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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82화 (82/191)

82화

아르사크가 나감과 동시에 테오도르가 엇갈리듯이 들어왔다. 에리히는 그의 표정만 보고도 무언가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했다. 갑자기 머리가 아파오는 것 같았으나, 그는 이마를 짚는 대신 독이 오른 뱀처럼 꼿꼿이 머리를 들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말해라, 테오.”

“…폐하, 킨달을 찾았습니다.”

에리히의 눈이 빛났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테오도르가 침울한 기색으로 무거운 한마디를 더 내뱉었다.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시체는?”

“확인했습니다. 그렇지만… 물에 빠진 지 몇 시간이 지나 있었습니다.”

그 말인즉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 혹시 살인범이 남긴 흔적은 없는지 알아낼 길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테오도르의 보고에 따르면, 킨달의 시체는 수상한 도박장과 가게들이 즐비한 뒷골목의 하수구에서 발견되었다고 했다.

최근 그는 뒷골목을 꽤 요란하게 휘젓고 돌아다녔기 때문에, 살아 있을 때의 그에 대한 정보는 의외로 어렵지 않게 모을 수 있었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을 힐끔거리며 사람들이 전한 이야기 속에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킨달이 손가락 두 마디 크기는 될 법한 다이아몬드를 가지고 도박판이 벌어지는 곳마다 건들대며 다녔다는 것이다.

“다이아몬드라고?”

“분명 그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가짜겠지. 그 정도 크기의 다이아몬드는 세공을 하지 않았더라도 가격이 어마어마할 텐데.”

“거기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진술로 미루어 보았을 때, 진짜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도박판에 현물을 걸 때는 반드시 진품 감정을 받아야만 하니까요.”

보석이나 패물의 진가를 알아내는 명수들은 뒷골목 도박장에 다 자리를 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걸 에리히도 알고 있었다. 그들의 눈을 피할 정도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라면 이미 진짜나 다를 바 없는 가치를 지녔다는 말이 된다.

어느 쪽이든, 일반 병사에 지나지 않는 킨달이 쉽사리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런 귀한 것을 손에 들고 도박판을 누볐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는 분명 그 다이아몬드를 잃어도 괜찮은 또 다른 패를 쥐고 있었으리라. 예를 들면, 도박으로 그 정도의 보석을 잃더라도 또 어디선가 구할 수 있다는 장담 같은…….

“그렇게 요란을 떨었다면 더더욱 누가 죽였는지는 알 수 없겠군. 다이아몬드는 당연히 사라졌을 테고.”

“그렇습니다. 도박판에서의 원한인지, 아니면 단순 강도인지, 그것도 아니면…….”

“입막음인지.”

테오도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잡았나 싶었던 실마리가 눈앞에서 허무하게 흩어진 셈이다.

테오도르라고 해서 허탈하지 않을 리 없었다. 에리히는 조용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침묵을 지키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나가봐라.”

“폐하,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더 수색하면 다른 증인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다른 용의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요.”

“아니, 그 킨달이라는 자가 틀림없다. 그가 범인이었을 거야. 네페에서의 일들을 수도로 퍼다 날랐겠지. 그러나 당사자가 이미 죽고 없으니 이젠 방법이 없다.”

“그러면 아르사크 님은…….”

테오도르는 에리히의 눈빛이 약간 가라앉는 것을 보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알지 못했다.

다시 한참을 묵묵히 있던 에리히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당장은 늙은이를 잘 꼬드기길 비는 수밖에.”

61장 모략 (4)

카툴라 제국은 건국 이래로 사제권과 정치권이 분리되어 있었다. 신관들은 국가의 크고 작은 행사를 주관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지만 정치권과 결탁하거나 사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일은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는 신관의 축복을 반드시 받아야만 즉위 사실이 정식으로 인정되었지만, 신관이 임의로 황제를 탄핵하거나 임명을 거부할 권한은 없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정치권의 수장인 황제의 권한이 사제들을 이끄는 최고 신관보다 훨씬 더 높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건국 초기에는 오히려 신관의 지위가 훨씬 높았다.

신정(神政)이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그만큼 사제권과 정치권이 거의 동등한 권력을 가지고 서로를 견제하고 있다는 말이다.

제국의 국민들은 생활 속에서 마주치는 많은 갈등을 주로 신과 사제의 힘에 의탁해 해결하려 했다. 신앙이 깊숙하게 자리한 국가일수록 황제의 권위는 신관에 비해 약하게 마련이다.

많은 나라들이 그랬듯, 카툴라 제국 역시도 건국 초기에는 신앙을 이용해 사람들의 지지를 끌어모았으므로 에레벤나 신을 앞세운 최고 신관의 지위가 황제보다 우위에 있었다.

이러한 권력 구도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서서히 수평이 되고, 세속적인 요구에 의해 정치권 쪽으로 기울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에리히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 카툴라의 신관들은 유례가 없는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에리히는 개간 사업만큼이나 부패한 신관들의 권력을 끌어내리는 일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었다. 후녀 세 명 중 황후가 될 사람을 선택하는 예식이 그 마지막 단계였던 것이다.

