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소문이 신경 쓰이지는 않나?”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 신경 쓸 필요가 없죠.”
대수로울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듯이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멀찍이서 흔들리는 석류나무의 가지들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에셴을 시켜 소문의 배후를 찾고 있다는 사실은 아르사크에게 아직 말하지 않았다. 일이 해결될 때까지 그는 앞으로도 말할 생각이 없었다.
아르사크가 소문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쓰거나 속상해한다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은근슬쩍 그런 사정을 내비쳤겠으나, 그렇지 않다면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반대로 아르사크 역시도 루이제를 이용해 배후를 찾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에리히에게 말하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루이제가 쉽사리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믿고 있었으나 에리히에게 그것을 납득시키려면 꽤 힘이 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알아보았나?”
“예, 테오도르 님. 조사를 해보던 중 미심쩍은 점이 있었습니다.”
지휘관의 말에 테오도르의 인상이 순식간에 굳었다. 지휘관은 주변을 살피듯이 천천히 시선을 움직이고는 목소리를 약간 낮추어 말했다.
“병사들이 말하길, 요즘 킨달이라는 자가 최근 거동이 수상했다고 합니다.”
“킨달? 처음 듣는 이름이군. 귀족의 자제가 아니지?”
“예, 평민 출신입니다. 평범하게 생활하던 자였는데, 네페에서 돌아온 이후 부쩍 외출이나 휴가, 외박이 잦아지고 술에 취해 복귀하는 날이 많았다고 합니다. 동료 병사들과 술을 마시면서도 한몫을 크게 잡아 수도를 뜰 것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한몫을 잡다니, 도박판에 드나드는 자인가?”
“그렇습니다. 평소에도 이따금 재미 삼아 도박을 자주 하긴 했지만, 요즘은 휴가를 얻어 거의 매일 도박을 하러 간다고 하더군요.”
“일반 병사의 월급으로 매일같이 도박판을 드나들기란 쉽지 않지. 어딘가 돈이 솟아날 구멍이 있거나, 도박을 할 때마다 이기는 운이 있다면 모를까… 어느 쪽이든 수상하다는 건 분명해. 그자가 드나드는 도박판이 어디인지 알아보도록 해. 도박할 돈이 어디서 났는지도.”
“알겠습니다.”
지휘관은 뻣뻣한 자세로 절을 하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굳은 얼굴로 서 있다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올렸다.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뒷맛이 찜찜했다. 애당초 그 황당한 헛소문을 추적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테오도르는 알 수 없는 불길한 기분에 시달렸다. 단지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자들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기에는 일이 돌아가는 모양이 영 납득이 되지 않았다.
만약 킨달이라는 자가 누군가에게서 거금을 받았고, 그 돈으로 도박을 하러 드나드는 것이라면?
평소에는 평범한 병사였다는 점도 의심스러웠다. 그 정도로 도박에 중독된 자가 몇 년씩 병사로 버틸 수 있을 리 없었다. 마음대로 드나들 자유도 없는 이런 곳에서.
그가 정보를 넘기는 대가로 누군가에게서 거금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킨달을 잡아 심문해야만 했다. 돈을 준 자를 알아낸다면, 누가 소문을 퍼뜨렸는지도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배후가 누구든, 이 소문을 퍼뜨려서 대체 얻는 것이 뭘까? 단지 아르사크 님의 평판을 망치기 위해서 이렇게 위험하고 번거로운 일을 한다는 말인가? 이해가 안 되는걸…….’
테오도르는 고민에 빠진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57장 이상한 일 (6)
아르사크가 카툴라 제국에 머물며 마음에 드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었다.
유목민들은 식량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재료 자체가 적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고서는 요리의 종류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특히 이동이 거의 불가능한 겨울이면 더욱더 식량이 부족했다. 어려운 시기에는 한 계절 내내 빵과 얼마 안 되는 수렵육으로만 버텨야 하는 시기도 있었다.
그런 음식들이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사람의 혀라는 건 맛있는 음식을 반기기 마련이다.
독특하고 달콤한 맛이 나는 치즈 타르트를 먹던 아르사크는 가볍게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뒤에 서 있던 시종이 다가오려 하자 에리히는 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지?”
“이 타르트에 뭐가 들어갔는지 궁금해서요. 처음 먹어보는 맛이 나는데.”
에리히는 먹고 있던 타르트를 내려다보고는 말했다.
“딱총나무 꽃이야.”
“그래요? 그걸로 타르트를 만들다니, 생각도 못 해봤네요.”
“토르갈에서는 낯선 꽃인가?”
“어떤 것인지 알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말려 두었다가 차로 끓여서 약으로 사용해요.”
이따금 산과 가까운 지역에서 계절을 날 때면 아이들은 다람쥐처럼 골짜기를 돌아다니며 약초를 모았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 마른 풀로 엮은 자리를 깔고 그 위에 약초를 널어 말리던 광경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딱총나무 꽃으로 끓인 차는 감기에 좋았다.
