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당당하게 말하는군.”
에리히의 손끝이 틀어 올린 머리타래에 와 닿았다. 가장 눈에 잘 띄는 자리에 꽂은 머리핀은 요즈음 늘 그랬듯 튈브리크에서 산 싸구려 머리핀이었다.
어마어마한 값을 치러야 하는 장신구가 그토록 많건만,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눈에 보이는 내내 그 머리핀을 꽂고 있었다. 의도한 것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으나.
“당당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요?”
“노닥거린 건 사실이긴 하잖아.”
“또 시작이네.”
“뭐가 또 시작이야?”
“네페에서도 같은 말씀을 하셨잖아요? ‘외간 남자와 노닥거린다.’고요.”
“여전히 아니라고 주장하는 건가?”
“폐하께서 몸소 질투까지 해주시니 기대에 부응해 드릴까요?”
에리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던 아르사크도 비슷한 표정으로 웃음을 띠었다.
머리핀의 유리 장식을 만지작거리던 에리히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아르사크는 그의 손끝이 자신의 귓가를 스치는 감각을 느꼈다.
“그럴 생각도 없잖아. 게다가 그럴 재주도 없지.”
“지금 저더러 매력 없다는 말을 하시는 건가요?”
“그야 안장도 없이 말을 모는 천방지축이니까.”
“그 천방지축을 아내로 두고 있는 사람은 바로 폐하시고요.”
기간이 정해진 관계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일부러였는지, 아니면 잊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에리히는 손끝으로 아르사크의 턱을 가볍게 쥔 채 고개를 살짝 젖히게 했다. 당돌하게도 바라보는 눈동자는 흔들림도, 분노도, 당황한 기색도 없었다. 그 무미건조함이 오히려 만족스러웠다.
“어떤 놈 눈에 콩깍지가 덮였는지 정말 궁금해. 아마 놈의 눈에는 그대가 어지간히 매력적으로 보였던 모양이지?”
“그러니까 폐하는 소문을 전혀 믿지 않으신다는 거군요.”
“내가 의심하길 바라?”
“질투에 눈이 먼 폭군으로 기록되고 싶으시다면.”
에리히가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웃고 있다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아르사크만이 알 수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다시 고개를 든 에리히의 얼굴에는 아직 덜 가신 미소가 남아있었다. 움찔거리는 입가를 문지르면서 에리히가 말했다.
“내가 질투하지 않아서 다행인 줄이나 알아.”
“그건 또 왜요?”
“진짜로 질투했더라면 그대는 지금쯤 방 안에 갇혀 있을 테니까.”
“제가 뭘로 창문을 깨트리는지 내기라도 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좋은 방법은 아닌 것 같군요.”
“고작 창문을 깬다고? 문을 부수고 날 죽이러 오겠지.”
“그걸 알고 계신다니 다행이네요.”
56장 이상한 일 (5)
꽃이 만발한 정원은 오색의 바다처럼 황홀하게 아름다웠지만 아르사크는 그다지 호들갑스럽지는 않았다. 수많은 꽃이 넘실거리는 광경보다는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찬찬히 들여다보는 것을 즐겼다.
석화를 보며 반가워하는 아르사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에리히가 물었다.
“좋아하는 꽃이 있나?”
아르사크는 튼튼하게 맺힌 꽃송이를 살짝 만져보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특별히 좋아하는 꽃을 물으시는 건가요?”
“그렇지.”
“글쎄요, 꽃은 저마다 제각각의 생김이 다르고 향기도 다르죠. 약으로 쓰느냐, 독으로 쓰느냐도 다르고, 어떤 꽃은 십 년에 단 하루를 피는가 하면 어떤 꽃은 사시사철 시들지 않기도 하고요. 그러니 특별히 어떤 꽃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군요.”
에리히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눈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다니. 하긴, 아르사크야 에리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알 수도 없을 테고, 높은 확률로 관심도 없을 테니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아르사크는 무성하게 피어난 겹장미들을 바라보다가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그늘 가에도 마치 눈치를 보는 어린애들처럼 조그만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정원사의 눈에 띄었다가는 어쩌면 뽑혀 나갈지도 모르는 들꽃이지만 아르사크의 말대로 저마다의 생김이 있었고 저마다의 향기가 있었다.
“그럼 폐하는요?”
아르사크가 몸을 돌리며 물었다.
“뭐가 말이지?”
“폐하께서는 특별히 좋아하는 꽃이 있으신가요?”
잠시 고민하던 에리히는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를 따라 제라늄이나 장미를 좋아했다. 유레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자두나무에 피는 꽃이 좋았다. 별궁 뒤뜰에 있는 자두나무는 여동생인 유레나가 가장 좋아하는 나무였다.
모두가 차례차례 세상을 저버리고 난 후로 에리히는 한 번도 꽃을 가까이한 적이 없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보고 있던 장미 나무 아래의 들꽃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옥수수 낟알을 터뜨려놓은 것처럼 하얗고 오밀조밀한 꽃들이 햇빛을 향해 고개를 내민 채 파르르 떨었다.
연한 줄기 하나를 소리도 없이 꺾은 순간, 갑자기 에리히의 몸이 뒤로 넘어질 것처럼 다급하게 휘청거렸다. 뒤따르던 시종이 기겁을 하며 가까스로 그의 어깨를 받친 순간, 아르사크의 손이 번개같이 앞으로 뻗쳤다.
“안 돼!”
