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티리야, 우리에겐 시간이 필요해. 너도 알잖아.”
“맞아요.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요.”
견디기 힘든 일일 것이다. 친숙하던 사람들이 변해가는 것도, 생활이 달라진 것도 티리야는 영영 적응이 되지 않을 것처럼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지 않으려고 해봐도 소용없었다.
해가 지고 마을로 돌아온 사람들이 돈을 세며 그날, 그날의 수입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티리야는 혼자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충동을 더욱더 강하게 느꼈다.
밤이 오면 잠들기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며 모여 앉아 활을 다듬고 활촉을 만들고, 가축들을 먹이기 위해 어디로 이동할지 이야기하던 시절이 그리웠다.
“티리야, 우린 돌아갈 거야. 거기가 자치구든, 아니면 초원이든. 2년 후면 우린 여길 떠날 거야.”
“사실 어디든 좋아요. 이… 이 시끌벅적한 곳만 아니라면요. 사람들이 더 이상 전처럼 떠돌며 생활할 수 없다고 한다면, 좋아요. 그 자치구인지 뭔지 하는 곳으로 가도 전 좋다고요. 하지만 여긴 싫어요. 너무 시끄럽고, 사람들은 너무 많아요. 밖에 나가면… 모두들 우리를 희귀한 짐승 보듯이 쳐다봐요. 아르사크, 상상이 돼요? 어떻게…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살 수 있는지 모르겠어요. 모두 다요.”
“아니야, 티리야. 그건…….”
말하려던 아르사크는 그만 입을 다물어버리고 말았다. 희귀한 짐승 보듯이 쳐다본다는 것. 그건 거짓말이 아닐 것이다. 당장 자신만 하더라도 그런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외부 민족들이 제국으로 귀화하는 사례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들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애를 쓰며 살았다.
토르갈의 경우는 이례적인 것이었다. 부족 전체가 제국으로 와 터를 잡고 살게 된 사례는 여태껏 없었다. 심지어 황실에서 그들을 위해 직접 터전을 마련해 준 일도 없었다.
에리히의 말을 들으면서는 실감하기 어려웠던 것을 아르사크는 이제야 비로소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티리야는 한숨을 쉬며 수놓던 것을 내려놓고 얼굴을 문질렀다.
“차라리 맞붙어 싸우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에요. 시비를 걸어 온다면 받아주겠지만, 멀찌감치 떨어져서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건 정말 질색이에요.”
“무시해. 어차피 너희에게 해를 가할 수는 없어. 내가 그렇게 놔두지 않을 거고.”
“알아요.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아르사크도 약속해 줘요.”
“뭘?”
“꼭 우리에게 돌아온다고요.”
아르사크는 티리야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인 저녁 식사는 요란했다. 집집마다 가지고 있던 융단과 깔개가 모조리 동원되었다. 더 이상 깔개를 쓰지 않는 집이 많아서, 창고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내 먼지를 터느라 또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전부 깔고 보니 그럭저럭 앉을 자리는 마련이 되었다.
에리히는 생전 처음 보는 방식의 요리를 앞에 두고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군소리 없이 먹었다.
아르사크는 내내 뭔가를 고민하는 듯이 말이 없었으나 아이들이 몰려와 왁자지껄 떠드는 사이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식사를 마친 뒤 알린은 아르사크에게 야시장 구경을 하고 올 것을 권했다. 에리히의 존재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수행원 하나 없는 황제를 능숙하게 시중들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이 마을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병사들과 지휘관이 있는 막사로 보내놓자니 그것도 그림이 좀 이상하다.
아르사크는 알린의 곤란한 심정을 알아차리고, 차를 마시고 있던 에리히를 일으켜 세웠다.
“어디 가?”
“야시장이 있다더군요. 구경을 하러 갈까 해서요. 폐하께선 야시장을 본 적 있으신가요?”
“아주 어릴 때 가본 적이 있어. 수확제 시기가 되면 며칠 동안 밤낮으로 축제를 여는데, 그때 야시장이 열리지. 테오도르와 몰래 나갔다가 들켜 선황께 엄청나게 혼이 났던 기억이 나는군.”
열 살도 되기 전의 기억이다. 그때 테오도르는 어머니와 함께 자주 황궁에 드나들곤 했었다. 선황이 미리 그를 에리히의 측근으로 점찍었기 때문에, 어렸을 때부터 검술 수업을 같이 받으며 친구처럼 자랐다.
수확제의 들뜬 분위기는 어린애들의 마음을 충동질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요란한 불빛이 번쩍거리는 거리를 헤매고 다니면서 마치 꿈속을 헤매는 것처럼 즐거웠던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나 튈브리크의 야시장은 그때 보았던 야시장과는 차원이 달랐다. 야시장이라고 할지, 아예 이 구역 전체가 잠들지 않는 도시 같았다. 상점마다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고, 낮 동안 경매나 흥정으로 시끌벅적하던 광장에는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노점과 좌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간식거리나 놀잇감에서부터 싸구려 장신구, 동전 몇 개를 받고 간단한 점을 쳐주는 점쟁이도 있었다. 말이나 마차를 몰고 다닐 틈조차 없어서, 귀족이나 평민이 할 것 없이 노점 사이를 걸어 다니며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굉장하네요.”
번쩍거리는 불빛을 보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황궁으로 온 이후 별 희한하고 신기한 것들을 다 보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별세계 같았다.
“이걸 좀 보세요.”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눈을 돌렸다. 여러 가지 모양의 투명한 유리병 안에 깨끗한 물이 차 있고, 그 물 안에 꽃송이들이 떠 있었다. 좌판 아래에서 비추는 빛 때문에 꽃들은 신비한 무언가처럼 보였다. 아르사크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병을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어떻게 만든 걸까요? 꽃을 꺾으면 금방 시들 텐데.”
