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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69화 (69/191)

69화

촛불이 다시 일렁거리고, 에리히가 몸을 일으켰다. 아르사크는 유르트를 나서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그가 천막을 걷어 올리는 순간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딜 가요?”

에리히는 잠시 아르사크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여태껏 본 적 없는, 장난스러운 건지 무방비한 건지 모를 웃음을 잠깐 띠었다가 말했다.

“바람 쐬러.”

50장 의혹과 소문 (9)

밤이 되자 부족민이 모여 사는 마을은 더욱 작아 보였다. 에리히는 경계 주변을 천천히 순찰하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유르트에서 조금 떨어진 곳까지 걸었다.

마을 입구와 가까운 곳에는 평상이 있었다. 만들다 만 바구니들이 한쪽에 정리되어 있고, 무두질을 끝낸 가죽들도 쌓여 있었다. 아마 저 가죽들을 재단해 허리띠나 칼집 같은 공예품을 만드는 것이리라고 에리히는 생각했다.

불현듯 오래전의 기억이 에리히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버지와 함께 토르갈 부족민들이 사는 곳을 방문했을 때, 이렇게 짜다 만 바구니나 깎다 만 나무토막 같은 것들을 유르트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에리히가 관심을 보이자 바구니 짜는 방법을 가르쳐 준 이름 모를 노인도 있었다. 그는 이미 죽었으리라. 수많은 토르갈 부족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에리히는 반쯤 만들어진 바구니를 집어 들어 만져보았다. 이리저리 뻗친 빳빳한 골풀 끝이 서툴게 움직이는 손가락을 긁었다. 뼈대를 가로질러 가며 겨우 몇 번 엮지도 않았는데 손끝이 얼얼하고 손톱 밑이 아렸다. 토르갈에서는 어린 여자아이들도 곧잘 바구니를 만들곤 했다. 이렇게 힘이 드는 일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저기…….”

어둠 속에서 불현듯 들린 목소리에 에리히는 엮던 바구니를 내려놓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알린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딱딱하게 굳었던 표정을 약간 풀었다.

“뭐지?”

“밤이 늦었는데 왜 나와 계시는지 해서요.”

알린은 여전히 쭈뼛거리는 태도였지만, 그래도 낮에 보았을 때보다는 에리히를 조금 친숙하게 여기는 듯했다. 비슷한 옷을 입고 있어서 상대적으로 거리감이 덜해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에리히는 짜다 만 바구니를 대강 밀어두고는 유르트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사고를 좀 쳐서.”

“쫓겨나셨나요?”

에리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알린은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눈을 굴렸다.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에리히는 몸을 뒤로 젖히며 고개를 들었다.

“내 발로 나왔다. 반성하는 척하면 들어오라고 할까 봐.”

“그럴 거라 생각하세요?”

“아니.”

알린은 픽 웃었다. 그는 제국의 황제이고, 언제든 수틀리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그런 실감이 나지 않았다. 마치 동네 친구와 시시덕거리러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알린은 에리히와 약간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푸르스름한 천을 켜켜이 겹쳐놓은 듯한 부드러운 남청색 하늘에 무수히 많은 별이 떠 있었다.

“네 이름이 뭐지?”

“바옛의 아들, 알린입니다.”

“알린… 그렇군. 네가 ‘돌팔매 알’이었어.”

“절 기억하세요?”

“처음 봤을 때부터 얼굴은 기억이 나더군. 다만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을 뿐이야. 돌 던지는 걸 봤더라면 금방 기억이 났을 텐데.”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돌팔매 알’이란, 알린 자신조차 얼른 기억하기 어려웠을 만큼 어린 시절의 별명이었던 것이다. 에리히가 자신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 시끌벅적한 꼬마들 무리에 있었지. 항상 황후 옆에 붙어 다니면서 말이야.”

“아르사크는 우리 대장이었으니까요. 늘 또래들을 몰고 다녔죠. 우리는 아르사크 덕분에 어른들 몰래 말을 훔쳐 타기도 하고, 양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놀기도 했습니다.”

선황은 에리히가 토르갈 부족민의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려 놀기를 원했다. 비록 마을의 어른들은 그들이 누구인지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이야 제국의 황제든 황태자든 같이 놀 수 있는 상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모두에게 온화한 황제였던 선황은 후계를 이을 하나뿐인 아들에게도 다정했다. 황궁 안에서 온갖 규칙과 빡빡한 학습에 얽매여 또래 친구라고는 테오도르 하나뿐인 것을 못내 안쓰럽게도 생각했던 것이다.

다만 에리히는 그때도 까다로운 소년이었다. 흙먼지가 날리는 땅바닥에서 다른 꼬마들과 뒹굴며 논 적은 결코 없었다. 아이들이 목검을 들고 뒤엉켜 전쟁놀이를 하거나 숨바꼭질 같은 것을 하며 온 마을을 헤집고 다닐 때, 에리히는 멀찌감치 서서 그들이 노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때 알린은 에리히에게 돌을 던져서 과일 따는 법이나, 작은 웅덩이에서 물수제비뜨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마을 꼬마들 중에서 돌 던지는 것만은 알린이 제일이었다. 던졌다 하면 백발백중이어서 ‘돌팔매’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니까.

“아르사크는 폐하께서… 우리를 기억하고 있다는 걸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던데요.”

