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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80화 (80/191)

80화

“접견을 허가하실 생각이십니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대로 귀족들의 요구에 쉽게 응하면 에리히와 아르사크에게는 별로 승산이 없었다. 아직 반박할 만한 증거를 하나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리히는 이마를 짚었던 손을 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야지.”

“폐하, 하지만…….”

“하지 않으면 결국 이 소문이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꼴밖에 되지 않아. 저들이 노리는 것도 그것이겠지. 허가하는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너는 무슨 수를 써서든 빠른 시일 내에 킨달을 찾아내라, 테오.”

“알겠습니다.”

* * *

“루이제 아가씨, 외출하십니까?”

계단을 내려가려던 루이제는 등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힐끗 돌렸다. 부쩍 더워진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아래로 검은 옷을 걸친 남자가 루이제를 내려다보며 난간 너머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내 외출에 관심이 있었죠, 슈로터?”

“섭섭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주인님을 모시는 몸입니다. 그러니 주인님의 따님이신 루이제 아가씨께도 당연히 관심을 두고 있지요.”

“당신 관심은 필요 없어요.”

루이제는 자신의 말을 몸으로 증명이나 하려는 것처럼 불필요할 정도로 매몰차게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슈로터는 루이제를 따라 계단을 내려왔다. 그가 옆에 와 섰을 때, 루이제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슈로터의 존재가 가까이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쌉싸름하고 깊은, 너무 진해서 속이 울렁거릴 만큼 강한 향이 풍겼기 때문이다.

루이제는 이 향기 때문에 슈로터를 더욱 싫어했다. 옛날부터 아버지인 홀드빅 자작을 충실하게 따른 자이기는 하지만, 늘 어딘지 모르게 음험한 분위기를 풍겼는데 그 인상을 더욱 강렬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이 향기였다.

루이제는 슈로터를 쳐다보지 않은 채 고개를 빳빳이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주인님께서는 오후에 톤라크 영지로 떠나실 예정입니다.”

“뭐라고요? 갑자기 왜?”

톤라크는 첫째 언니가 결혼해 살고 있는 곳이었지만, 갑작스레 마음이 내킨다고 왔다 갔다 할 수 있을 만큼 가깝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에게 그런 예정이 있었다면 루이제가 몰랐을 리 없었다.

“언니의 생일도 아니고, 아버님께서는 내게 한마디도 안 하셨는데?”

“주인님 혼자만 가십니다. 장녀가 보고 싶으신 모양이지요. 나이가 들면 그럴 수도 있습니다.”

슈로터가 말했다. 그러나 루이제는 더욱더 뾰로통한 표정을 지은 채 그를 무시하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자신의 인생이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은 루이제에게 무척 굴욕적인 일이었다.

커다란 중앙 현관을 나설 때까지 코끝에서 떨어지지 않는 슈로터의 향기도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앙증맞은 코를 떼어내기라도 할 듯이 손수건으로 거칠게 문지른 루이제는 숨을 몰아쉬며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한참을 달려 귀족들이 모여 사는 구역을 벗어났다. 덜컹거리는 길이 이어지고, 홀드빅 가문의 화려한 문장이 찍힌 마차가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골목까지 다다랐을 때 루이제가 말했다.

“여기서 마차를 세우고 기다려.”

루이제의 말에 마부는 질겁을 했다. 코앞이 빈민가였던 것이다. 그는 벌써 발치를 얼쩡거리는 부랑아 몇 명을 향해 마편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아가씨, 안 됩니다. 여기는 너무 위험합니다.”

“기다리라면 기다릴 것이지 말이 많아?”

뾰족한 목소리로 대꾸한 루이제는 마차의 문을 열고 아래로 내렸다. 지저분한 차림의 꼬마들이 뭔가 훔쳐 갈 것이 없나 눈을 번득거리며 루이제의 주변을 빙빙 돌기 시작했다.

루이제는 긴장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면서 천천히 숨을 내쉬고는 아이들을 향해 물었다.

“카셀이라는 사람의 집이 어디야?”