에리히가 버럭 소리를 지른 순간, 뒤따르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아르사크에게로 쏠렸다. 그리고 이내 낮은 비명 소리가 웅성거리듯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정작 아르사크는 별일 아니라는 듯한 태연한 표정으로 쉿쉿 거리는 뱀의 턱 아래를 누른 채 목을 쥐고 있었다. 꿈틀거리는 뱀이 팔뚝을 휘감자 아르사크는 태연자약하게 그것을 풀어내면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이 뱀은 독이 없는 뱀이니 괜찮습니다.”
“…독이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야. 당장 내려놔.”
“내려놓으면 또 정원을 헤집고 다니다 폐하를 놀래킬 텐데요?”
뱀의 머리는 작았다. 하지만 몸통이 길쭉하고 비늘이 튼튼한 것으로 보아 이미 성체인 듯했다. 녹색과 노란색이 기이하게 뒤섞인 뱀을, 에리히는 차마 쳐다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짓궂은 웃음을 입가에 실룩이면서 에리히를 힐끔 바라보았다.
“폐하, 뱀이 무서우세요?”
“…됐으니까 좀 치워.”
시종들이 허둥지둥 뚜껑 달린 바구니를 가지고 뛰어왔다. 아르사크는 그 안에 뱀을 풀어주고는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그렇게 겁내실 것까지야.”
“제정신인가? 독이 있어서 물리기라도 하면 어쩔 작정이었어?”
“이런 곳에 그렇게 위험한 뱀이 돌아다닐 리 없지요. 누가 일부러 풀어놓은 것이라면 또 모를까요.”
뱀은 이미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에리히는 여전히 속이 좋지 않은 표정이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아르사크는 곧 폭소를 터뜨리기 직전인 표정으로 뱀을 잡았던 쪽의 손을 불쑥 내밀었다.
저도 모르게 발을 움찔 물리려던 에리히는 싸늘하게 굳은 표정을 하고 아르사크를 쳐다보았지만, 그녀는 능청스럽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손 좀 잡아주시겠어요? 다정한 산책을 좀 해보죠.”
“지금 장난해?”
“장난이라뇨? 그렇게 서운한 말씀을 하시다니. 모처럼 날씨 좋을 때 하는 산책이니 다정하게 손 좀 잡아도 나쁠 것 없잖아요.”
“지금…….”
울컥한 표정으로 뭐라 반박하려던 에리히는 뒤에 늘어선 시종들을 흘끔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누가 봐도 아르사크가 짓궂게 굴고 있는 짓임을 알 상황이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데서 그녀에게 언성을 높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나날이 허무맹랑한 방향으로만 소문이 퍼져 나가고 있는 마당이다.
찜찜한 표정으로 손을 바라보던 에리히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아르사크를 노려보며 그녀의 손끝만 살짝 잡았다. 에리히의 손이 손마디 위쪽을 닿을 듯 말 듯 감싸자마자 아르사크는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그렇게나 무서워요? 고작 뱀인데?”
“그걸 맨손으로 잡는 그대가 더 이상하다는 생각은 안 하나?”
“예전에 말씀드린 적이 있지요. 전 살아 있는 건 뭐든 잡을 수 있다고요. 그러니 당연히 뱀도 잡을 수 있지 않겠어요?”
“대단한 사냥꾼 나셨군.”
“소르흐에게 먹이로나 주라고 할걸.”
에리히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난다는 듯이 어깨를 가볍게 떨면서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뭘 그런 걸 먹이려고 해?”
“왜요? 매들은 뱀도 곧잘 잡아먹는걸요.”
소르흐는 길들여 키우는 매지, 숲속을 돌아다니는 야생 매가 아니지 않느냐는 말을 하려다 그만둔 에리히는 콧방귀를 뀌면서 아르사크의 손을 당겨 잡았다. 손바닥과 손바닥이 서로 포개지듯 맞물렸다.
“왜 그렇게 뱀을 무서워하시나요? 뱀한테 물리기라도 했어요?”
놀리려고 한 소리였는데 뜻밖에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사크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얼굴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정말로? 언제요?”
“여덟 살 때쯤.”
“아주 예전의 일이네요.”
“하지만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나거든. 놀라서 뒤로 넘어졌다가 달려든 뱀에게 어깨를 물렸지. 상처가 꽤 깊어서 아직도 흉터가 남아있어.”
그 정도면 두고두고 겁낼 만도 한 경험이다. 이번에는 아르사크도 웃지 않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이 뱀에 물려 죽는 사고는 유목민들 사이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사고였다. 특히 사막이나 초원 바깥 지대에 사는 뱀들은 십중팔구 독이 있는 경우가 많아서, 걸음 한번 잘못 내디뎠다가 그대로 쓰러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의 수가 매년 꽤 되었다.
예닐곱 살 난 어린애들은 뱀을 보고도 장난을 치려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어른들은 항상 아이들에게 뱀을 보면 돌을 던지거나 나뭇가지로 찌를 생각일랑 말고 최대한 조용히 피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런데 궁의 정원에 웬 뱀일까요?”
“헤매다 들어갔겠지. 장미 나무 아래는 그늘이 많아서 시원하니까.”
둘은 잠시 손을 잡고 말없이 걸었다. 무심코 고개를 내렸던 아르사크는 그와 여전히 손을 맞잡고 있었다는 사실을 여태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걷는 감각은 여전히 익숙하지가 않다. 그러나 에리히와 손을 잡고 걷는 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