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75화 (75/191)

75화

마티타는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지만, 모처럼 신난 친구들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이야기를 계속 듣다 보니 그들의 말이 그럴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고작 며칠 머물면서 검술을 가르쳐준 것만으로 그렇게 귀한 것을 덥석 주다니. 차라리 흔해빠진 다른 보석이나 장신구였으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게다가 그 아름다운 수정이 보이지 않도록 숨겨진 채 선물한 것도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 영주의 아들이라는 사람은 정말로 황후 마마를 비밀리에 사랑한 게 아니었을까?

“아, 나도 그런 선물 한번 받아보면 좋겠다.”

“꿈 깨라. 네가 황후 마마가 된다면 또 모를까.”

“나도 얼른 결혼하고 싶어. 열아홉 살이 되면 난 곧장 일을 관두고 궁을 나갈 거야. 그리고 나만 좋다는 사람을 찾아서 멋지게 청혼을 받아야지.”

“청혼을 네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거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계집애, 맨날 시비나 걸고.”

투닥거리는 소리와 깔깔대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이윽고 소란을 듣고 달려온 당직 시녀장이 한바탕 호통을 치고서야 그들은 얌전히 침대 속으로 들어갔다.

마티타는 한껏 로맨틱한 기분에 젖어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불안한 표정으로 몸을 뒤척였다. 다른 시녀들도 이 소문에 대해 모두들 알고 있을 것이다.

황후의 측근 시녀라고 해도, 궁 안에서 다른 일을 맡은 시녀들과 뒤섞여 방을 사용하니 어쩌면 내일 아침에는 거의 모든 시녀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설마… 이 소문 때문에 마마께서 곤란해지시진 않겠지?’

마티타는 이불깃을 슬그머니 쥐어뜯었다. 물론 아르사크가 다른 남자를 정부로 두는, 그런 짓을 할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소문이란 언제나 사실과 다른 길로만 가는 것이 아닌가…….

‘아냐, 아니야! 괜찮을 거야. 좀 예쁜 돌인걸, 뭐. 반지 같은 것이었으면 또 모를까. 아무 일도 아닐 거야. 다들 며칠 떠들다 조용해질걸.’

그러기를 바랐다. 마티타는 애써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흔들며 눈을 감았다. 그래야만 했다.

55장 이상한 일 (4)

에셴의 저택을 드나드는 야채 도매상의 심부름꾼 소년은 공교롭게도 딜라이라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중 한 명과 아는 사이였다. 반일의 휴가를 얻어 집에 왔던 하녀가 가족들이나 이웃들에게 황후에 대한 소문을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심부름꾼 소년의 도움을 받아, 에셴은 비밀리에 그 하녀를 만날 수 있었다. 양 뺨에 주근깨가 송송 박힌 앳된 아가씨였다.

“샬롯이 그런 말을 하는 걸 들었어요. 그 애는 휴일이면 종종 외출을 해서 애인을 만나곤 했는데, 주로 별 볼 일 없는 예술가들이었죠. 아무튼 요새는 자주 만나는 극작가 한 명만 있었는데, 그 사람의 이름이 뭐더라……? 어쨌거나, 샬롯은 그 소문을 그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했어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비둘기 부리>라는 술집이 있는데, 거의 매일 거기에 있으니 가보시면 아마 만날 수 있을걸요?”

<비둘기 부리>에서 극작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지저분하고 흐트러진 머리에 잉크 자국이 얼룩덜룩하게 묻은 셔츠, 가장 구석진 테이블에 어깨를 웅크리고 앉은 채 쉼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깃펜을 움직이는 자를 찾으니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는 에셴으로부터 샬롯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마자 덩치에 맞잖게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우린 정말 사랑했어요……. 샬롯이야말로 내 작품의 영감이었는데. 그녀가 떠났으니 이제 난 두 번 다시 글을 쓸 수 없을 거예요. 작가로서의 인생이 끝난 거죠. 이제야 빛을 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내가 쓴 작품이 대극장에 서는 날 청혼하려고 했는데…….”

“그 아가씨의 고향이 어디인지는 알고 있나요?”

“알면 이러고 있겠습니까? 아는 것이라곤 그녀가 피먼 자작가의 하녀라는 것과 이름뿐이었는데요. 아, 샬롯…….”

그가 하도 꼴사납게 징징대는 바람에 에셴은 저도 모르게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꾹 쥐었다. 소문에 대한 것을 물어보자, 그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 소문은 자신도 샬롯에게 처음 들었다는 것이었다.

“당신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는 얘긴가요?”

“네……. 저는 보다시피 하루 먹고살기도 빠듯해서, 그런 헛소문이나 듣고 다닐 여력이 없습니다. 매일 여기에 눌러살다시피 하는데, 여길 드나드는 주정뱅이는 죄다 그 얼굴이 그 얼굴이죠. 샬롯이 내게 말해주었어요. 극에 써보려고 했지만, 혹시나…….”

“당연히, 그 내용으로 극을 쓰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겠군요.”

에셴은 그에게 금화 한 닢을 선사한 뒤 술집을 나섰다. 이야기의 앞뒤가 맞지 않았다.

피먼 자작가의 하녀는 샬롯이 누군가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했는데, 샬롯이 만났다는 극작가는 그 이야기를 또 샬롯에게서 들었다고 한다. 그럼 샬롯이 소문을 처음 퍼뜨린 당사자란 말인가?

“잠시만요! 부인!”