“카셀? 내가 카셀이에요.”

“거짓말이야! 내가 카셀이에요. 진짜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 아빠가 내 이름을 그렇게 지었댔어요.”

“넌 아빠도 없잖아!”

“아빠가 많은 너보다는 낫지.”

“뭐가 어째? 죽고 싶어?”

갑자기 벌어진 싸움판에 루이제는 어쩔 줄을 모르고 주춤 물러서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뒤쪽에도 이미 꼬마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발을 물릴 만한 곳도 없었다.

루이제는 와글거리는 지저분한 꼬마들이 드레스 자락을 잡고 늘어지자 기겁을 했다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빽 소리를 쳤다.

“소란 피우면 병사들을 불러서 다 잡아가라고 할 거야! 카셀이라는 사람의 집이 어딘지나 말하란 말이야!”

루이제의 말에 와글거리던 소음이 일순 멎었다. 그러나 빈민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영악한 꼬마들이 아직 앳된 루이제의 신경질 따위를 겁낼 리가 없었다.

“병사들을 불러오면 창을 빼앗아서 전쟁놀이나 할 건데!”

“아니야! 그 아저씨들의 갑옷을 벗기자!”

“갑옷은 벗겨서 뭐 하냐? 우웩. 그러지 말고 빵이나 사달라고 하자.”

“잘도 사주겠다. 감옥에 들어가면 실컷 먹을 수 있을걸?”

“감옥에서 먹는 빵은 구더기가 나온대.”

“구더기로 만든 빵이니까 그렇지.”

아이들이 깔깔거렸다. 루이제는 머리가 다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저희들끼리 뒤엉켜 법석을 떠는 꼬마들에게 떠밀리다시피 빈민가의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그녀는 차라리 울음이라도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녀가 정신없이 비틀거리듯 걷는 사이 조그만 꼬마 하나가 루이제의 드레스에 매달린 장식용 버클 위로 손을 뻗쳤다. 그 순간이었다.

“이 못된 꼬맹이들! 또 몰려다니면서 못된 짓이나 하지!”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루이제뿐만 아니라 꼬마들도 깜짝 놀랐다.

루이제는 자신의 주변에 와글와글 모여 있던 아이들이 사냥개에 놀란 참새 떼처럼 와르르 흩어지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우리 못된 짓 안 했거든!”

“저 번쩍거리는 여자가 우리 동네에 들어왔길래 통행료 좀 뜯으려던 거거든!”

“훔치기도 전에 댁이 온 거거든!”

무엇 하나 제대로 된 말이 없었다. 루이제가 갑작스럽게 어지럼증을 느끼며 이마를 짚는데, 키가 큰 누군가가 불쑥 루이제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괜찮아요?”

루이제는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났다. 루이제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여자였다. 첫눈에 여자라는 걸 몰랐던 것은 목이 훤히 드러나도록 짧게 쳐낸 머리카락 때문이었다.

루이제는 생전 처음 보는 희한한 차림새의 여자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곧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맙군요.”

“그런 말을 하긴 이르죠. 딱 봐도 이런 데서 길 잃을 일 없는 고상한 아가씨가 여기까진 무슨 일로? 설마 동전이나 뿌리러 온 건 아닐 테고.”

“내가 동전을 뿌리러 왔든 동전으로 탑을 쌓으러 왔든 당신이 알 바인가요?”

“조금 전에 고맙다고 말한 입이 맞아? 당연히 내 알 바지. 여긴 내가 사는 동네니까. 그리고 동전을 뿌리는 짓은 안 하는 게 좋아요. 아까 그 꼬마들하고는 상대도 안 되는 놈들이 개떼처럼 몰려들 테니까. 개밥이 되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어쩌면 애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이렇게 사람 겁주는 소리를 잘할까. 생전 처음 들어보는, 황당할 정도로 무례한 말에 루이제는 차마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여자는 얼음장처럼 굳은 루이제를 보며 혀를 끌끌 차다가 허리에 손을 얹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뭐 찾는 놈이라도 있어? 빚지고 도망 온 놈을 찾아요?”

