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차라도?”
카셀이 말했다. 그러나 루이제는 먼지 쌓인 선반 위에 놓인 주전자와 이 빠진 그릇들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카셀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루이제 맞은편에 놓인 궤짝에 털썩 주저앉았다. 조심성이라고는 없는 몸짓에, 귀족의 딸로 곱게 자란 루이제의 가녀린 어깨가 흠칫 떨렸다.
“샬롯의 일로 나를 찾는다고? 대체 무슨 일이죠? 난 샬롯을 만나지 않은 지 꽤 되었는데.”
앉자마자 실망스런 소식이다. 그러나 루이제는 물러설 수 없었다.
“하지만 샬롯을 알죠? 혹시 그 사람이… 황후 마마에 대한 소문 같은 걸 당신에게도 이야기하러 왔었나요?”
“소문? 아, 황후에게 정부가 있다는 소문?”
과연 여기까지도 말이 퍼진 모양이다. 루이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열렬한 눈으로 카셀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 사람이 뭔가, 아주 조그만 단서라도 알고 있기를 바랐다. 샬롯이 내려간 고향의 위치라든가…….
잠깐, 어렸을 때 옆집에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
“저기, 혹시 말이에요.”
루이제가 말했다. 카셀이 눈썹을 힐끔 들었다. 이목구비가 시원시원했다. 여자라는 것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오밀조밀하게 꾸민 데 없는 그 얼굴 때문인지 도통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샬롯과 어릴 때… 옆집에 살았다는 건, 혹시 샬롯의 고향은…….”
“당연히 여기지. 샬롯의 가족은 계속 여기서 살았어요. 지금은 다 죽고 없지만.”
“벼, 병든 어머니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했다던데…….”
“샬롯네 아주머니가 돌아가신 지는 10년도 더 됐는데. 당신, 어디서 헛소문만 듣고 온 것 같은걸?”
루이제는 허망한 표정으로 입술을 벌렸다. 뭐 하나 맞는 말이 없었던 것이다. 애써 찾은 실마리라고 생각했건만, 처음부터 전부 거짓말이었다니. 이제는 샬롯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카셀은 어두워진 루이제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혹시 그 소문과 샬롯 사이에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거예요?”
고민하던 루이제는 상황의 전말을 간단하게 전달했다. 카셀은 한마디 말도 없이 루이제의 말을 듣고 있다가 짙은 눈썹을 희미하게 찡그리면서 마른 입술을 한 차례 빨아당겼다.
“정말 샬롯이 그 소문을 퍼뜨린 게 맞긴 한 거야?”
“정확한 건 알 수 없어요. 본인을 만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소문을 가장 먼저 귀부인들 사이에 퍼뜨린 건 딜라이라 피먼 자작 부인이고, 그녀는 샬롯에게서 그 소문을 들었다고 했어요. 다른 하녀들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니 누군가 샬롯에게 말을 흘린 거겠죠. 난 그게 누군지 궁금할 뿐이라고요.”
루이제의 목소리는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인 것처럼 떨렸다. 카셀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데 황후와 관련된 소문에 당신이 이렇게 열성인 이유는 뭐지?”
말문이 막힌 입술이 꼭 다물렸다. 사실, 루이제 자신도 이제는 왜 이렇게까지 열심인지 그 이유가 모호했다. 아르사크가 협박을 했기 때문에? 그것도 물론 큰 이유이긴 했지만, 단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아르사크를 도울 이유가 없다. 딜라이라와 귀부인들이 아르사크를 헐뜯을 때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던 것처럼, 루이제는 요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기분에 사로잡혀 머리가 복잡했다.
“그건… 그건 당신이 알 바 아니고요.”
“누구 심복 노릇이나 할 것 같진 않은데. 그렇게 영리할 것 같지도 않아 보이고 말이야.”
카셀의 말에 루이제는 발끈했다.
“무례하군요!”
“이제 아셨나? 여기 사는 인간들은 도통 예의라는 걸 몰라서.”
“돌아가겠어요.”
샬롯의 말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걸 안 이상, 더 이상 이 카셀이라는 자에게도 볼일은 없었다.
루이제는 나풀거리는 드레스 자락을 한데로 휙 모으며 궤짝에서 몸을 떼었다. 문 같지도 않은 문을 덜컥 밀어 연 순간, 카셀이 루이제의 어깨를 갑작스럽게 잡았다.
놀라서 고개를 돌렸던 루이제는 마치 어두운 숲처럼 우묵하게 깊은 녹색 눈동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샬롯을 만난 지 오래되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뭐라고요?”
“하지만 그 애가 지금 어디 있는지는 나도 몰라요. 원래 그런 애니까… 뭐, 잘 먹고 잘 살 곳을 찾아갔겠죠. 하지만 떠나기 전에 날 한 번 찾아왔었어요. 그리고 내게 이걸 주더군요.”
카셀이 지저분한 헝겊을 내밀었다. 안에는 무언가 딱딱한 것이 들어있었는데, 펼쳐보니 그것은 금화 세 닢이었다.
루이제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셀을 올려다보았다. 이게 뭐 어쨌느냐는 표정에, 카셀은 다시 헝겊으로 금화를 싸면서 한숨을 푹 쉬었다.
