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잠깐의 침묵이 에리히와 아르사크 사이에 멈춰 섰다. 머리를 빗어 내리는 부드러운 소리만이 들렸다.
“그건 마음에 들어?”
화제를 돌리듯이 에리히가 말했다.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아르사크의 시선이 거울 앞의 머리핀에 가 닿았다.
“예쁘잖아요. 반짝거리고.”
“진짜 보석도 아닌데.”
“진짜면 어떻고 가짜면 어떤가요? 장신구로서의 용도만 다한다면 값은 관계없지요.”
“사람도 그러한가?”
아르사크는 잠시 그의 속내를 가늠하려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도 그래요.”
“사람의 본질은 바꾸기 어렵지만 머리핀 정도는 값비싼 것으로 새로 사줄 수 있어.”
“아뇨, 이게 좋습니다. 값비싼 것은 필요 없어요.”
에리히는 더 말하지 않고 묵묵히 아르사크의 머리를 빗겨주었다.
거울에는 그의 얼굴이 비치지 않았지만, 아르사크는 왠지 그가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실제로, 에리히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잠잠히 미소를 띠고 있었다.
“여기서 자고 가실 건가요?”
“왜, 안 돼?”
“안 된다고 하면 나가시게요?”
“생각 좀 해보지.”
머리를 빗겨주는 일이 끝났다. 빗을 내려놓은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뒷모습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머리칼을 넘겨 조그만 귀가 드러나게 했다.
이런 식의 접촉이 매우 빈번해졌다는 것을, 그리고 서로 거북함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에리히만 깨닫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르사크는 거울에 비치는 그의 손끝에 시선을 두고 있다가 예고도 없이 몸을 일으켰다.
“한밤중에 쫓아내긴 불쌍하니, 자고 가세요.”
에리히는 어차피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별다른 표정 변화도 없이 침대로 걸어갔다. 후원을 향해 열린 창문 틈으로 바람이 불어와 커튼이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아르사크는 어둠을 등지고 있는 에리히의 얼굴을 가만히 보았다. 여전히 냉소적이고 오만한 얼굴이다. 차라리 못생기기라도 했으면 그 사늘한 표정에 눈길을 덜 주었을까?
에리히는 깊은 겨울에 내리는, 너무 차가워서 파르스름하게까지 느껴지는 눈으로 빚어놓은 것 같았다. 시선을 내리깔고 있으면 무엇인지 모를 섬세한 흔들림이 느껴졌고, 이따금 잠든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 흔들림으로 말미암아 슬퍼하는 소년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 모든 감상에 미약한 혼란스러움을 느끼면서도 아르사크는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아무 말이 없는 에리히를 내려다보던 아르사크가 대뜸 말을 꺼낸 것은 그 순간이었다.
“흉터를 보여주시겠어요?”
아르사크의 말에 에리히의 눈썹이 희미하게 찡그려졌다.
“갑자기 무슨 소리를…….”
“뱀에게 물린 흉터 이야기를 하셨잖습니까.”
“그게 왜 보고 싶은지 묻는 거잖아.”
“그냥요. 어떻게 생긴 흉터인지 궁금해서.”
사실 그런 것쯤이야 아르사크가 궁금할 일은 없었다. 뱀뿐만 아니라 다른 짐승이 만든 흉터도 아르사크는 수없이 많이 봐 왔다. 부족민 중에서 그런 흉터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오히려 드물 지경이었으니까.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옆에 앉기까지 하자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아르사크가 갑자기 왜 이러는지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흉터를 보여주려면 셔츠를 벗어야 할 테고, 이런 시간에, 이런 장소에서 자신이 옷 벗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좋아.”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와 앉았다.
셔츠 단추로 손을 가져가면서,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눈치를 살피듯 시선을 약간 들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빨리 벗지 않고 뭐 하느냐는 표정으로 에리히를 보고 있었다.
에리히는 여전히 반쯤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그리고 반쯤은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으로 셔츠의 단추를 위에서부터 차례로 풀어 내렸다.
단정하게 다물려 있던 앞섶이 조금씩 벌어지고 살갗이 드러났다. 어깨에 걸쳐져 있던 양쪽 깃을 끌어내린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볼 수 있도록 몸을 약간 돌렸다.
“보이지?”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이는 대신 흉터 위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생각보다 훨씬 큰 흉터였다. 살이 거의 찢어졌다가 다시 붙은 듯, 물린 자리 바깥으로도 새 살이 돋았던 흔적이 길게 보였다.
“대체 어떤 뱀이었던 거예요?”
“글쎄, 이름은 잘 모르지만 독이 있었어. 그래서 칼로 살을 째야 했지.”
“어쩌다가요?”
“사냥터 숲에 들어가서 놀다가.”
지금이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지만 당시에는 목숨이 오락가락했을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다. 당시 그를 돌보던 시종이 몰래 따라 나와 살피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 것이다.
“몰래 나가는 걸 좋아하셨던 모양이로군요. 야시장도 다녀오시고.”
“안 그런 애들이 있나?”
아르사크는 입술을 움직여 웃고는 흉터 위로 손끝을 가져갔다.
