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로덴 남작은 냉랭하게 가라앉은 홀드빅의 표정을 보고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잠시 입을 우물거리다가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정을 주체 못 하고 실수를 했군요. 부디 너그럽게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잊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의 막내딸은 마지막 예식에 참가할 자격을 얻은 후녀였습니다. 만약 그날 에레벤나께서 선택하신 인물이 지금의 황후 마마가 아니라 저의 딸이었더라면, 이 지저분한 소문의 희생양은 제 딸이 되었겠지요. 그 생각을 하니 황후 마마께도 연민을 느끼는 것뿐입니다. 또한, 폐하께서 아직 공식적으로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더라도 이번 일로 심경이 많이 상하셨으리라는 것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 제가 폐하의 여러 정책에 대해 대체로 반대하는 입장이었던 것은 맞지만, 그것도 다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한 일이었지요. 이 자리에 모이신 여러분들은 안 그렇습니까?”
진심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말임을 모두가 알았지만 아무도 함부로 반박할 수 없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막내딸까지 들먹이며, 그동안 에리히와 여러 번 부딪쳤던 일을 순식간에 나라를 위한 충성심으로 포장해 버리는 말재주에 할 말을 잃은 것이다.
게다가 마지막에 던진 질문 역시나 교묘했다. 찬성한다면 자동적으로 홀드빅 자작의 말에 동조하는 것이고, 반대한다면 자신은 제국을 위한 마음이 없다고 대놓고 고백하는 꼴이 되니 말이다.
결국 그들은 어영부영 침묵했다. 그리고 옛날부터 언제나, 항상, 침묵은 힘 있는 자만을 대변하여 긍정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소문이 사라지기만을 두고 볼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벌써 귀족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민간에까지 전부 퍼졌단 말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튈브리크를 중심으로 그 주변 마을에서는, 폐하께서 우리가 낸 세금으로 이방인들을 먹여 살리고 있다며 원성이 나오고 있는 판에…….”
로덴 남작이 여전히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구시렁거리자 주변의 두어 사람들이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예전에 볼핀 후작이 득세했을 때 가장 열렬히 그를 추종하던 이들이었지만, 후작이 추방될 때 가장 먼저 등을 돌린 이들이기도 했다.
홀드빅은 속으로 경멸하는 웃음을 지으며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가장 나이가 많은 기온 백작을 돌아보았다.
“백작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작이 내 의견을 궁금해할 줄은 몰랐군.”
“그동안 제게 의견을 물을 기회를 안 주셨잖습니까. 우리들 중 가장 오랫동안 정치를 하신 분은 백작님이시지요.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 조언해 주십시오.”
기온 백작이 파벌 싸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이만한 사건이 아니었더라면 홀드빅 자작이 그에게 의견을 물을 일 같은 건 없으리라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나이 많고 보수적인 기온 백작은 이 사태를 단순한 해프닝 정도로 바라보지 않았다. 비록 홀드빅의 꿍꿍이를 알 수 있는 방법까지는 없다 해도, 황실과 관계된 일이니만큼 뭔가 해결책을 내야 한다는 생각은 그도 역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로덴 남작이 말했던 대로, 제국 내에 머물고 있는 토르갈 부족민들에 대한 민심이 점점 나빠지고 있다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대로 두었다간 언젠가는 말썽거리가 될 것이다.
아르사크가 에리히에게 순종적이고 얌전한 황후가 아니기 때문에, 더욱더 명망 있는 귀족들이 나서야 한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께서 왜 아무런 말씀이 없으신지, 이 소문에 대해 알고 계신지에 대한 여부까지는 나도 아직 알지 못하지만… 이 문제에 관해 폐하와 직접 논의해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오.”
기온 백작이 말하자 몇몇 사람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입을 다물고 있는 사람들도 내색하지는 않지만 불안한 심정은 똑같았을 것이다.
홀드빅이 말했던 것처럼 이 소문에는 결정적인 증거가 없었다. 비터 자작의 아들이 선물을 주었다는 것은 사실이라지만, 네페 영지는 예로부터 광물이나 보석이 많이 나는 곳이니 영주의 아들이 희귀한 수정을 몇 가지 가지고 있다 한들 그것이 꼭 특별한 의미라고는 할 수 없었다. 만약 정말로 황후와 그가 어딘가에서 밀회라도 했다면 모를까…….
“논의라면 어떤 방향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일단은 진위 여부에 대해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지 확인을…….”
“백작, 그것은 어리석은 생각이십니다. 폐하께서 언제 한 번이라도 귀족들의 의견을 긍정적으로 수렴하신 적이 있었던가요?”
“그것을 폐하의 실책으로 돌릴 수는 없는 일이죠. 개간 사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인지하고 계셨던 바가 아닌가요?”
“개간 사업뿐만이 아니라 이번 후녀 선발만 하더라도……!”
“지나간 이야기는 그만둡시다. 우린 지금 황실의 명예와 직결된 이 소문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야죠.”
“비터 자작의 아들을 심문해야 합니다. 진상을 밝혀야지요.”
“자작이 자신의 아들이 증거도 없이 잡혀가는 꼴을 눈앞에서 보고만 있을까요? 또, 폐하께서 심문하기로 결정하셨다면 이미 하셨을 거요.”
“그래서 어쩌자는 거요? 반박만 하지 말고 그럴싸한 의견을 내보시든지!”
다시 소란해졌다. 언성이 높아지고 거친 감정들이 오가는 그 사이에서 홀드빅은 내심 승리감에 도취된 웃음을 띠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손뼉을 딱, 두드렸다.