그는 신관들이 그동안 의식을 조작해 왔음을 까발려 사제권을 황제의 권한 아래에 두려고 했겠지만 아르사크의 존재가 복병이었다. 설마 그날 그 자리에서, 적어도 지난 백 년간 잠잠했던 에레벤나의 빛을 실제로 보게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선대 최고 신관이 볼핀 후작과의 사사로운 결탁과 황후 암살 혐의로 처형당한 후, 남은 신관들은 그야말로 신이 내렸다고밖에는 할 수 없는 이런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듀터스 님, 황후께서 듀터스 님을 뵙고자 하십니다.”

심부름을 하며 신관이 될 공부를 하는 수련 사제가 공손히 절을 하며 말했다.

기도문이 적힌 책 위에 손을 올린 채 눈을 감고 있던 최고 신관 듀터스는 잔주름이 빼곡하게 머물기 시작한 입가를 엄숙하게 늘어뜨렸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책상 한쪽으로 밀어놓았던 좁다란 안경을 걸쳐 쓴 채 수련 사제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황실 소속의 신관들이 머무는 곳은 궁의 내부에 있긴 하지만 각 별궁과 달리 외따로 떨어져 있었다. 황궁 자체는 세월을 거치면서 몇 번의 개축을 거쳤지만, 신관들의 거처는 단 한 번도 개축이 이루어지지 않아 예스러운 건축 양식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특별히 건물에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는데, 어떤 자들은 그것이 에레벤나 신의 축복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토대를 올릴 때 사용한 돌의 재질이 다른 탓이었다.

건국 당시 신관들의 지위가 높았으므로 황궁을 건축하는 데에 사용한 석재보다 훨씬 더 견고하고 품질이 좋은 재료를 사용했던 것이다.

지금은 다시 유행을 탈 일도 없는, 옛날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석조 건물이라 바깥에서 보기에는 다소 음침한 데가 없잖았으나 장마철에도 습기가 차지 않는 돌벽의 서늘하고 안정적인 감촉이야말로 신관들의 엄숙함을 부각시키기에는 최적이었다. 적어도, 듀터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위대한 에레벤나의 은총을 받으신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아르사크와 듀터스는 초면이었다. 원래 새로운 최고 신관은 임명을 받은 후 닷새 동안 몸과 마음을 새롭게 정결하게 하는 단식기도 과정을 거친 후 황제와 황후를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절차이지만, 이번에는 워낙 갑작스러운 사건이 발생했던 터라 임명식도 생략한 채 듀터스가 최고 신관의 자리를 물려받은 탓이었다.

황제인 에리히 역시 듀터스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었으나, 그가 최고 신관의 자리에 오른 이후 정식으로 알현을 허가한 일은 없었다.

“그대가 듀터스로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오는 도중 로즈안나가 귀띔해 준 것이 전부이긴 했지만, 어쨌든 아르사크는 예의를 차려 말했다.

듀터스는 아르사크의 인사치레를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나이 든 신관일 뿐입니다.”

“듣기로 그대는 성품이 온화하지만 불의와는 결코 타협하지 않는 인물이라고 하더군요. 신을 모시는 이들을 이끄는 자리라면 모름지기 그대와 같은 인물이 있어야 할 거예요. 술수나 부리며 부와 권력을 탐하는 이들보다는.”

듀터스 이전의 최고 신관은 아르사크로 인해 그 자리에서 쫓겨난 것이나 다를 바 없었기에, 아르사크의 마지막 말은 듣기에 따라 무척 의미심장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듀터스는 그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아르사크의 말은 오히려 듀터스라는 자를 표현하기에 부족한 부분이 있었다.

그는 신관들 중에서도 가장 융통성이 없고 사리 분별에 엄격했다. 아주 조그만 부정이라도 그냥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선대의 최고 신관을 따르던 세력들과는 몇 차례 충돌을 겪기도 했던 것이다.

볼핀 후작의 후견인이었다는 어마어마한―지금은 과거의 일이 되었지만― 권력 앞에서 듀터스와 비슷한 이들은 신관으로서 설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정치권과 결탁했던 신관들이 모조리 쫓겨난 지금, 듀터스는 최고 신관으로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막강한 힘으로 사제권을 지켜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는 실제로 매우 깨끗하고 완고한 인물인지라, 오히려 에리히 쪽에서는 선대보다도 껄끄러울 수밖에 없는 상대였다.

아르사크가 그런 세세한 부분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의 눈빛이나 풍겨 나오는 분위기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만만하게 찔러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대번에 파악할 수 있었다.

“황후께서 예까지 친히 걸음 하신 데에는 이유가 있을 테지요.”

알싸한 향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사이에 둔 채 듀터스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좀처럼 구슬려 볼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얼굴을 응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그대가 필요한 일을 부탁하기 위해 왔습니다.”

“무엇이 황후 마마의 심기를 어지럽히나이까. 미욱한 자의 도움이나마 필요로 하신다면 무엇이든 하겠으니 말씀하십시오.”

듀터스는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무척 완고한 데다 도도하기까지 한 성미여서, 귀족은 물론이거니와 황제인 에리히 앞에서도 불경스럽기까지 한 고압적인 태도를 유지했지만 아르사크에게는 약간의 예외를 두고 대하고 있었다.

아르사크가 황후로서 가지고 있는 권력이나 지위에는 결코 복종하지 않았으나, 만들어낸 것이 아닌 진짜 에레벤나의 빛이 그녀에게 내린 이상 아르사크는 듀터스가 마땅히 충성을 바쳐야 하는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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