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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71화 (71/191)

71화

샬롯이라니. 지금 당장 가장 가까운 거리로 뛰어나가 샬롯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모으면 수십 명은 족히 모일 것이다. 그만큼 흔한 이름이었다.

심지어 그토록 흔한 이름이면 본명이 아닐 가능성도 높았다. 게다가 고향이 어딘지도 모른다면? 그 하녀를 찾을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이다.

“저, 루이제 양. 저는 정말로… 황후 마마를 음해하려는 그, 그런 의도를 가졌던 것이 아니라…….”

“그런 판단은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니네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루이제는 딜라이라가 붙잡는 것도 뿌리치고 허둥지둥 피먼 자작가를 나섰다. 마차에 앉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도 알 수가 없었다.

‘소문을 하녀에게서 들었다고? 그러면… 사교계 밖에서 이 소문이 먼저 퍼졌다는 건가? 그럴 수가 있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루이제가 어디로 가자는 말을 하지 않자 난감해진 마부가 일단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숙녀다운 몸가짐이 아니라는 것도 잊은 채 손톱을 물어뜯던 루이제는 마부석과 연결된 들창을 벌컥 열어젖혔다.

“마차를 돌려. 황궁으로 갈 거야.”

52장 이상한 일 (1)

전쟁이 무수했던 시절, 제국에는 최대 다섯 명의 장군이 있었다. 그 이하로 기사단을 이끄는 기사단장과 기사들, 또 그 이하로 궁수나 보병을 비롯한 일반 병사들로 이루어진 것이 원래 제국군의 조직 형태다.

기마대는 특별히 따로 관리되었으며, 기마대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기사단장과 다른 기마대의 단장으로 임명되어, 평민 출신이더라도 귀족과 똑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수없이 많은 제국군 전체를 휘하에 두고 통솔하는 이들이 바로 장군의 칭호를 얻은 자들인데, 그중에서도 운트겔 집안의 위치는 특별했다. 어느 세대엔가는 가문의 직계뿐 아니라 방계의 모든 자손들이 기사와 기사단장으로 복무했던 기록도 있을 정도였다.

제국 전체가 전쟁을 거의 잊어버리다시피 한 지금도 운트겔의 가주인 릭트너 운트겔은 홀로 장군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형식적으로만 존재하는 장군이긴 했지만, 전통에 따라 그는 다른 작위 없이도 후작에 준하는 모든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그의 차남인 테오도르 운트겔은 현재 황제의 최측근 호위기사이다. 내로라하는 집안의 콧대 높은 귀족들도 운트겔이라고 하면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시늉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였다.

랜크버 백작 부인이라는 호칭으로 불리는 에실리스 랜크버는 현재 제국에서 유일하게 장군의 칭호를 가지고 있는 릭트너 운트겔의 첫째 딸이다.

나면서부터 병약했던 탓에 검술을 배우지 못한 장남 대신, 릭트너는 첫째 딸인 에실리스―에셴―를 제국군의 기사단장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녀는 누군가의 명령을 따르기에 적절하지 않은 성격을 타고났다.

딸의 강한 성정과 대담함을 썩히기 안타깝긴 했지만, 혹시나 모를 불의의 사고까지―성질을 이기지 못한 에셴이 상관을 두들겨 팬다든가― 감수할 만큼 에셴의 검술 실력이 뛰어나지 않았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래서 에셴이 괴짜로 소문난 랜크버 백작과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도 릭트너는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 부모의 억지에 떠밀려 결혼할 그녀도 아니었거니와, 에셴만큼 강한 성격이라면 차라리 얌전하고 책밖에 모르는 랜크버 백작 같은 인물이 신랑감으로는 딱 알맞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릭트너 운트겔의 판단은 옳았다. 에셴은 랜크버 백작 부인이 되어, 살림이든 정치든 도통 관심 없는 남편을 대신해 집안의 모든 것을 휘어잡으며 만족도 높은 삶을 살고 있었다.

랜크버 백작만큼은 아니었지만, 에셴 역시 사교계의 호화로운 모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의 취미는 정원 가꾸기였고, 가끔 남편인 랜크버 백작과 함께 튈브리크의 서점 거리를 방문해 책을 구경하는 모습 정도가 눈에 띌 뿐, 외출이 빈번하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정확히는 수도 귀족들은 자연스럽게 랜크버 백작 내외를 희미하게 잊어갔다. 연회나 만찬에 오라는 초대장은 보내면서도 정작 자리를 마련해 둘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에셴이 황제의 부름을 받아 입궁했을 때도, 아무도 그의 움직임을 눈여겨본 사람이 없었다.

“오랜만에 인사를 드립니다, 폐하. 무탈하시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쁘고 안도한 마음에 결례하였나이다.”

에셴이 나붓이 절을 하고 일어서자, 에리히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띠며 자리에 앉을 것을 권했다.

에셴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곧은 자세로 의자에 앉은 채 에리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렇게 말없이 바라볼 때 에셴의 얼굴은 테오도르와 무척 닮아 보이는 데가 있었다.

에리히는 차를 가져온 시종을 물리고 직접 그녀의 잔에 차를 따랐으나, 에셴은 놀라지도 않은 채 찻잔에 채워지는 샛노란 빛깔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테라스 수리는 잘 끝냈습니까?”

