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화
에셴은 잠시 고민했다. 황제나 황실에 대한 충성심이 드높은 것은 사실 아버지나 테오도르 쪽이지, 그녀가 아니었다. 다만 인간으로서 의리를 지킨다면 모를까. 그녀는 목숨을 걸고 맹목적인 충성을 바칠 만큼 카툴라 황실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에셴은 아무것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자기 자신 이외에는. 그 사실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모두에게 적당한 친절을 베풀 수 있었고, 적당한 예의를 차리며 살아가는 것이 가능했다.
그것은 남편인 랜크버 백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자신을 제외하면, 남편을 향한 마음이 그나마 이타적인 사랑에 가깝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게 아내의 도리여서는 결코 아니었다.
만약 에셴이 랜크버 백작과 결혼하지 않고 강아지를 키우기로 결정했다면, 그녀가 이타적인 사랑을 발휘할 대상은 남편이 아닌 강아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폐하께서는 제게 어떤 대가를 약속하시겠습니까?”
“누님!”
듣고 있던 테오도르가 황급히 에셴의 말을 저지하려 했지만 에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에리히도 그녀의 말에 특별히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에셴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조금만 덜 이기적이었다면 아르사크가 아니라 에셴이 황후의 자리에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황후가 되기에, 에셴과 에리히는 그 재질이 비슷해도 너무 비슷한 인간들이었다. 생각만 해도 피곤한 결혼 생활이었으므로, 에리히는 일찌감치 에셴을 이용하려는 수작을 접어버렸던 것이다.
“그대나 그대의 남편은 높은 작위에는 별 관심이 없지요. 광대한 토지나 금은보화도. 그러니 어떤 것을 약속한다 하더라도 그것이 꼭 가치 있는 약속이라는 보장은 할 수 없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약속하지 않겠어요. 단, 언제고 그대가 필요로 하는 것이 생긴다면 무슨 수를 써서든 구해다 주겠습니다.”
“너무 허황된 말씀을 하시네요. 제가 터무니없는 것을 바라면 어쩌시려고요?”
“황제가 되고 싶진 않을 거잖아요. 귀찮으니까.”
“물론이죠. 누가 그런 자리를 탐낸담? 일 년이 지나기도 전에 왕관 때문에 탈모나 생길 텐데요.”
“전 5년째지만 머리는 안 빠졌는데요. 다행인가요?”
“앞으로도 관리를 잘 하세요. 폐하의 능력은 미모의 지분이 상당하시니까.”
에셴은 귀를 막고 있는 테오도르를 비웃으며 에리히를 놀렸다. 찻잔을 든 에리히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시늉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거라도 좀 알아주면 좋을 텐데 말이죠.”
“네?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내가 그대에게 당장 할 수 있는 약속이란 그것뿐이군요. 어떻습니까?”
“오늘부터 잠들기 전에 고민할 거리가 하나 생겼군요. 폐하께 받아낼 수 있는 것 중 무엇이 가장 가치 있을지.”
그럭저럭 협상은 타결된 셈이었다. 에리히는 그제야 제대로 차를 음미할 기분이 났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찻잔을 들었다. 그러나 에셴의 말이 그의 움직임을 끊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그 소문에 대해 폐하께서도 아실 필요가 있겠군요.”
잔을 기울이려던 에리히의 손이 멈췄다. 덩달아 테오도르도 자신의 누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소문요?”
“황후 마마와 관련된 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아직 듣지 못하신 것 같네요. 테오, 넌 알고 있니?”
에리히가 테오도르 쪽을 돌아보았지만, 테오도르도 멍하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에셴의 표정은 약간 심각해 보이기도 해서, 에리히는 들었던 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어떤 소문인데요?”
“황후께서 네페 영지에 정부를 두고 계시며, 후녀가 되기 전에도 여러 명의 남자들과 내밀한 관계에 있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테오도르는 입 밖으로 숨소리가 크게 튀어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에리히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리는 것을 보면서, 에셴은 그에게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다고 오해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에리히는 한 손으로 비스듬히 이마를 싸쥔 채 낮은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폐하?”
“소문이라 하기에 뭔가 했더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떠드는 자가 있습니까?”
“거짓인가요? 확신하실 수 있습니까?”
“네. 확신할 수 있습니다. 정부를 둘 만한 여자였더라면 차라리 다루기 쉬웠겠죠.”
“그럼 더 심상찮은 일이네요. 누군가 폐하와 황후 마마를 한꺼번에 모함하기 위해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린 것이니까요.”
듣기 좋은 소리는 아니지만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느새 웃기를 멈춘 에리히의 표정도 냉랭하게 얼어있었다. 생각에 잠긴 그의 눈을 보면서, 에셴은 자신이 무슨 일부터 해야 할지를 금방 알았다.
“소문을 처음 말한 자는 딜라이라 피먼입니다.”
“그 수다쟁이요?”
“네. 폐하께서도 아셨군요. 어떤 의미로는 딜라를 좀 존경해야 하겠어요.”
“모를 수가 없지요. 하지만 피먼 자작은 그런 일을 꾸며낼 만큼 머리가 좋은 자가 아닙니다. 특별히 가담하고 있는 세력도 없고요.”
“그럼 다른 사람이?”
