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했는데?”
“제, 제… 제 옷을 왜 벗겨놓으신 거냐고요!”
아르사크는 루이제가 울먹이다시피 내지르는 소리를 들은 척도 않은 채 로즈안나에게 눈짓을 했다. 곧 나무로 짠 가림막이 루이제와 아르사크 사이를 가로막고, 벗겨두었던 속옷을 가지고 시녀들이 다가왔다.
루이제가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로 묵묵히 시중을 받고 있을 때, 가림막 너머에서 아르사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 걸 입고 뛰어다니니 기절 안 하고 배겨? 이참에 그냥 벗고 다니지 그러니?”
“말도 안 돼요! 숙녀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아, 그걸 입고 다녀야만 숙녀가 될 수 있는 거야? 그건 또 몰랐네.”
길게 말해봐야 본전도 못 찾을 화제라는 것을 루이제는 금세 알아차렸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도, 심지어 황제 앞에서도 버젓이 코르셋을 입지 않은 꼴로 돌아다니는 아르사크인데 이런 논쟁을 해봐야 자신이 불리했다.
루이제는 시녀가 코르셋의 끈을 당기는 동안 힘껏 숨을 참고 눈을 질끈 감았다. 눈을 떴을 때 느꼈던 쾌적한 기분이 사라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림막이 치워졌다. 아르사크와 마주 앉은 루이제는 처음의 그 엉망진창이던 모습은 어디 갔느냐는 듯이 거짓말처럼 새침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민망했는지, 여전히 빨간 귓가만큼은 숨기기 힘들었지만 아르사크는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를 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 그렇게 다급하게 날 찾아온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저, 그게요. 마마, 제가 피먼 자작 부인을 만나서 이야기를 해봤어요. 제가 정말 단호하게 물었지요. 그 발칙한 소문을 퍼뜨린 이유가 뭐며, 어떤 의도로 그랬든…….”
“사족은 그만 달고 결론부터 얘기할래?”
“…그 소문은 피먼 자작 부인이 퍼뜨린 게 아니래요.”
루이제가 빠른 속도로 말했다. 아르사크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럼 누가 퍼뜨린 건데?”
“피먼 자작 부인은… 그 이야기를 하녀에게 들었대요.”
“하녀라고? 그럼 그 하녀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면 되겠네.”
“그거요! 그게, 문제예요. 마마.”
대뜸 목소리를 높였던 루이제는 아차 싶었는지 도로 기어들어 가는 시늉을 하며 아르사크의 눈치를 보았다.
어리다고 봐주려 했던 아르사크도 슬슬 짜증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짜증을 내 위협이라도 한다면 간신히 매어놓은 목줄이 끊어질지도 모른다. 아르사크는 참을성을 발휘하기로 했다.
“그래……. 뭐가 문젠지 말해봐.”
“자작 부인의 말로는 그 하녀의 이름이 샬롯이라고 하는데, 얼마 전에 어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내려갔다고 해요. 그런데 그 하녀의 고향이 어딘지는 자작 부인도 모르고요. 샬롯이라는 이름도 너무 흔하잖아요? 그러니까…….”
“본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지? 그래서 그 하녀를 찾는 게 불가능할 거라는 이야기고?”
“맞아요, 마마. 제가 그 말씀을 드리려고 했어요. 그래서, 이제 저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일이었다. 네페에서 일어났던 일을, 일개 자작가의 하녀가 알고 소문을 퍼뜨렸다고?
아르사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 그 하녀가 마법이라도 부리지 않는 이상에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정말 마법을 부리는 마녀라고 할지라도 일면식도 없는 아르사크에게 뭣 하러 이런 짓을 한단 말인가?
누군가 배후에 있지 않고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다. 아르사크는 그 하녀에게 소문을 흘린 다른 자가 있으리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렇다면 루이제의 말대로 그녀의 역할은 여기서 끝난다. 소문이 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네페에서 새어 나간 것이라면, 루이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아르사크는 모처럼 길들일 기회를 얻은 말괄량이를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로즈안나가 말했던 것처럼, 그리고 에리히가 말했던 것처럼, 자신에게는 기반이 필요했다. 루이제의 아버지가 자신을 쫓아내고 싶어 안달을 하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 딸인 루이제를 끌어들이는 것이야말로 아르사크에게는 최적의 방패가 될 수도 있었다.
“네 말이 무슨 소린지는 잘 알았어.”
“그럼 이제 절 용서해 주시는 거죠?”
“아니, 아직 용서한다는 말은 안 했어. 그 샬롯이라는 하녀를 찾아봐. 자작가의 저택에서 일한 하인들을 잘 털어보면 뭔가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르잖아. 휴일에 누구랑 어울렸는지도 알아보고. 그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만면에 화색이 가득했던 루이제의 얼굴이 물 먹은 종이처럼 도로 구겨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못 한다고 드러누워 떼라도 쓰고 싶었지만 상대는 황후였다. 심지어 만만한 황후도 아니다. 속내야 어떻든, 명령을 받는 이상 죽는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아르사크는 루이제의 오해를 이제 굳이 정정해 주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녀를 죽일 생각 따위야 애초부터 없었지만, 이왕 써먹기로 했으니 그 터무니없는 순진함을 어느 정도 이용해도 별문제가 생길 것 같지는 않았다.
