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유르트 안이 어둠에 잠겼다. 이따금 바람이 천막을 살짝 흔드는 소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눕자 아르사크의 고른 숨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들렸다. 시야가 어둠에 익숙해질 때마다 눈을 감고 있는 얼굴도 점점 더 또렷하게 보였다.
에리히는 손을 뻗어 귀 옆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넘겨주며 아르사크의 뺨을 살짝 감싸 쥐었다. 온기가 느껴졌다. 갑자기 마음이 놓일 만큼 따뜻한 체온이었다. 엄지 끝이 윗입술을 가볍게 스치고, 입가를 매만진 순간 아르사크의 몸이 가볍게 뒤척였다.
불에 덴 것처럼 퍼뜩 손을 뗀 에리히는 그대로 가만히 아르사크의 얼굴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이불 사이로 포근한 장미 향기가 부드러운 분말처럼 흘러들어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51장 의혹과 소문 (10)
피먼 자작가의 응접실에 앉은 루이제는 딜라이라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불안한 강아지처럼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보다 못한 하녀가 ‘루이제 아가씨, 어디 불편하신가요?’하고 물었을 정도였다.
“아니? 아냐. 내가 왜 불편해? 나 하나도 안 불편해.”
루이제가 말했다. 그러나 별로 신빙성은 없는 말투였다. 하녀는 제가 더 불안한 표정으로 물러나 있다가 딜라이라가 나타나자 드디어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쉬며 절을 하고 물러났다.
“루이제 양이 날 찾아오다니 이것 참 뜻밖인걸요? 기뻐요.”
딜라이라가 말했다. 루이제는 방긋이 웃으려 했지만 입매가 굳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뭐든지 하겠다’는 말의 무서움을 미리 알았더라며 좋았겠지만, 안타깝게도 루이제는 그 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지 그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궁여지책에 불과했고, 설마 그 말을 아르사크가 진심으로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아르사크가 루이제에게 ‘소문의 출처를 알아오라.’는 명령을 했을 때, 루이제는 그 자리에서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정말로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신이 소문을 퍼뜨린 것이 아닌데 왜 그래야 하느냐는 항변도 해보았지만 먹힐 리가 없었다.
“네가 ‘뭐든지 하겠다’고 한 건 소문 때문이 아니잖아? 벌써 잊었니? 싫다면 어쩔 수 없구나. 발칙하게도 자작의 딸 따위가 황후를 염탐하려 했다는 사실을 폐하께 고하는 수밖에.”
그 이후로 루이제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수로 집까지 돌아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외출을 했다가 돌아온 홀드빅 자작은 금이야 옥이야 키운 막내딸이 파리하게 질린 꼴로 침대에 누워만 있는 모습을 보고 기겁을 했다. 당장에 실력 좋은 의원들을 수도 없이 불러들였다. 그러나 아픈 데가 없는데 처방이 나올 리 없었다.
홀드빅 자작에게 욕만 잔뜩 얻어먹은 의원들이 투덜거리며 저택을 나섰을 때, 루이제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아버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뭐? 그래, 뭐든 말해봐라.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응?”
“그게요, 사실은…….”
그러나 막상 말을 꺼내려 하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뭐라고 말한단 말인가.
아버지가 시킨 일을 하다가 황후에게 약점을 잡혀, 이제는 황후를 위해 거짓 추문의 출처를 쫓아야 하게 생겼다고? 피먼 자작 부인의 집에 찾아가 그녀를 쥐어짜서라도 정보를 얻어내지 않으면 가문이 날아가게 생겼다고?
그런 말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교활하고 영리하지 못한 루이제였지만 사리 분별을 못 하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알게 되면 더 큰 사달이 날 것은 뻔했다.
루이제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아버지에게 이실직고를 해 일을 크게 만들 것이냐, 아니면 딜라이라 피먼을 추궁할 것이냐.
당연히 후자가 나았다. 딜라이라가 사실대로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대로 고하기만 한다면 그다음부터는 황후가 알아서 하리라.
“저기, 아버님. 저 은여우의 모피로 만든 모자가 갖고 싶어요. 이번 겨울에는 꼭 그걸 쓰고 무도회에 가야겠어요.”
“뭐라고? 은여우의 모피? 루이제, 너는 아직 미혼인데다 또 어리지 않느냐. 그런 것은 좀 더 나이가 찬 뒤에 갖거라. 그리고, 얘야. 은여우는 무척 희귀한 짐승이다. 어쩌다 잡힌다 하더라도 품질이 좋은 모피는 우선 황궁으로 들어간…….”
“몰라요! 저는 꼭, 꼭 그게 가지고 싶어요. 네? 절 위해 은여우 모피로 만든 모자를 구해주신다고 약속하세요. 네?”
삐쳐서 울먹거리는 시늉까지 한 끝에 루이제는 홀드빅 자작으로부터 겨울 전에 반드시 모자를 구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자작은 어릴 때 생모를 여읜 막내딸을 언제나 가엾게 여겨, 그녀가 떼를 쓰고 조르면 무엇이든 들어주지 않고는 배기지 못했다. 그까짓 여우 털로 만든 모자 따위, 그걸 가지지 못해 귀한 막내딸이 병까지 났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루이제는 안심한 아버지에게 애교스런 미소를 돌려주고는 그가 나가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루이제 양, 그게 정말 사실인가요?”
