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49장 의혹과 소문 (8)
시장을 벗어나니 그제야 온몸에서 기름과 음식 냄새가 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저기서 과자며 기름에 튀긴 감자 같은 것들을 팔고 있었으니 무리도 아니다.
아르사크는 나무로 만든 목욕통에 들어가 오랫동안 몸을 씻었다. 뜨거운 김이 피어오르는 물속에 입술까지 잠근 채 눈을 감으면 이리저리 뻗어 나가던 불꽃의 가느다란 빛줄기들이 시야에 아른거렸다.
막대 불꽃이 다 탈 때까지, 에리히와 아르사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다만 손을 잡고 있었다. 그 손의 온기가 왜 거북하지 않았는지 모를 일이다.
에리히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풀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아르사크는 어느 순간부터 에리히를 보는 시선이 더 이상 적대적이지만은 않다는 것을 스스로 깨달았다.
물론, 그는 여전히 밉살맞게 굴 때가 많았고 아르사크 역시 한마디도 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마주치기만 하면 입씨름을 했지만 전처럼 날 선 대화는 좀처럼 오가지 않았다.
아르사크가 에리히를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지만,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대하는 태도 역시도 많은 부분이 달라졌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지 몰라도 당사자인 아르사크는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아르사크, 이쪽으로 와요.”
바깥으로 나간 아르사크는 티리야의 손에 이끌려 마을 한쪽으로 갔다. 그러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둥글게 선 천막이 보였다. 입구를 가린 천의 색깔이며 자수도 익숙했다.
유목민들은 한곳에 정착해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에, 천과 나무 기둥을 이용해 짓고 허물기 용이하도록 천막 형태의 집을 만든다. 그들은 그런 집을 ‘유르트’라고 불렀는데, 아르사크의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르사크가 어렸을 때부터 살던 바로 그 유르트였다.
“티리야, 이걸 어떻게……?”
“아르사크가 나간 사이에 마을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서 만들었어요. 저 천막은… 우리가 고향을 떠날 때 내가 챙긴 거예요. 안에 있던 것들까지 다 챙겨 오진 못했지만요. 깔개랑 융단을 깔아뒀으니까 충분히 잘 수 있을 거예요.”
티리야가 말했다. 아르사크의 표정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입구를 가릴 수 있도록 드리운 천을 천천히 만져보던 아르사크는 목이 메는 기분에 잠시 눈을 감았다. 증조모님이 직접 수를 놓아 만들었다는 그 천은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토록 아끼던 것이었다.
“고마워, 티리야. 네가 사람들에게 말해준 거지?”
“바닥에서 자는 게 그리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거든요.”
“맞아, 그리웠어.”
아르사크는 벽으로 삼아 두른 견고한 천을 손끝으로 매만지다가 기분 좋은 소리로 웃었다. 그러다 여전히 그 자리에 선 채 서성거리고 있는 티리야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왜 그러고 있어, 티리야?”
티리야는 곧장 대답하지 않은 채 입술을 달싹이더니 마른침을 삼키며 헛기침을 했다.
“저기, 아르사크. 안에 준비한 건…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내 뜻이 아니에요. 알겠죠?”
“뭐? 안에 뭘 준비했는데?”
“들어가 보시면 알아요. 아무튼 전 반대했어요. 근데 누구누구들이 하도 우겨대서요. 오지랖들이라니까. 안녕히 주무세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는 것처럼 잔뜩 부루퉁한 표정을 지어 보인 티리야는 아르사크가 뭔가를 묻기도 전에 발을 휙 돌려 가버리고 말았다.
어리둥절한 채 서 있던 아르사크는 문득 뭔가를 깨달은 표정으로 얼른 천을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급조한 것치고는 내부는 무척이나 잘 꾸며져 있었다.
여기저기 걸린 융단과 흙 한 톨 없이 깨끗한 깔개, 쇠를 두드려 만든 작은 화로와 그 위에 걸린 조그만 주전자까지. 마치 제국에 오기 전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가운데에 앉은 채 턱을 괴고 있는 에리히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당신이 왜 여기 들어와 있는 거예요?”
“여기서 자라는데 그럼 어떡해? 황제가 길거리에서 노숙이라도 할까?”
“지휘관이 묵는 곳도 있잖아요!”
“날 모시지 않아도 된다고 했더니 반색을 하던데. 그 숙소가 아주 좁은 모양이더라고.”
아르사크는 잠시 발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가운데로 걸어 들어와 앉았다. 같은 자리에서 자는 게 오늘이 처음인 것도 아닌데 이제 와서 언성을 높여봐야 소용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아르사크는 화로 옆에 조그만 술상이 놓여 있는 것을 알아차리고 다시 에리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이건 뭐죠?”
“여기 있었더니 가져다주던데.”
티리야가 말한 게 바로 이것인 모양이다. 아르사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술병을 집어 들어 향을 맡아보았다.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약초나 뭐 그런 걸로 만든 꿀 술인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상을 멀찌감치 밀어버렸다.
“전 마시고 싶지 않습니다.”
“아무도 그대에게 마시라고 강요하지 않았어. 하지만 난 궁금하군. 아까 그 희한한 술하고 어떻게 다른지 알아보고 싶은데.”
그 ‘희한한 술’이라는 건 바로 말젖으로 만든 술을 말하는 것이었다. 유목민들은 말이나 양, 가끔 염소의 젖으로도 술을 만들었는데 술이라기보다는 빈번하게 마시는 음료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에리히는 겨우 한 모금을 마신 뒤 괴상하게 일그러지는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독특한 향과 맛 때문에 외부인들은 쉽사리 즐기기 힘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아르사크는 일부러 에리히에게 그 사실을 귀띔해주지 않았던 것이다.
