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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83화 (83/191)

83화

“최근 수도와 황궁에 떠도는 소문을 그대도 알고 있나요?”

“황후 마마를 음해하려는 잡배들의 소행이겠지요. 저로서는 개의치 않습니다.”

“그대가 소문에 휘둘리지 않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안타깝게도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내게는 그대가 필요합니다.”

아르사크의 말에 듀터스는 약간 애매한 기색으로 찻잔을 기울였다.

침묵이 길어지자 다소 초조해진 아르사크도 속내를 감추기 위해 차를 마셨다. 코끝을 톡 쏘는 것 같은 강한 향기에 비해 차 맛은 미미하고 엷어서 거의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아마 신관들이 마시는 차여서 그런 것 같았다.

“정확히 어떤 방법으로 마마를 도와달라는 말씀이십니까?”

“내일 기온 백작이라는 자가 다른 귀족들을 이끌고 폐하를 알현하러 올 예정이에요. 소문을 빌미 삼아 나에 대한 처분을 논의하고자 하는 것이겠지요. 나를 폐위시키고 싶어 하는 귀족들은 수도에만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귀족들이 황후 마마의 폐위를 원한다고 한들 그들에게는 그럴 수 있는 힘과 권한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폐하의 의지이며, 나아가서는 에레벤나 신의 의지이지요. 황후 마마께서는 지난 백 년 이래 처음으로 에레벤나의 선택을 받으신 분입니다. 세속적인 욕망 따위가 신의 의지를 꺾으려 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르사크는 잠시 듀터스를 바라보다가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타깝게도 그대의 바람이 이루어질 것 같지는 않군요. 저들은 나를 끌어내리고 폐하의 명성에 흠집을 내기 위해 무엇이든 할 테니까요. 그대가 아무리 신을 모시며 외부의 사소한 욕망과는 단절된 삶을 살아왔더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텐데요.”

나이 든 듀터스의 잿빛 눈동자가 아르사크를 향했다. 그는 아르사크가 에레벤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관인 듀터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르사크는 엄격하게 계도해야 할 이교도였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신앙이나 출신과는 상관없이 에레벤나가 직접 그녀를 선택한 것도 역시 사실이다.

듀터스는 신을 모심에 있어 중요한 것은 마음이지 외모가 아니라고 굳게 믿었다. 뼛속까지 신관인 그는 아르사크의 내면 어딘가, 아르사크 스스로도 발견하지 못하는 에레벤나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그녀가 선택을 받은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문제는 역시 사제권과 정치권의 미묘한 알력 다툼이었다. 긍정적인 일이든 부정적인 일이든, 신관이 정치에 한번 관여하기 시작하면 그 파장은 섣불리 짐작하기 힘들었다.

이전에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신관들이 너나할 것 없이 볼핀 후작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로부터 재물과 토지를 받아 허욕을 채워나갔던 것도 사실, 지금 이 순간처럼 사소하고 별것 아닌 일에서부터 시작된 것일지 몰랐다.

사제의 타락은 곧 국가의 멸망으로 가는 길이라 믿는 듀터스가 최고 신관으로 즉위하자마자 매우 엄격하게 신관들을 관리한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두 번 다시 이전처럼 치욕스러운 역사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일념이었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듀터스가 갈등하고 있음을 쉽사리 눈치챘다. 그를 만나러 오기 전, 에리히도 그랬거니와 로즈안나조차도 듀터스는 상대하기 어려울 것이라 조언했던 것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났다. 사제란 너무 인간적이어도 문제가 되지만, 너무 융통성이 없어도 문제다.

한참이나 입을 다물고 있던 듀터스가 마침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가 뭐라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아르사크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대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지 나도 압니다.”

“황후 마마, 그 일은…….”

“나를 도움으로써 신관들이 또다시 귀족들과 결탁하여 자신의 본분을 잊어버리는 사태가 올까 걱정하는 것이겠죠?”

듀터스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신관들은 누구보다 결백한 사람들이어야만 합니다. 세속적인 욕망과 얽힐 수 있을 만한 가능성은 모두 다 차단해야 합니다.”

“그대의 말이 맞아요. 하지만 생각을 좀 달리해 보죠. 그대는 세속적인 욕망이라고 말했지만, 그 세속적인 욕망을 가진 자들이 지금 이 사태를 만든 게 아닌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대들의 신을 신실하게 믿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식의 날에 신을 가장 가까이 만났던 것은 나였습니다.”

거기에는 듀터스도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에레벤나의 빛은 그 이후 어떤 사람의 앞에도 다시 보인 일이 없었다.