“당신네 귀족들 눈에는 아무 가치도 없을 푼돈인지 몰라도, 이런 빈민가에서 금화 세 닢이면 네 식구가 한 달은 먹고살 수 있지. 샬롯은 어릴 때부터 허영심이 많아서 월급은 모으는 족족 다 써버리곤 했어요. 그런 애가 이런 돈을 내게 주고 갔다는 건, 갑자기 많은 돈이 생겼다는 뜻이고. 어디서 돈이 생겼느냐고 묻자 그 애가 말하더군요. 자신을 돌봐주던 사람에게서 받았다고.”
“돌봐주던 사람요?”
“뭐, 어떤 식으로 돌봐줬는지는 깊게 알 필요 없고. 아무튼 그 사람과 헤어지게 되어 떠난다고 하던데, 다시는 수도로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 사람이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나요?”
“당연히 말 안 했지. 하지만 딱 한 번 마주친 적은 있어요. 샬롯은 날 모른 체하고 지나갔지만… 잘 차려입은 남자더군. 아마 말단 귀족이거나 그저 그런 놈팽이라 생각했죠.”
“얼굴은요? 얼굴은 못 봤어요?”
루이제는 거의 숨을 헐떡거리고 있었다. 어쩌면 일이 풀릴 가닥을 다시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막막한 안개 속을 헤치고 다니는 기분이었는데, 드디어 길 다운 길이 눈에 들어왔을 때의 흥분이라고 할까. 루이제는 그만큼 고조된 상태였다.
그러나 카셀은 예의 그 뚜렷한 눈동자로 루이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루이제의 얼굴에 단박에 실망감이 떠올랐다.
“얼굴은 못 봤어요. 모자를 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남자한테서 아주 진한 향수 냄새가 풍기더군요. 뭔가 나무 냄새 같기도 하고… 독특한 향기였어요. 어찌나 많이 뿌렸는지 코가 다 얼얼하던데.”
루이제의 파란 눈동자가 휘둥그렇게 커졌다. 카셀의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눈앞을 스쳐 지나간 얼굴이 하나 있었다.
* * *
오후 무렵, 아르사크는 에리히와 마주 앉아 기온 백작이 보낸 편지를 읽었다.
단정하고 중후한 서체였다. 아르사크는 기온 백작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글씨만 보아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우 나이가 많고 잔꾀가 통하지 않는, 꼬장꼬장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임이 틀림없었다.
“이 편지를 제게 보여주신 이유가 뭔가요?”
아르사크의 질문에 에리히는 턱을 괸 채 어깨를 들썩였다.
“글쎄, 무엇일 것 같아?”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있으라는 건가요? 아니면, 내일 이자들 앞에서 내가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호소라도 하라는 건가요?”
“하나씩 멱살을 잡고 패대기치는 건 어때? 그쪽을 더 잘하잖아.”
“허락만 해주신다면 그렇게 하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럴 거면 뭣 하러 말은 꺼냈는지.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며 책상 위로 편지를 밀어놓았다. 아직 저물려면 한참인 햇빛이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와 종이 끄트머리를 하얗게 비추었다.
“귀족들은 그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야.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내치려고 들겠지. 하지만 그대가 지금 폐후가 되어서는 내게도 곤란해.”
“그걸 빌미로 다시 황후를 간택하라고 할 테니까요?”
“맞아. 황후가 폐위된 기록은 드물지만 아주 없지도 않아. 황후가 폐위되는 일이 생기면, 황제는 그 어떤 때보다도 빠르게 다음 황후를 맞아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황실의 명예가 땅바닥에 처박힐 테니까 말이야.”
“폐하께서는 그런 일을 두고 볼 분이 아니긴 하죠.”
“내가 눈을 뻔히 뜨고 살아 있는 이상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지.”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도 그런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대를 부른 건 뭘 어떻게 하라고 부른 게 아니야. 이 편지를 보여준 이유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을 하기 위함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이다. 아르사크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고 에리히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런 판국인데 당사자인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귀족들은 그대를 끌어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거야. 예전에 볼핀이 그랬던 것처럼 그대의 주변에 사람을 심어놓을지도 모르지. 오늘부터 그대를 모시는 시녀들의 수를 다섯 명 이하로 줄이도록 해. 로즈안나와 상의해서 주의 깊게 사람을 고르고, 입이 가벼운 시녀는 아무리 믿을 만해도 옆에 둬서는 안 돼.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그대는…….”
“폐하꼐서는 아직도 저를 잘 모르시는 모양이군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말해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거란 건 예상했어.”
“이건 제 명예와도 관련된 문제입니다. 일이 이렇게까지 된 이상, 제가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요.”
에리히는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시늉을 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르사크 역시 이 사태를 타개할 만한 열쇠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르사크의 방식대로 무작정 멱살부터 잡게 두었다가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생긴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일만은 막아야 했다. 황후가 귀족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소문은, 황후가 정부를 두었다는 소문보다 훨씬 큰 파장을 불러올 것이 틀림없었다.
한참이나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에리히는 마침내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 있어. 아니, 정확히는, 이런 상황이니 싫어도 그대가 해야만 하는 일이지.”
“해야만 하는 일? 그게 뭐죠?”
에리히의 눈이 한번 깜빡였다. 햇빛을 등져서 더욱 푸르게 보이는 눈동자를 가만히 마주 보던 아르사크는 문득 고개를 돌릴 뻔했다. 그러나 에리히의 말이 그녀의 움직임을 막았다.
“최고 신관을 만나보고 와. 그대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해. 단,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썩 내키지는 않는 방법이었지만, 지금으로서는 마음에 들고 말고를 따질 만한 때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