“그럴 수밖에. 본인이 날 잊어버렸으니까.”

“잊어버렸다고요? 그럴 리가요.”

“몇 번이나 물어봤지만 똑같았다. 만약 그게 연기였다면 그거야말로 놀랄 일이지. 황후는 관두고 배우나 시켜야 할 판이야.”

“그랬군요……. 하긴, 저도 단박에 기억나진 않았으니까요. 나중에 일이 좀 진정된 뒤에야 하나둘씩 기억나기 시작했죠.”

많은 일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추억 같은 것을 붙들고 즐거워할 여유가 없을 만큼 힘든 일들이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때문에 에리히는 이제 아르사크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정을 갖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떠올려주리라는 기대도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때 우리 또래 남자애들은 모두 아르사크를 무서워하는 한편 좋아했죠.”

알린의 말에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마음이 어떤가를 돌이켜 생각했다.

아르사크가 느낀 정체 모를 긴장감은 에리히도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아르사크는 그 긴장의 정체를 몰랐지만 에리히는 알고 있었다는 점만이 달랐을 뿐, 그리고 입 밖으로 내어 말하지 않았을 뿐, 눈이 마주친 순간 서로가 느꼈던 감정은 같은 파장을 지니고 있었다. 아주 멀리서부터 엇갈리며 서로를 향해 돌진하다가 어느 순간 한 점에서 맞물리듯이.

금세 또다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겠지만 그 찰나의 맞닥뜨림에서 느껴지는 떨림의 정체를 에리히는 알았다. 그리고 받아들였다.

“저기, 황제께서는… 아르사크, 아니, 황후 마마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쎄, 망나니라고 부르긴 하는데.”

알린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졌다. 아… 하는 외마디 소리를 내며 머뭇거리던 그는 에리히 쪽으로 좀 더 가까이 다가앉았다.

“그럼 좋아하시진 않는 건가요?”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고 알린을 쳐다보았다. 무슨 의도로 질문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아르사크를 좋아하건 말건, 그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알린은 뭔가를 착각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별명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서, 에리히가 알린과 친구가 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사실을 몰랐다.

“무례한 질문을 하는군. 내가 대답해야 할 이유가 있나?”

“네? 아, 어… 아뇨, 없지요. 아니, 음… 없습니다.”

“내 감정이 어떻든 그녀는 2년 후면 폐위될 것이다. 그 약속에 목숨을 걸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하지. 내가 그때쯤 죽고 싶지 않는다면 말이야.”

“저기, 전 다른 뜻을 가지고 물은, 아니, 여쭤본 게 아니라…….”

그러나 에리히는 알린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선 등이 어찌나 냉랭한지, 알린은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그의 모습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게 되고서야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살벌하네. 좋다, 싫다 말하는 것도 안 되나. 황제는.”

화가 난 듯한 발걸음으로 유르트 앞까지 돌아온 에리히는, 곧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은 채 바깥에 멈춰 섰다. 평상 쪽을 다시 돌아보았지만 알린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그가 말했던 대로, 그 질문은 아마 별 생각 없이 던진 질문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알린뿐만 아니라 제국의 모든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질문이기도 했다.

이방인으로서 후녀가 된 여자, 신성한 예식을 엉망진창으로 뒤집어놓고도 ‘진짜’ 신탁을 받아 당당히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것이 에리히가 원한 결말은 아니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만약 자신이 아르사크를 냉대한다는 소문이라도 돈다면 귀족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르사크를 폐위시키려 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는 지금까지 해온 모든 일이 물거품이 된다. 정말로 아르사크를 폐후로 만든다면 황제인 자신이 직접 해야 했다. 그래야 누구에게도 발언권을 주지 않아도 정당한 환경이 만들어지니까.

하지만 그럴 수 있을까? 에리히는 주먹을 쥐었던 손을 서서히 펴고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톱이 파고들었던 자리에 얕은 자국이 새겨져 있다가 금세 사라졌다.

만약 아르사크가 에리히와 함께 있기를 원하는 날이 온다 해도, 그녀에게 가장 우선인 것은 부족민이다. 그 사실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에리히는 알고 있었다.

부족민을 이끌고 돌보아야 하는 자신의 사명을 버리고 황후의 자리에 정착하는 아르사크의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만약 아르사크가 그런 선택을 한다면 에리히는 그녀에게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 때가 되면 놓아주어야만 했다. 이번만큼은 약속을 깨트려선 안 되었다. 자신의 감정 같은 것은 아무 소용없다는 에리히의 말은 진심이었다.

거침없이 움직이는 모든 몸짓에서 언젠가부터 눈을 뗄 수 없게 되었어도, 억지에 가까운 황당한 말들을 다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늘었더라도, 머리를 빗느라 돌아앉아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수선화 줄기처럼 우아하게 곧은 그 목덜미에 입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불길처럼 일어도. 언젠가는 모두 포기해야 하는 마음이었다.

에리히는 아예 새카맣게 어두워진 하늘을 한 번 더 올려다보고 유르트 안으로 들어갔다.

아르사크는 모로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초를 켜놓은 채 잠든 것 같았다. 자신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불을 끄지 않은 것일까.

일렁이는 촛불을 불어 끄려던 에리히는 잠시 움직임을 멈춘 채 아르사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손을 뻗어 어깨를 만져보려던 그는 이윽고 고개를 돌리며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그리고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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