“당연하지요. 피먼 자작은 나와 척질 일도 없는 자입니다. 소심하고 옹졸해서 누구의 부추김에 쉽사리 말려들지도 않죠. 달팽이처럼 숨는 데만 재주가 있으니까요. 오히려 그 때문에 부인을 미끼로 썼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침 입도 가벼우니 딱 좋군요. 딜라이라가 누구에게 그 소문을 들었는지 알아봐 주세요.”
“그러죠.”
그 정도는 에셴에게 있어 어렵지 않았다. 사람들은 잘 몰랐지만, 그녀가 집안에 틀어박혀 하는 일은 정원 가꾸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말 그대로 랜크버 백작가의 ‘모든’ 살림을 전부 다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백작가와 연관된 모든 사람들, 가족이나 친척은 물론이거니와 저택에서 일하는 집사장에서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 드나드는 상점의 배달원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그 모든 사람들의 가족, 이웃, 친구와 친척들… 몇 다리만 건넌다면 이웃 나라 왕이 뭐라고 잠꼬대를 하는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곧 소식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일어서야겠군요.”
“가끔 외출도 하고 그러세요.”
“안 그래도 오늘은 튈브리크의 서점에 갈 계획이랍니다. 남편이 요즘 푹 빠졌던 책이 알고 보니 열두 권짜리 묶음이었지 뭐예요? 이제 두 권을 구했으니, 나머지 열 권을 구할 때까지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어야 하겠지요.”
“어떤 책인지 알려주면 수소문해 주죠.”
에리히가 말했으나 에셴은 고개를 저었다.
“책만큼은 자기 손으로 찾아내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서요.”
에셴이 궁을 나간 후, 에리히는 찡그린 미간을 짚었다. 시종장에게 차가운 물 한 잔을 가져오게 한 그는 잔에 들어 있던 물을 순식간에 들이켠 후 긴 한숨을 내쉬었다.
“테오, 너도 들었지?”
“예, 에리히 님.”
“네페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에셴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만큼 소문이 퍼졌다는 건, 우리가 수도로 돌아오기도 전에 누군가 소문을 퍼뜨렸다는 말이다.”
테오도르는 굳은 표정을 한 채 시선을 내렸다. 에셴에게 전부 다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어딘가에 첩자가 있었다. 그리고 원칙적으로,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건 테오도르의 실책이었다.
“널 꾸짖지는 않겠다. 그럴 시간도 없어. 당장 움직여서 그때 동행했던 병사들과 시종을 하나도 빠짐없이 찾아 명단을 만들고 수색할 인원을 소집해라. 믿을 만한 소수의 자들로만. 아주 작은 실마리 하나라도 전부 다 내게 보고하도록. 무슨 말인지 알았어?”
“알겠습니다.”
정부라니. 에리히는 뒤늦게야 한 번 더 헛웃음을 쳤다. 그 대상이 누구인지는 뻔했다. 만약 아르사크가 정말 교묘하게 다른 누군가를 만나지 않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죽었다 깨어나도 없었다. 차라리 그녀가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는 소문이라면 그나마 진지하게 듣는 척이라도 했겠지만.
그러나 에리히의 믿음 같은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허상이나 다름없다. 이미 귀족들 사이에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면 더욱더 그랬다.
그들은 이 일을 빌미 삼아 아르사크를 미친 듯이 물고 늘어질 것이다. 이 정도 추문으로 만만하게 없애버릴 수 있는 상대가 아닌 만큼 집요하고 악랄하게 공격할지도 모른다.
뭔가 수를 써야 했다. 그들보다 빨리 움직이든가, 그들이 예상하지 못한 공격을 생각해야 했다. 테오도르가 소리 없이 나가고 난 빈 방에서 에리히는 혼자 곰곰이 눈을 감았다.
53장 이상한 일 (2)
황궁에 도착한 루이제는 마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하다가 그만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제때 붙잡아주지 않았다며 애꿎은 마부에게 눈먼 욕을 실컷 하고, 제각각 나풀거리는 치맛자락을 휘감듯이 붙든 루이제는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아르사크가 머무는 궁으로 달려갔다.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를 서고 있던 병사들이 루이제의 몰골을 흘끔거리며 길을 터주었다. 루이제가 문을 열고 들이닥쳤을 때, 시녀들보다도 아르사크가 먼저 놀랐다.
“루이제?”
“마, 마마… 헉, 저기… 피, 피먼 자작 부인을 만나고… 왔…….”
루이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얼굴뿐만이 아니라 시야도 핑 돌았다.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루이제의 낭창한 몸이 옆으로 픽 쓰러졌다. 며칠 전 그토록 간절히 바랐던 기절의 순간이었건만, 안타깝게도 루이제는 너무 늦게, 바라지도 않은 시점에 소원 성취를 하고야 말았다.
눈을 뜬 루이제는 잠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된 천장,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샹들리에의 크리스털, 그리고 좋은 향기와 이마를 스치는 산들바람이 무척 기분 좋았다. 도로 눈을 감고 푹 잠들었으면 싶었지만,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가 찰나의 달콤한 순간을 순식간에 걷어치웠다.
“일어났어?”
루이제는 누운 채로 손을 멈칫했다가 화닥닥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 얹혀 있던 타월이 툭 떨어지는 바람에 기겁을 한 루이제는 비명을 지르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등이 허전했다.
조심스럽게 뒤쪽으로 손을 돌렸던 그녀는 드레스의 빡빡한 단추들이 모조리 풀려 있는 것을 깨닫고 경악을 하며 시트로 몸을 휘감았다.
“마, 마마! 이게 무슨 짓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