헛구역질을 참느라 목덜미까지 벌게진 모습이 어찌나 우스운지, 지켜보는 사람들이 조금만 더 적었던들 폭소를 터뜨렸을 것이다.
아르사크가 대꾸하지 않는 사이, 에리히는 정말로 혼자 술잔을 조금 채우더니 술을 맛보았다. 달콤한 향기 뒤로 쌉쌀한 맛이 따라왔다. 술이라기보다는 쓴 차에 가까운 맛이었는데 나쁘지 않았다.
“이건 꽤 괜찮은데. 어떻게 만드는지 알면 돌아가서도 종종 마시고 싶을 것 같은 맛이야.”
“약초와 꿀만 있으면 만들긴 쉽죠.”
“만들어 주겠다는 얘긴가?”
“좋을 대로 해석하는 데에도 정도가 있다는 생각은 안 하시나요?”
에리히는 낮은 소리로 웃으며 술을 한 잔 더 마셨다. 별로 독하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두 잔을 마시고 나니 얼굴이 홧홧해졌다. 술이 센 편임에도 불구하고 그랬으니, 테오도르처럼 술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마셨다가는 두 잔 정도에 나가떨어지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닐 것 같았다.
상을 밀어놓은 에리히는 머리를 빗고 있는 아르사크에게로 다가앉았다. 빗을 건네주고, 건네받는 몸짓은 이전보다 더욱 자연스러웠다.
에리히의 얼굴을 잠시 올려다보기는 했지만, 아르사크는 결국 별다른 말없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앉았다. 아직 물기가 남은 머리에서 짙은 장미 향기가 풍겼다.
“오늘도 서른 번을 빗어야 하는 거야?”
“폐하께서 입을 다물겠다고 약속하신다면 스무 번만 빗어도 로즈안나는 모를 테죠.”
“양심에 찔리니까 스물다섯 번으로 하지.”
아르사크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고개를 약간 숙였다. 흘러내리는 머리칼 사이로 날씬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에리히는 제법 능숙하게 빗을 쥔 채 정수리에서부터 머리칼 끝까지 꼼꼼히 빗질을 했다.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는 사이 에리히의 손은 아르사크의 머리를 짚었다가, 귓가를 스쳤다가, 어깻죽지에 얹혔다.
아르사크는 문득 그 손을 붙잡아 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일렁이는 불길과 알록달록한 융단, 아늑한 향기 때문에 불필요할 정도로 호젓해지려는 마음을 추슬렀다.
묵묵히 빗질을 끝내고서도 에리히는 잠시 아르사크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조용히 기다리던 아르사크가 뭘 하는 거냐고 돌아보려는 찰나, 딸깍거리는 작은 소리와 함께 왼쪽 귓가의 머리카락들이 서툰 모양으로 둥글게 틀어 올려졌다.
아르사크는 손을 올려 머리를 만져보았다. 조그맣고 딱딱한 뭔가가 손끝에 걸렸다. 빼내서 살펴보니 그것은 머리핀이었다. 야시장의 좌판에서 팔던 것이다. 매끈하게 깎은 작고 흰 돌을 나비 날개 모양으로 이어붙인 장식이 달려 있었다.
“이게 뭔가요?”
“몰라서 묻는 거야?”
“머리핀이라는 건 알죠. 제가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모르시겠어요?”
“아까 성질부리다 하나를 깨뜨렸잖아. 그렇게 상등품인 진주는 이제 구하기도 힘들 텐데 말이야.”
“그래서 이걸 사셨다고요?”
“진주는 아니지만 행운을 가져다준다더군. 상술이지만 속아줘야지.”
에리히는 이리 줘보라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아르사크가 핀을 건네주자, 그는 아르사크의 긴 머리카락을 굵게 땋아 내리고 위쪽에 핀을 꽂아 장식해 주었다.
이 분위기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은 아르사크도, 에리히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긴장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팽팽해지기만 했다. 촛농이 흘러 떨어지는 소리까지 모조리 들리는 것 같았다.
기름을 충분히 먹지 못한 심지가 빠작거리며 타들어 가는 소리가 조용한 유르트 안을 울릴 때마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마음속으로 수를 세었다. 그러면 머리칼을 스치는 빗살의 감촉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어깻죽지에 닿았던 손끝의 희미한 온기와 단단한 느낌도.
“폐하께서 제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의중을 알기 힘든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그대가 생각하고 있는 게 무엇이든, 아마 정답과는 거리가 멀 테지.”
“제가 뭘 생각하는지 안단 말씀인가요?”
“그대가 말해봐. 뭘 생각하는지.”
변함없이 교묘한 화술이다. 아르사크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가 그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숲속에서, 그 천막 안에서 처음 느꼈던 알 수 없는 긴장감이 어느 순간엔가 자신에게로 돌아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론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미묘한 술렁임이 우묵하게 괸 물처럼 소리도 없이 자신을 흔들고 있었다.
“뭘 바라시든, 어떤 생각을 하시든, 제게서 얻긴 힘드시겠죠.”
“그럴 테지.”
에리히가 대답에 아르사크는 내심 실망했다. 그 감각이 실망이라는 것도 뒤늦게야 깨달았다.
불빛이 흔들린다. 에리히의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다. 그런데 흔들린 것은 그림자만이 아니었다.
에리히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아르사크는 미처 대응도 하지 못했다. 마치 쓰러지기라도 하는 듯이 무방비하게 움직인 탓이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아르사크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입술이었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에리히의 몸이 다시 아르사크에게서 멀어진 후였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그대에게 무엇도 바라지 않는다는 걸 안다면, 마음이 좀 편해지겠나?”
그는 여전히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지만 아르사크는 마치 온몸이 돌이 되어버린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