루이제가 황궁에서 두 번째로 기절하고 말 것 같은 순간을 겪고 있을 때, 그녀의 부친인 홀드빅 자작은 막내딸의 고민 따위는 까맣게 모른 채 기분이 좋은 상태였다.
그는 사교계 안에서 소문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왜곡되어 퍼지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 고른 상대가 딜라이라 피먼이었고, 결과적으로 자작의 예상대로 일은 돌아갔다.
혹시나 꼬리를 밟히지 않도록 딜라이라에게 곧장 말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하녀의 입을 거치게 한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제는 거리의 평민들까지도 그 소문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는 측근의 보고를 전해 들은 홀드빅은 황궁 앞뜰에서 한바탕 껄껄대고 웃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국의 황후라는 여자가 꼴좋게 되었군. 천민들 입에까지 오르내리는 신세가 되었으니 말이야.”
“이대로라면 수도 전체에 소문이 퍼지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주인님.”
“피먼 자작이라는 놈, 쥐새끼처럼 이리저리 빠져나가기만 하더니 부인 하나는 잘 뒀군. 그 여자가 촉새처럼 입을 놀려준 덕분에 황궁이 뒤집어지게 생겼으니.”
홀드빅은 다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아르사크가 불명예를 오물처럼 뒤집어쓴 채 초라하게 쫓겨나는 광경이 그려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신의 딸, 모두들 요정 같다 칭송하는 루이제가 되리라. 탐욕스럽게 벌어진 입술이 흐물흐물하게 누그러졌다.
“일이 제대로 돌아간다면 더는 그 늙은이의 잔소리를 들을 필요도 없어지는 거야.”
홀드빅이 중얼거렸다. 옆에 선 측근은 주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얼른 알아듣지 못해 눈만 껌뻑거리고 있다가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그 병사는 어떻게 할까요? 아직까지는 별달리 수상쩍은 움직임이 없습니다만… 혹시라도 남겨두었다가는 후환이 되지 않겠습니까?”
“흠, 꽤 쓸모 있는 놈이었는데.”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네페로 신행을 떠날 때, 홀드빅은 바로 이것이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했다. 모함을 하려 해도 아르사크가 황궁 안에만 틀어박혀 있다시피 하는 이상 그럴싸한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다는 생각만이 홀드빅이 가진 한 가닥 희망이었다. 곧바로 황궁에 사람을 심어 동태를 살펴보니 그 말이 틀린 것 같지 않아 그는 더욱더 계획에 박차를 가했다.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아르사크는 매일 매나 길들이고 있거나 사냥터에서 말을 타는 정도가 일과의 전부라는 것이다. 이럴 때 적절한 문젯거리가 하나만 나타나 준다면… 하고 바랐던 차에, 뜻밖에도 그들이 신행을 떠나기로 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홀드빅은 처음부터 그것이 진짜 신행이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관계는 차치하고서라도 행선지가 네페라니? 어디로 눈을 돌려도 먼지 날리는 바위산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시골바닥으로 무슨 신행을 떠난단 말인가?
아니, 진짜 신행이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황제 부처가 나란히 자리를 비우는 것이었으므로.
그런 의미에서 킨달이라는 그 병사는 매우 일을 잘해주었다고 할 수 있었다. 신행을 떠나는 바로 그날부터 홀드빅의 측근에게 아르사크의 일거수일투족을 모조리 고한 것이다.
좀 더 살려두어도 쓸모가 있겠지만, 가끔은 아깝더라도 버려야 하는 패가 있게 마련이다. 무엇보다도, 황궁으로 돌아온 이상 이제 일개 병사보다는 자유롭게 아르사크의 곁을 드나들 수 있는 루이제가 훨씬 더 유용한 정보를 가져올 가능성이 높았다.
“쓸모는 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정도 정보에 그 값은 좀 과하다 싶군. 거스름돈을 받아 오도록 해. 정중하게 말이야.”
“명을 받들겠습니다.”
허리를 숙이는 측근과 홀드빅의 입가에 동시에 교활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54장 이상한 일 (3)
마티타는 자신이 꽤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늘 하고 있었다.
특별히 근거가 있는 생각은 아니었다. 마티타의 어려운 집안 사정을 안다면 누구도 그녀가 운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마티타는 다른 사람들과는 분명하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마티타가 무척이나 긍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수완도 없이 시골에서 조그만 상점을 운영하던 그녀의 부모님은 마티타가 다섯 살이 되던 해에 기어이 있던 살림을 다 내놓아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가게와 집, 세간살이를 있는 대로 팔아도 빚을 충당할 수 없자 결국 옷가지 몇 장만 싸 들고 수도로 도주했는데, 그 과정에서 아버지는 겨우 얻어 탄 마차에서 굴러떨어졌다가 재수 없게도 파상풍에 걸려 죽고 말았다.
수도에 도착했을 때 이미 홀몸이 된 어머니는 아직 어린 자식 셋을 데리고 튈브리크 근처에서 다 쓰러져 가는 셋방을 구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가게를 돌아다니며 청소를 해주고, 짐을 날라주고, 이따금 귀부인들의 드레스 주문이 밀리는 달에는 옷감을 재단하는 일이나 삯바느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티타의 오빠와 언니도 어린 나이였지만 근처 상점의 견습 종업원으로 일을 하러 나가고, 마티타는 일을 하는 엄마를 따라다니며 길거리에서 혼자 노는 것이 일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