불에 단 것처럼 뜨거운 감각이 살갗 위를 오락가락하는 기분에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엄지 끄트머리가 길게 이어진 흉터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아르사크가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에리히의 얼굴은 거의 맞닿을 듯이 가까이에 있었다. 애매하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시선은 아래쪽으로 향했다.
얕은 숨을 내쉴 정도로만 살짝 벌어진 입술이 보였다. 서로의 목울대가 천천히 들썩였다. 이 기분도, 그리고 감각도, 어느 것 하나 낯설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부딪힐 것처럼 가까이 있던 입술은 희미하게 숨이 가빠진 순간 동시에 멀어졌다.
아르사크가 먼저 에리히의 어깨에서 손을 떼었고, 에리히 역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셔츠의 단추를 다시 잠갔다. 불빛을 받아 따뜻한 색을 띤 채 드러났던 살갗은 이제 보이지 않았다.
“밤이 늦었어.”
에리히가 말했다. 고개를 끄덕인 아르사크는 이불도 덮지 않은 채 침대 위로 몸을 길게 누인 뒤 곧 눈을 감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던 에리히는 입술 위를 손바닥으로 문지르고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금 전 있었던 일의 의미를 그는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아르사크 역시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서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에 단순히 기뻐할 수 없었다.
생각을 넘어 행동으로 옮기는 순간 모든 일이 꼬여버릴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만은 원치 않았다.
에리히는 갑작스런 피로를 느끼며 침대에 누웠다. 가슴 위에 돌이 얹힌 것처럼, 숨 쉬는 것이 이상하게 힘이 들었다.
58장 모략 (1)
홀드빅 자작이 주최한 만찬 자리에 모인 귀족들은 하나같이 아르사크에 대한 소문을 떠들어댔다.
자작이 흡족함을 느끼기에는 충분할 만큼,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나갔다. 그중에서도 생각지도 못했던 수확은 다름 아닌 황궁에서 나온 새로운 소식이었다.
문제의 돌인지 무엇인지가 생각보다 더 큰 의미가 아니겠느냐는 소문이었는데, 황후를 모시는 시녀들 사이에서 흘러나온 말이라고 했다.
개중에는 안쪽에 편지가 숨겨져 있었다더라 하는, 어린애나 속일 수 있을 만한 터무니없는 말도 섞여 있었지만, 어차피 그 자리에 모인 이들에게 진위 여부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건 황실의 수치입니다. 지금까지 어떤 황후도 이런 추문에 휩싸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좀 이상하지 않아요? 비터 자작은 아들이 결코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자가 아닌데…….”
“아직도 그런 소릴. 이건 비터 자작이나 그 아들의 인성과는 무관한 일이오. 중요한 것은 국가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황후가 자신의 위치를 망각하고 부적절한 언행을 일삼는다는 것이지.”
응접실에 모인 귀족들이 저마다 옥신각신하며 논쟁하는 사이, 홀드빅은 술잔을 든 채 한쪽 의자에 앉아 그 광경을 관망하고 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귀족들의 가지각색이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는 부류들이라 식탁에 처음 앉았을 때는 어색한 침묵마저 돌았다.
지위도, 가문도, 성격도, 심지어 정치색까지도 각자 다른 귀족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보니 정작 주최자인 홀드빅은 별달리 나설 자리가 없었다. 그가 노린 것은 바로 그 점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무슨 말이 나오든 날 찾아내기는 힘들 거란 말이지. 잘나 빠진 황제의 얄팍한 수작질도 곧 끝난단 말씀이야.’
“아무튼 무슨 수를 내야 합니다. 이런 일을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로덴 남작, 좀 진정해 보시오. 아직 어떤 증거도 없지 않소? 이런 뜬소문만으로 다른 사람도 아닌 황후 마마를 어쩌자는 겁니까?”
“그럼 백작님은 이 문제를 이대로 덮어두어야 한다는 말씀이세요?”
“아니, 덮어두자는 것이 아니라 내 말은……!”
“자, 진정들 하세요. 다투려고 여러분들을 초청한 것이 아니니까.”
주최자인 홀드빅의 말에 서로 언성을 높이던 손님들이 일시에 조용해졌다.
더러는 머쓱한 표정을 짓거나 사과하는 몸짓을 보이기도 했지만, 자작과 평소 친분이 없었거나 정치적으로 부딪치는 입장이었던 사람들은 불쾌한 듯한 콧방귀 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자작은 겉으로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최근 수도에 떠도는 소문에 대해서는 저도 조금 들은 바가 있습니다. 워낙 시끌시끌해야 말이죠……. 그러나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하는 계층입니다. 평민들의 술집에서나 며칠 떠들고 지나갈 만한 증거도 없는 소문을, 굳이 우리까지 떠들며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 먹칠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안 그래요?”
홀드빅의 말을 들은 이들은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침묵이 반드시 그의 말에 동의하거나, 또는 양심의 가책을 느껴서라고는 할 수 없었다.
정치 성향이나 지위는 다르더라도, 최소한 그곳에 모인 이들 중 홀드빅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작께서 그런 말을 하시다니 이것 참, 의외로군요. 언제부터 그렇게 폐하께 충성하셨습니까?”
“로덴 남작, 그건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오?”
공기가 순식간에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적어도 사람들이 느끼기에는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