“이건 우리끼리 싸워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자잘한 의견은 서로 다르더라도, 결국 우리 모두 황실과 제국을 위하는 마음이라는 것은 똑같지 않습니까?”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해진 좌중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황실과 인척 관계에 있던 볼핀 후작에게 밀려 그간 모든 속내를 드러나지 않았을 뿐, 홀드빅 자작 역시 과거의 볼핀 후작에게 뒤지지 않는 야심과 욕망의 덩어리였다. 심지어 세 치 혀로 사람들을 솜씨 좋게 꼬여내는 것은 볼핀보다 한 수 위일 듯싶었다.
홀드빅은 보일 듯 말 듯 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느리게 입을 열었다.
“이 소문에는 증거가 없지만, 그렇다고 간과하고 넘어갈 수도 없는 문제이지요. 폐하께 비터 자작의 아들을 공식적으로 심문할 것을 요청하고, 더불어 황후 마마 역시 모두의 앞에서 신의 이름을 걸고 증언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홀드빅 자작, 모두라고 함은……?”
“말 그대로입니다. 수도 귀족들뿐만 아니라 국민들도요. 황후가 되실 때도 그렇게 하셨으니, 결백도 그렇게 증명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정말로 결백하시다면 에레벤나 님께서 이번에도 ‘신의 빛’을 보여주실지 모르는 일이고요.”
좌중은 다시 술렁였다. 비터 자작의 아들을 심문하는 일은 그리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에리히 역시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 정도 일은 허락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황후가 수도 귀족들과 온 국민이 모인 앞에서 자신이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음을 증언하라니?
그것은 대단한 수치였다. 결백하든, 결백하지 않든, 이런 소문으로 인해 황후가 대중 앞에 얼굴을 내민다는 것 자체가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설령 그녀가 증언한들 사람들이 그 말을 다 믿으리라는 보장도 없었다.
홀드빅은 당연한 일인 양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아르사크는 자신의 결백을 증언하는 순간 부정하고 단정하지 못한 여자로 낙인찍혀 한순간에 폐위까지 내몰리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언하지 않으면 뭔가 켕기는 데가 있으니 그런 것이라는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쯤 되면 이미 진실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아르사크는 신행에서 정부와 놀아난 황후가 되고 만다. 홀드빅이 노리는 것은 그것이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술렁이던 이들 중 홀드빅을 따르는 자들은 차차 한 명씩, 한 명씩 스산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 역시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아르사크와 토르갈은 수도 귀족들에게 있어 눈엣가시나 다름없었다. 모처럼 기회가 왔는데 어떤 바보가 그것을 발로 차버리겠는가?
“그럼 내일 중으로 폐하께 접견을 요청하지요. 기온 백작께서 대표를 맡아주시기 바랍니다.”
“왜 나요? 자작이 아니라?”
“저보다 연륜이 있으신 분을 두고 제가 건방지게 앞에 나설 수는 없지요.”
눈치 빠른 자들은 홀드빅의 속내를 금방 알아차렸다. 그가 이 문제로부터 한발 물러나려는 것을 짐작한 것이다.
그러나 기온 백작은 반듯하게 다듬은 콧수염을 쓸더니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내가 대표를 맡지요. 다른 분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함께 폐하를 접견할 것을 부탁하겠습니다.”
“백작께서 제국을 위한 일에 이토록 열성이시니 감탄스러울 뿐입니다. 폐하께서도 분명 심사숙고하실 겁니다.”
“그러셔야 할 텐데요.”
59장 모략 (2)
“뭐야, 이건?”
시종장이 가지고 온 편지를 읽던 에리히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그는 영문을 몰라 시선을 던지는 테오도르 쪽을 향해 편지를 툭 내려놓으며 말했다.
“기온 백작이 접견 요청서를 보냈군. 이번 소문에 관한 일로 논의할 일이 있으니 다른 귀족들과의 접견을 허락해 달라고 말이야.”
“기온 백작이요……? 그 사람은 딱히 파벌을 만들지 않는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보수파의 수장 역할을 하던 사람이었지만…….”
“나도 안다. 이 자라면 분명 깐깐한 잔소리나 몇 마디 하러 올 생각이겠지만, ‘다른 귀족’들과의 접견이라니? 떼로 몰려올 작정인가 본데 도대체 누가 부추긴 거지?”
소문은 불과 며칠 사이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황궁 안에서도 그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에셴이 전해준 바에 따르면 뒷골목의 술집에서조차 아르사크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고 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소문이 가라앉기를 기다리기는 너무 늦었다. 그사이 범인을 잡았다면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행운은 에리히의 편도, 아르사크의 편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킨달이라는 자에 대한 수색은 어떻게 되었지?”
“그자가 자주 드나든다는 도박장 몇 군데에 사람을 대기시켰지만, 사흘째 출입이 없습니다.”
“집에는 가봤나?”
“킨달은 부대 내에서만 생활했다고 합니다.”
에리히는 골치 아픈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수도에 따로 집을 두고 있지 않은 병사들은 꽤 되었다. 주로 연고자가 없는 경우, 그리고 미혼인 경우에 그랬다.
개중에는 가족이 있거나 돌아갈 집이 있어도 부대 내에 머무는 것을 더 편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랬다면 테오도르가 무슨 수를 써서든 찾아냈을 것이다.
“누가 주도한 일인지 알 수 없게 나이 든 기온 백작을 앞세워 따지러 오겠다는 통보에,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 단 한 놈은 증발이라. 앞뒤가 잘 맞아도 너무 잘 맞아 들어가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