“날씨가 추워져서 기침을 하는 아이들이 있으면 어른들이 이 꽃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게 했죠.”
“그럼 꽃이 핀 김에 걷어다 말려 두라고 해야겠군.”
“감기에 잘 걸리시나요?”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르사크가 고향에서 마시던 차라는 말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사소한 배려에 아르사크는 놀라움과, 그리고 약간의 고마움을 느꼈다.
“요즘은 두 분이 덜 다투시네요.”
물에 젖은 아르사크의 어깨를 부드러운 천으로 닦아주며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우윳빛으로 뿌연 물을 손으로 휘젓다가 그녀를 흘긋 돌아보았다.
“그렇게 생각해?”
“네. 생각하는 게 아니라 확실히 그러신걸요. 뭔가 이유가 있으신가요?”
아르사크는 물속으로 몸을 좀 더 깊이 잠그며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
에리히에 대한 감정이 크게 달라졌다고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씹어 먹을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던 첨예한 분노는 어느 순간엔가 무뎌지고 애매하게 흐려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를 갑작스럽게 사랑하게 되지도 않았다.
다만 최근에 둘이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잦아졌고, 그때마다 언성을 높이는 일이 드물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여전히 서로 폭언인지 뭔지 모를 말을 대화랍시고 주고받기는 했으나, 처음 만났을 때 둘의 분위기가 어땠는지 알고 있는 로즈안나로서는 새삼스럽다고 할 만한 변화였다.
“요즘 폐하와 아르사크 님의 관계로 봐서는, 꼭…….”
로즈안나가 눈치를 보듯 말끝을 흐리자, 아르사크는 덤덤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꼭, 뭐?”
“진짜 부부 같습니다.”
망설이다 비밀을 털어놓듯이 로즈안나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영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으나 로즈안나를 나무라지는 않았다.
요즘에 와서는 아르사크조차도, 이 관계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깜빡 잊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아르사크의 눈앞에는 티리야의 우는 얼굴이 떠올랐다. 흘긋거리며 쳐다보는 것을 견딜 수 없다던 티리야. 아르사크는 도무지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로즈, 너 정말 나랑 같이 안 갈래?”
“자치구로요?”
“그래. 그렇게 나쁘지는 않을 거야.”
전에도 아르사크는 같은 말을 했었다. 그때는 농담에 더 가까웠지만, 지금은 진심에 좀 더 가까워져 있었다.
로즈안나는 아르사크에 대해 이제 너무나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토르갈이 소중한 만큼, 로즈안나 자신도 아르사크에게 그런 비슷한 존재가 되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르사크 님께서 떠나시는 날까지 고민은 해보겠습니다.”
“그래. 한번 생각해 봐. 네가 날 따라간다면, 난 무슨 일이 있어도 널 돌봐줄 테니까.”
그런 말은 오히려 자신이 아니라 에리히에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닌지. 로즈안나는 살짝 안쓰러운 기분을 느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침실 정리를 마친 시녀가 절을 하고 나갔다. 비스듬히 닫히는 문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린 아르사크는 시녀와 엇갈리듯 방 안으로 들어오던 에리히와 눈이 마주쳤다.
요즘 들어서는 별로 놀라울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아르사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듯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신가요?”
“미리 기별해야 할 만큼 귀하신 분이라는 걸 잊었군.”
빈정거리듯이 대꾸한 에리히가 아르사크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곁에 서 있는 로즈안나의 손에 들린 빗을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할 테니 너는 가서 쉬어도 된다.”
“예? 아닙니다, 폐하. 아르사크 님의 시중을 마칠 때까지 잠시…….”
“괜찮다니까. 이리 줘.”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던 로즈안나는 아르사크가 허락하듯 눈짓을 보내자 에리히에게 빗을 건넸다.
“그럼, 편안히 주무십시오.”
“너도 잘 자, 로즈.”
아르사크가 말했다. 조용히 문을 닫고 방을 나서던 로즈안나는 몇 걸음을 못 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잠깐 고민하다가, 머리를 흔들며 자신의 숙소로 향했다.
“하다 하다 로즈안나까지 나쁜 물을 들여?”
아르사크는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듯한 눈으로 고개를 돌리려 했다. 그러나 에리히가 빗질을 하느라 머리칼을 쥐고 있어 그러지 못했다.
“대체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내 말은 안 듣고 그대의 말만 듣잖아.”
“절 더 좋아하니까 당연하지요.”
“그 근거도 없는 자신감은 종류를 가리지 않는군.”
“어디로 보나 폐하보다는 제가 낫지요.”
“대체 왜?”
“그야 당신은 못됐으니까.”
아르사크의 당당한 대답에 에리히는 헛웃음을 쳤다.
“살다 보니 별말을 다 듣는군.”
“다들 목이 날아갈까 무서워서 말을 못 하는 거지,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걸요.”
“그래서 본인은 목이 날아가는 게 무섭지 않으시다?”
“이제 와서 내 목을 벨 것이었다면 진작에 하셨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