어쩌면 앞으로도 없을지 모른다. 지금처럼 사람들의 믿음이 약해진 때에, 옛날과 같은 신의 축복을 바라는 것은 차라리 염치가 없는 짓이라고 듀터스는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기준에서는 이교도인 아르사크를 황후로 인정할 수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대가 나섬으로써 보호할 대상은 황후인 내가 아니라 에레벤나 신이죠. 에레벤나의 선택을 받은 내가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폐후가 되면 앞으로 누가 신관에게 기도를 올릴까요? 그런 사람을 황후로 선택한 신을 믿을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아르사크의 눈빛은 마치 전쟁에 나가는 장군이라도 되는 것처럼 결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이 들고 고지식한 듀터스는 이상하게도 그 호전적인 눈빛에 이끌렸다. 마치 아르사크가 에레벤나의 현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착각 아닌 착각을 하고 있었다.

아르사크의 어조가 그만큼 확신에 차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 ‘보호할 대상은 황후가 아니라 에레벤나 신이다.’라는 그 말이 듀터스의 발목을 잡았다.

“황후 마마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은 잘 알겠습니다.”

“이해만 하는 것으로는 안 돼요. 나는 대답을 들으러 왔으니까.”

듀터스 역시 아르사크와 비슷하게 시선이 빛났다. 그는 상대방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묵묵히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겼던 듀터스는 미지근해진 찻잔을 비우고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신관들을 소집하여 황후 마마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소문이 거짓이라는 그대의 믿음 또한 확실한 것인가요? 그대도 의심하고자 한다면, 나 역시 아니라는 증거를 더 찾아야 할 테니까.”

“저는 애당초 소문에 귀를 기울인 적조차 없습니다, 마마.”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듀터스는 아르사크가 소문처럼 부정한 일을 저질렀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것 역시 그의 뿌리 깊은 신앙에서 비롯된 믿음이었다.

에레벤나는 결코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는다. 설령 아르사크가 실제로 부정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에레벤나가 그녀를 선택한 이상 무언가 다른 뜻이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아르사크는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띠었다. 신관을 개입시키는 일이 껄끄러운 것은 에리히 뿐만 아니라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어쩌면 이번 일이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62장 모략 (5)

기온 백작을 위시한 귀족들은 날이 밝자마자 황궁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에리히는 오늘 아침 눈을 뜨면서부터 대단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시중을 들던 시종들이 눈치만 보며 안절부절못하다 단체로 급성 위장병에 걸릴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 테오도르만은 허둥거리는 시종들을 조용하고 침착하게 다스리며 아침나절 동안 해야 할 일들을 하나씩 해나갔다.

평소에는 항상 에리히의 옆이나 뒤에서 입을 다물고 있어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이럴 때만큼은 테오도르의 존재가 무엇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시종들이었다.

황제가 귀족을 먼저 부르든, 아니면 귀족이 황제에게 먼저 청하든, 그 자리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갈 예정이건 간에 황제를 알현하는 데에는 일정한 순서가 있었다.

수석 기사의 감시하에 병사들이 몸을 수색하고, 확실히 본인이 참석한 것이 맞는지를 대면하여 확인하고, 그런 다음 이미 서면으로 전달한 용건을 다시 한번 구두로 정확하게 입증해야만 그제야 비로소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면 뒤의 두 가지는 생략되곤 했지만 몸수색만큼은 생략할 수 없었다. 황제의 자리란 그만큼 암살의 위험에 자주 노출된다는 말이기도 했다.

수많은 귀족들이, 그리고 가끔은 황제조차도 불필요할 만큼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 이 지루한 과정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곤 했지만 결국 여태까지 법이 바뀌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늘, 카툴라의 19대 황제 에리히 클로츠가 그 복잡다단한 절차를 마침내 뒤엎으려는 참이었다.

“테오, 당장 종이와 펜을 가져와서 내 말을 받아써라. 황제를 알현할 때 거치는 절차를 전부 파기하라는 명령을 전법사에 전달해.”

전법사는 제국 어디서나 통용되는 중요한 법률과 세부적인 절차를 맡는 기관이다. 테오도르는 곧게 세운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할 수 없습니다, 폐하.”

“불복종으로 감옥에 들어갈래? 아니면 종이와 펜을 가지고 올래?”

“저를 벌하신다고 해도 할 수 없습니다. 선대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법률을 수정하거나 파기하기 위해서는 적합한 절차를 거치셔야 합니다.”

“말 한번 잘했다. 그 절차도 같이 파기해야겠어.”

에리히가 툴툴거리자 테오도르는 그의 눈에 띄지 않도록 슬그머니 웃음을 띠었다.

시답잖은 불만을 토로하긴 해도 에리히가 그 정도로 막무가내는 아니라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하나밖에 없는 호위기사인 자신을 화풀이로 감옥에 넣어봤자 반나절도 못 되어 풀어줄 것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기던―너무 오래 걸린다며 구시렁거릴 때는 있었지만― 절차를 오늘따라 견디지 못하는 것은, 에리히가 이 알현에 대해 긴장의 태세를 갖춰 맞닥뜨리고 있기 때문임을 테오도르는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 아르사크 님을 그렇게 각별히 생각하게 되셨는지.’

짜증이 역력한, 마치 억지로 침대에서 내쫓겨 학교로 끌려가는 소년처럼 부루퉁하게 일그러진 에리히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테오도르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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