는 변덕스럽고 차가운 성격뿐만이 아니었다. 상대가 스스로 궁지를 찾아 들어갈 때까지 애매한 자리에만 덫을 놓다가, 수세로 몰았다 싶으면 숨 쉴 틈도 없이 몰아붙이기를 잘하기 때문이었다.
“방금 내 앞에서 황후의 도리에 대해 잘도 떠들어댔는데, 모르는 사이 그대들의 둔한 머리에 누가 기름이라도 발라준 모양이군. 아니, 혓바닥인가? 내 앞에서 그대들이 이토록 영민하게 혀를 놀리는 걸 처음 보는 것 같아. 그러니 말해보라. 황후에게 황후가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면 황제의 도리도 있겠지. 그런데 나는 그대들이 만찬 테이블에서 멧새구이를 씹을 때 떠들어대는 것처럼, ‘도통 자격이라고는 없는 폭군’이라 그 도리를 잘 모르겠거든.”
신경줄 약한 몇몇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에리히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실제로 귀족들의 만찬에서 자주 오르내리곤 하는 말이었다.
물론 언제 어떤 자리에서도 황실의 일원, 특히 그 정점에 서 있는 황제에 대해 불경한 말을 지껄이는 것은 누구에게도 용납되지 않았다.
에리히가 자신을 향한 평가, 그것도 욕설에 가까운 평가들을 알면서도 여태까지 묵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가혹한 처벌보다도 더한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폐하, 근거 없는 말씀은…….”
“내가 정녕 이 자리에서, 그대들이 끊임없이 황실과 나를 모독해 왔음을 증명하길 바라는가?”
불쑥 튀어나왔던 목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리히는 여전히 마주 보는 사람을 뼛속부터 얼려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한 치의 물러섬도, 한마디의 타협도 없을 것을 직감한 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마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이렇게까지나 감싸고 나올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던 변수였다. 해봐야 본인의 자존심이 다칠 것을 우려해 시큰둥한 반응이나 하리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졸지에 꿀 먹은 벙어리 같은 꼴이 되고 말았다.
그는 이 상황이 마치 즐거운 일이라도 되는 양 입술만 희미하게 움직여 웃음을 띠었다가 말했다.
“나더러 근거 없는 말을 하지 말라고 했는데, 그럼 나도 그대들에게 묻겠다. 그대들이 말하는 그 ‘추문’에는 과연 근거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