에리히가 위든이 아닌 다른 귀족에게 경어를 쓰는 경우도 흔하지는 않았으나, 에셴은 이번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 대신 자연스런 몸짓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띠었다.

“폐하께서 하사하신 석조 타일은 감사히 받았습니다. 무늬가 무척 우아하고 훌륭하더군요.”

“백작 부인의 취향에 맞추어 넝쿨무늬가 새겨진 것으로만 보내라고 했습니다. 정원 가꾸는 것을 좋아하니까요.”

“소소한 취미를 아직까지 기억해 주시다니 감읍하나이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한쪽에서 눈치만 보고 서 있던 테오도르가 작게 헛기침을 하자, 그것이 신호나 된 것처럼 백작 부인과 에리히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의 귀부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경쾌한 소리로 한바탕 웃은 에셴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폐하, 그새 말솜씨가 더 좋아지셨군요. 새삼스레 화술이라도 배우신 건가요?”

“그대야말로 새삼스레 예법을 다시 배운 겁니까? 나 원, 어찌나 우아하게 절을 하는지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군요.”

“결혼한 지도 시간이 꽤 지났으니, 이제 슬슬 부인다운 태도를 갖춰볼까 싶더군요.”

“왜요, 랜크버 백작이 그러라고 하던가요?”

“그런 말을 하지 않으니 놀래켜 주려고요.”

에셴의 허물없는 말투에 괜히 테오도르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테오도르보다 에셴을 대할 때 한층 더 황제의 면모에서 벗어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렸을 때 에리히가 에셴을 무척이나 잘 따랐던 것이다. 고분고분 얌전한 남동생처럼 군 것은 물론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에셴이 가끔 테오도르를 데리고 입궁할 때마다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군 적도 여러 번이었다.

오만하고 권위적이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에리히가 예외적으로 에셴 앞에서만 민간의 청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테오도르와 비슷하게 소꿉친구나 다름없는 관계였던 것이다.

“저를 찾으셨다 들었습니다.”

그런 사이였으므로, 피차 의뭉을 떨며 서로의 의중을 가늠하려 애쓸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끄덕인 에리히는 테이블 위로 깍지 낀 손을 얹었다.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아실 테지요? 내외가 아무리 외출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외출이 잦지 않을 뿐, 눈과 귀는 여전히 멀쩡하답니다. 새로이 황후의 자리에 오르신 분께도 인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한 예의인 줄 알면서도, 폐하께서 어련히 저의 충성을 헤아리시려니 생각해 마음으로 전했습니다.”

“그냥 귀찮았던 거잖아요.”

에셴은 ‘차가 맛있군요.’라며 미소를 띠었다. 에리히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 꾹 눌렀다가 다시 깍지를 끼며 에셴을 마주 보았다.

“그대와 운트겔 가문의 충성심은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안다고 할 수 있지요. 랜크버 백작 부인이 되었으니 운트겔과는 상관없다는 말일랑 하지 마세요. 그까짓 성이 바뀌었기로서니, 사람까지 바뀌는 게 아니라는 건 나도 아니까요.”

“제게 필요한 것이 있으시군요. 무엇입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 돕지요.”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분간 백작 부인이 황후의 눈과 귀가 되어주었으면 합니다.”

에리히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에셴의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릴 때도 그는 종종 그런 자세로 어머니를, 아버지를,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곤 했다.

뭔가 부탁할 것이 있을 때, 그리고 그 부탁을 반드시 들어줘야 한다고 몸으로 주장할 때 나오곤 하는 버릇이었다. 속내를 쉽게 짐작하기 힘든 푸른 눈빛으로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원하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말이다.

에셴도 한두 번 그 눈빛을 겪은 적이 있었다. 짓궂은 장난 같은 것을 도와달라는 따위의 사소한 일이긴 했지만, 그때는 그냥 말썽꾸러기 같았던 황태자에게 사람을 움직이는 이상한 매력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저는 사교계 깊은 곳까지 발을 들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폐하. 수영은 서툴러서요.”

그러나 한번 거슬러 볼 만은 하다. 에리히가 자기 이외에 또 다른 후보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굳이 귀찮은 일을 도맡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에리히의 표정은 확고했다.

“배우면 됩니다. 그대는 배움이 무척 빠르다는 걸 알고 있어요.”

“빠르지 않으면 절 채찍질이라도 하실 기세로군요?”

“그럴 리가요. 제게도 소중한 누님… 비슷한 분께 그럴 수는 없지요.”

“누님이면 누님이지, 비슷한 분은 뭐죠?”

“이제 와서 복잡한 출생의 비밀에 연관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게 아니어도 전 벌써 적이 너무 많아서요.”

이야기를 나누는 둘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낄낄거리는데, 가만히 듣고 서 있던 테오도르는 역정을 내야 할지 같이 웃어야 할지 아리송한 기분이 되었다.

분명 자신의 가문에나 황실에나 모욕적인 말인데, 그 말을 하고 있는 장본인들이 황제와 자신의 친누나라는 점에서 역정을 내기엔 애매한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고 같이 낄낄대고 웃기에는 테오도르의 성격이 너무 고루했다. 그는 결국 여태까지 그랬던 대로 무표정을 유지한 채 그림자처럼 서 있는 쪽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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