“비, 빚이라니. 그런 게 아니거든요? 난 사람을 찾아요!”

“빚지고 도망 온 놈이 아니면, 설마 이 동네 놈팽이랑 밀회라도 한 건가?”

“뭐가 어째요? 무슨 이런 무례한……! 내가 누군 줄 알고!”

“댁이 누구건 여기서는 아무 상관도 없어.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네, 이 철부지 아가씨가. 목소리 낮춰요. 온 동네 잡놈들 다 불러 모을 작정이 아니면.”

“나, 난… 난 카셀이라는 사람을 찾아왔는데……!”

“카셀?”

여자가 눈썹을 찡그렸다. 루이제는 창백해진 얼굴을 끄덕이면서 드레스 자락을 꼭 쥐었다.

“카셀은 왜?”

“다, 당신… 카셀이라는 사람을 알아요? 나, 날 좀 안내해 줘요. 그럼 보수는 두둑이……!”

“아, 보수니 뭐니 그런 건 관심 없으니까 왜 찾는지나 말하라고요.”

“그… 그 사람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요. 그 사람이… 피먼 자작의 저택에서 일하던 샬롯… 이라는 하녀와 아는 사이였다고 해서.”

그동안 루이제는 볼 일도 없는 피먼 자작가에 뻔질나게 드나들며 하녀들 사이에서 샬롯의 행적을 수소문했다. 그녀가 자주 만나던 사람이 있는지, 자주 가던 곳이 있는지…….

딜라이라의 눈에 띄지 않게 하녀들을 추궁하고 다니다가, 샬롯과 비슷한 시기에 저택에 들어왔다는 하녀로부터 샬롯이 빈민가의 ‘카셀’이라는 사람을 자주 찾아갔다는 정보를 얻어낸 것이다.

과거형인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얻어낸 실마리였다. 샬롯 본인을 찾을 수 없다면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야 했다.

“아무튼, 그래서 카셀이라는 사람을 찾아요. 그러니까 혹시 살고 있는 곳을 안다면 안내를 부탁하죠.”

“카셀이 살고 있는 곳이라면 내가 잘 알지.”

여자가 말했다. 루이제는 저도 모르게 반색을 하며 웃었다.

“다행이다! 아, 혹시 당신은 그 사람의 친구인가요? 아니면 가족?”

“아니, 둘 다 아니야.”

“아! 그럼 이웃에 사는!”

“아냐. 내가 바로 카셀이야. 샬롯은 어릴 때 우리 옆집에 살았고.”

60장 모략 (3)

“거기 아무 데나 앉아요.”

카셀은 그렇게 말했지만, 루이제는 도무지 어디에 앉아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성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분명 집은 집인 것 같은데,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이다. 누가 던져다 놓은 것 같은 빈 나무 궤짝이 두어 개 굴러다니고, 다 탄 숯을 다 치우지도 않은 낡아빠진 화로와 짚더미.

그 짚더미는 지저분한 천으로 덮인 것을 보아 아마도 침대로 쓰는 것 같았지만, 루이제라면 뭘 준다고 해도 결코 저 위에서 잠들지는 못할 것이었다.

“어… 어디에 앉으란 말이에요?”

서성거리던 루이제가 말했다. 그러자 카셀은 짤막한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이 벅벅 문지르며 화로 주변에 굴러다니던 천 조각을 뒤집어 궤짝 위에 툭 올려주었다. 그 천 역시 얼룩덜룩했다.

“그게 의자니까 앉든지, 아니면 그 삐죽한 신발을 신고 계속 서 있든지 마음대로 해요.”

카셀은 드레스 밖으로 살짝 튀어나온 루이제의 구두코를 쳐다보았다. 카셀의 집은 빈민가의 가장 깊숙한 골목 안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마을 입구에서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벌써 뒤꿈치가 심상찮게 욱신거리던 참이었다. 루이제는 울상을 한 채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어쩔 수 없이 궤짝 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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