마차에 오르려던 에셴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살짝 돌렸다. 햇빛 아래에서 보니 극작가의 꼴은 더욱 초라했다. 그는 엉망으로 헝클어진 뒷머리를 벅벅 문지르다가 어두워진 표정으로 말했다.

“실은… 샬롯에게는 저 말고도 만나는 남자가 있었어요. 다른 사람에게서 들었다고 말했으니… 아마 그 남자에게서 들은 것이 아닐까 싶네요.”

“아까는 왜 그런 말을 하지 않았어요?”

“그게… 그러니까, 샬롯은 제 영감의 원천이었지만… 하지만 저는 그냥 샬롯에게 있어서… 뭐라고 할까…….”

“심심풀이였다고요?”

너무 직설적인 말이었는지, 극작가의 어깨가 시무룩하게 처졌다. 그가 말했다.

“샬롯은 저처럼 가난한 작가와 진심으로 미래를 꿈꿀 만한 사람은 아니었죠. 저도 알고 있었지만 그녀를 너무 사랑해서… 아니, 요점은 이게 아니라… 아무튼 샬롯은 휴가를 얻어서 외출하면 항상 그 사람을 먼저 만나고, 그다음에 저를 만나러 왔어요. 그 소문을 이야기해 준 날도 그랬지요.”

“당신은 그걸 어떻게 알고요?”

“향수 냄새가 납니다. 샬롯은 향수를 뿌리지 않지만, 그 남자를 만나고 온 날은 독특한 향수 냄새가 항상 났어요. 그래서 늘 알 수 있었죠. <라트의 정원>이라는 향수 가게 아시죠? 그 향수 가게에서 파는 ‘녹나무의 신’이라는 이름의 향수예요. 그 냄새가 났어요.”

‘녹나무의 신’이라는 향수는 에셴도 잘 알고 있는 향수였다. 주로 귀족 신사들 사이에서 유명한 향수였는데, 향기가 독특해서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에셴도 그 향수를 즐겨 쓰는 이들을 몇 명 알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남자들은 향수를 사용하는 경우가 적다 보니 아는 대로 헤아려 보아도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귀족이 하녀를 만나는 일이 그리 드문 일은 아니다. 그러나 외부에서까지 만남을 유지할 만큼 깊은 사이가 될 수는 없었다. 만약 귀족 중 누군가 피먼 자작가의 하녀와 바깥에서 데이트를 했다면 에셴도 진작에 알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의 사실을 보고받은 에리히는 두 가지 가정을 세웠다. 첫 번째는 샬롯이 만나던 남자가 진짜로 귀족일 가능성, 두 번째는 귀족의 최측근, 특히 집사나 시종들처럼 남들 앞에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 주인을 위해 비밀리에 정보 수집을 하는 인물일 가능성이었다.

상대방에게까지 향이 옮을 만큼 향수를 넉넉히 사용한다면, 늘 저택 내부에서 일해야 하는 집사나 시종은 걸맞지 않았다.

또한 샬롯이 휴가를 낼 때마다 그를 만났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았을 때, 그는 어느 한 곳에 매인 채 계속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향수는 가격이 비싼 제품이다. 이만저만 사정이 넉넉하지 않고서야 그토록 사치스럽게 사용할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추리는 거기서 막히고 말았다. 만약 귀족이라면 그래도 이야기가 쉽겠지만, 귀족의 측근이라면 조사할 길이 막막해지는 것이다. 그나마 그 정도의 실마리를 잡았으니, 이제는 테오도르의 보고를 기다릴 차례였다.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다 보니, 조사를 하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새 날씨가 많이 더워졌군.”

에리히와 아르사크는 산책을 하고 있었다. 아직 햇볕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의 온도가 부쩍 높아진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머리를 틀어 올려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손등으로 짚었다.

“물가에 가면 좋을 만한 날씨로군요.”

“물놀이를 해본 적이 있나?”

“많지는 않습니다. 이따금 호수가 있는 곳 근처에 머물 때도 있었지만, 대개 너무 깊어서 물놀이를 하러 들어갈 순 없었죠.”

“수영은 할 줄 모르겠군.”

“폐하께선 수영을 잘하시나요?”

“빠져 죽지 않을 정도로는 하지.”

“아하, 절 이길 수 있는 걸 드디어 찾아내셨네요.”

아르사크가 픽 웃으며 말했다. 에리히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만개한 장미와 작약들을 천천히 살폈다.

황궁의 정원은 어디나 아름답지만, 남쪽에 위치한 별궁의 정원은 특히 화려했다. 주로 작은 무도회를 열 때 사용하는 궁이었는데, 귀족들과의 모임을 주도하는 것은 황후의 소관이었으므로 아르사크가 황후가 된 이후로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는 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은 계절에 맞는 꽃들로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었고, 희고 까끌까끌한 돌로 세워놓은 조각상과 분수대에서는 깨끗한 물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요즘 이상한 이야기가 돌아다닌다는 말을 들은 적 있나?”

풍성하게 벌어진 작약의 꽃잎을 어루만지던 아르사크가 고개를 흘긋 돌려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그가 작금의 소문을 언급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언제고 말이 나오리라는 건 당연한 일이었으므로 그다지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틀림없이 빈정거릴 것이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에리히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모른 척 고개를 돌리며 작약의 줄기를 손끝으로 천천히 훑었다.

“이상한 이야기라니, 어떤 이야기를 말씀하십니까?”

“그대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소문 말이야.”

아르사크는 숨소리를 흘리듯이 낮게 웃었다. 그리고 에리히를 향해 몸을 똑바로 돌린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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