멍하니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이제는 딜라이라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뭐가요?”
“그때 백작 부인의 모임 자리에서 루이제 양이 이야기했던 것 말이에요. 황후께서 그 향수를 마구간 냄새 같다고 하셨다는…….”
딜라이라는 안 그래도 가느다란 눈을 더욱 가느스름하게 뜨며 음흉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거의 눈동자가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루이제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과장스러울 정도로 낭랑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그럼요. 제가 어떻게 감히 황후 마마의 말씀을 지어내겠어요?”
“‘감히’라니. 루이제 양이 황후 마마와 그토록 가까운 사이이신 줄은 몰랐군요. 놀라워요. 어떻게 그렇게 가까워지셨는지 저도 알고 싶은데, 들을 수 있을까요?”
“아, 그건…….”
대답을 하려던 루이제는 얼른 입을 다물고 딜라이라를 쳐다보았다.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눈 뜨고 함정에 빠질 뻔한 것이다.
거기서 루이제가 무슨 말을 했건, 딜라이라는 그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가 다른 자리에 가서 퍼뜨릴 것이 분명했다. 여기서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정답이었다. 자신이 정말로 황후와 가까운 사이라는 소문이 난다면 곤란했다.
“그보다, 자작 부인께서 하셨던 말이 저는 더 놀랍던걸요. 그… 소문요.”
루이제는 찻잔을 만지는 척하며 딜라이라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약간 곤란한 듯이 입가를 가리며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그 일이라면… 제 생각이 짧았지요. 루이제 양의 말이 맞아요. 감히 황후 마마를 두고 변변치도 못한 소문을…….”
“대체 어디서 시작된 소문일까요? 부인은 아시겠죠?”
“네……? 아뇨, 저도 모르지요. 소문이라는 것이 꼭 한 곳에서만 시작되는 것이 아닌 데다가…….”
“하지만 누군가 부인께 그 이야기를 전한 사람이 있을 것 아닌가요? 누가 그런 이야기를 하던가요?”
딜라이라의 표정이 천천히 굳어갔다. 그러면서도 입가에 띤 어색한 웃음은 그대로여서, 인상 전체가 괴상하게도 보였다.
루이제는 떨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데 그 모습이 딜라이라에게는 달리 보였던 모양이다.
딜라이라는 수많은 소문을 퍼뜨리는 만큼, 자신을 찾아와 소문의 출처를 추궁하는 이런 경우도 수없이 많이 겪어보았다. 루이제의 방문은 단순한 호기심이나, 혹은 자의적으로 이루어진 일이 결코 아니었다.
“참… 루이제 양. 저를 곤란하게 만들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정말로 황후 마마께 불경한 짓을 저지르려 한 것이 아니라…….”
“의도야 어쨌건 불경죄라는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죠. 자작 부인도 아시잖아요? 황실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라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요.”
“그, 그럼요. 알지요. 알다마다요. 하지만 저는 정말로…….”
“저는 자작 부인의 잘못을 따지러 여기 온 것이 아니에요. 그건 황제 폐하와 황후 마마께서 하실 일이겠죠. 저는 단지 누가 부인께 그런 소문을 흘렸는지 그게 궁금할 뿐이라고요!”
루이제의 목소리는 이제 거의 신경질적인 외침에 가까워져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입에서 ‘황제’와 ‘황후’라는 두 단어가 나온 순간, 딜라이라 역시 침착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루이제가 평소와는 달리 어딘가 안절부절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딜라이라 역시 정치 싸움에 능숙하고 교활한 성미는 못 되었던 것이다. 그냥 어디에나 있는, 수다스레 떠벌리며 모임의 중심이 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이었다.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황후에 대한 추문은 그녀에게 있어 우스운 농담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갑자기 황제까지 거론되다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루… 루이제 양, 잠깐만요. 나, 나는 하녀에게 그 말을 들었어요.”
“뭐라고요? 하녀라고요?”
“그, 그래요. 실은 그 소문이… 사교계를 중심으로 먼저 퍼진 게 아니랍니다. 우리 집에서 일하는 하녀가… 그 아이가 친구에게서 들었다면서 해준 이야기예요. 난 정말 그것밖에 몰라요!”
손끝이 하얗게 바랠 때까지 주먹을 꽉 쥐고 있던 루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서슬에 놀란 딜라이라는 소파에서 거의 미끄러질 뻔했다.
“그 하녀가 누구죠? 데려오세요. 제가 만나봐야겠군요.”
“아… 아, 하, 하지만 그 아이는…….”
“뭐예요! 빨리 말해요!”
참을성 없이 발을 탕 구른 루이제는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자신을 엄습해 오는 것을 느꼈다.
“그, 그 아이는 얼마 전에 고향으로 내려갔어요. 어…어머니가 아프다는 전갈을 받고요.”
“고향이 어딘데요? 그 하녀의 이름은 뭐예요?”
“이, 이름은… 이름은 샬롯이에요. 하지만 고향이 어딘지는 몰라요.”
루이제는 온몸의 힘이 쭉 빠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딜라이라는 여전히 루이제의 눈치를 살피며 아까의 루이제처럼 초조하게 안절부절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