“그건 진짜 꽃이 아니야. 천이나 유리로 만든 가짜 꽃이지. 안에 든 것도 그냥 물이 아니라 약품이고.”
“정말 정교하게 만들었네요. 얼핏 봐서는 진짜 같아요.”
그런 건 꽃뿐만이 아니었다. 반짝거리는 장신구들은 모두 유리 아니면 값싼 광물을 다듬어 만든 것들이었지만 진짜 보석 못지않게 아름다운 광택을 뽐냈다. 화려하게 빛나는 불빛 때문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지만, 한순간 사람들의 눈을 홀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한 것이었다.
노점 사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아르사크는 문득 무언가 자신을 뒤로 잡아당기는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니 에리히가 손목을 잡고 있었다.
“폐하?”
아르사크의 말에 주변을 지나가던 몇몇 사람이 놀라서 웅성거리며 걸음을 멈췄다. 에리히는 그들을 흘끔 둘러보고는 아르사크의 손을 잡은 채 다시 인파 속으로 모습을 감추듯 들어갔다.
“잠깐만요……. 뭐 하시는 겁니까?”
“그냥 이름을 불러. 괜히 소란 만들지 말고.”
“무슨… 알겠습니다. 그런데 손은 좀 놓을 수 없나요?”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미아라도 되면 볼만하겠지?”
“누가 미아가 된단 말인가요? 아, 당신이 절 잃어버리고 여기 한복판에서 다섯 살 먹은 꼬마처럼 울까 봐 걱정하시는 건가요?”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야?”
“그럼 저 사람더러 하는 소리일까요?”
그러면서 한쪽 길가에 서서 공으로 묘기를 부리고 있는 광대를 가리켰다. 에리히는 기도 안 찬다는 듯한 웃음소리를 내고는 아르사크의 손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멋대로 돌아다니다 병사 풀어서 찾게 만들지 말라는 얘기야.”
“길 잃을까 겁이 나면 그렇다고 말씀을 하시지.”
북적대는 사람들 사이로 손을 잡고 걷자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지만 구경하느라 정신이 팔린 아르사크는 별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에리히는 조심성 없이 지나다니는 행인들의 어깨나 팔이 아르사크를 툭툭 치고 지나갈 때마다 눈썹을 찡그리다가 뺨을 실룩이며 아르사크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곤 했다. 둘의 어깨가 거의 맞닿다시피 했을 때, 아르사크는 그제야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전 유리 인형이 아닙니다. 그렇게 쩔쩔매지 않으셔도 돼요. 안 어울리게.”
“말 좀 곱게 하면 죽기라도 해?”
“맞는 말이잖아요. 이러시는 게 어울린다 보십니까?”
물론 안 어울리는 짓이기는 했다. 그러나 에리히는 그것을 인정하는 대신 자기 쪽으로 더욱더 가까이 아르사크를 당겼다.
선 채로 버티면 에리히가 어떤 반응을 할까 잠시 고민하던 아르사크는 못 이기는 척 그의 옆에 붙다시피 서서 걸었다.
황궁 안에서와는 다른 향기가 났다. 불과 노랫소리와 반짝이는 색깔의 빛, 왁자지껄한 시장통에서 묻은 것 같은 모든 향이 그의 주변에서 독특한 흐름으로 머물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둘은 가장 북적이는 거리를 벗어나 분수대 쪽으로 갔다. 아이들이 막대 불꽃을 가지고 분수대에 걸터앉아 깔깔거리며 놀고 있었다.
둘러보니 아이들만 막대 불꽃을 갖고 있는 게 아니었다. 겹겹이 쌓아놓은 모래 상자에 막대 불꽃을 꽂으며 무언가 기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에리히는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상인에게 주고는 막대 불꽃을 하나 샀다. 뜻밖의 횡재를 한 상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에리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금화를 깨물어보고는 이게 웬 떡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사 온 불꽃을 보다가 픽 웃으며 상인을 턱짓했다.
“당신에게 절이라도 할 기세네요.”
“내가 누군지 알면 돈을 안 줬어도 절을 해야 할 판이었을 텐데, 황제라고 하고 그냥 하나 받아올 걸 그랬나?”
“그런 차림으로요? 믿기나 했을까요?”
아르사크의 말에 에리히는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 입고 왔던 옷은 저녁 식사를 하기엔 거추장스러워서 알린의 옷을 빌려 입었던 것이다. 그러는 아르사크도 호화로운 드레스를 벗어 누구도 그녀가 황후라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에리히는 분수대에 앉아 떠들던 어린아이에게서 부시를 빌려 막대 끝에 불을 붙였다. 처음에는 불이 잘 붙지 않는가 싶더니, 갑자기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조그만 불꽃이 이리저리로 뻗어 나가듯 튀어 올랐다. 쉼 없이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작은 꽃송이를 보는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막대를 든 채 불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불빛에 물든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던 에리히는 모래 상자가 쌓인 곳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저기다 꽂고 소원을 비는 거야.”
“빌고 싶은 소원이 있나요?”
“난 소원 같은 건 안 빌어. 기도도 안 하고.”
“나도 그래요. 뜻밖의 공통점이 있군요.”
팟팟 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꽃을 보고 있자니 왠지 꿈에 잠기는 것처럼 몽롱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손을 잡고 분수대 가장자리에 기대듯 걸터앉았다. 그리고 막대 하나가 다 타들어 갈 때까지 불꽃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에리히는 불빛이 까물거리는 아르사크의 옆얼굴을 보다가 여전히 맞잡고 있는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정체를 깨닫기 힘든 이상한 예감 같은 것이 술렁거리며 몸속을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