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아르사크는 처음으로 튈브리크에 온 것을 약간 후회했다. 부족민들에게는 더 이상 자신이 필요하지 않았다.
부족을 이끌고 가축을 먹여 기를 땅을 찾고, 사냥을 이끌 족장 따위는 이곳에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다. 그러지 않아도 살 수 있으니까.
겨울이 닥칠 때마다 가축이 얼어 죽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비축한 식량으로 봄까지 무사히 날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부족민들은 이미 그런 삶을 살고 있었고, 거기에 익숙해진 것처럼 보였다.
병사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누구 하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분노하는 것은 아르사크, 자신뿐이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서슬이 퍼렇던 눈에서 점점 힘이 빠졌다. 테이블을 쥔 채 덜덜 떨리던 손도 미끄러졌다. 아르사크는 의자에 걸터앉으며 이마를 싸쥐었다.
“내가 뭘 하는 걸까요?”
에리히는 아무런 대답 없이 아르사크의 숙인 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사크도 딱히 대답을 바라고 한 말은 아니었으므로 침묵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
출발하기 전 로즈안나가 머리에 꽂아주었던 진주 핀을 빼낸 아르사크는 흠집 하나 없이 반짝이는 동그란 진주알을 내려다보다 바닥에 있는 힘껏 내던졌다. 은으로 된 핀에서 떨어져 나온 진주들이 바닥을 굴렀다.
“낯선 치장을 하고, 낯선 옷을 입고, 낯선 것을 먹으면서, 나도 점점 낯설어지고 있어요. 그러는 사이 내 부족민들까지도 낯설게 변해버렸군요.”
“사과하지는 않겠어.”
“왜죠? 뻔뻔하니까? 황제로서 자존심이 상하니까?”
“아니.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아르사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에리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태연히 말했다.
“선택한 건 그대 자신이 아닌가?”
“선택이라고요? 위협하고 겁박을 해서 억지로 끌고 온 사람이 지껄일 말인가요?”
“죽더라도 싸우지 그랬나? 그토록 싫었다면 말이야. 부족민들은 그대의 결정을 따랐을 테고, 그랬다면 낯설게 변해버렸다느니 운운할 필요도 없었겠지.”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아르사크의 손이 에리히의 멱살을 향해 뻗쳤다. 그러나 그보다 손목을 거머쥐는 에리히의 손이 조금 더 빨랐다. 아르사크는 이를 갈며 다른 손을 뻗쳐 기어이 에리히의 셔츠 앞섶을 잡아챘다. 이번에는 에리히가 막지 않았다.
서로 밀고 당기는 힘겨루기나 다름없는 꼴을 한 채, 아르사크는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에리히의 얼굴이 가까이로 바짝 당겨졌다. 거칠게 내쉬는 숨소리가 서로의 입술 위로 가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에리히는 개의치 않고 아르사크 쪽으로 더욱 깊숙이 고개를 기울였다.
“나는 네게 자유를 약속했다. 그리고 너는 내게 그 대가로 2년의 시간을 약속했지. 그 잠깐의 시간조차 참지 못하는 인내심으로 부족을 이끌겠다고? 겨우 그 정도 각오로 나의 황후가 되는 길을 선택했나? 안타깝지만 오산이야. 나는 그 약속에 목숨을 걸었지. 그렇다면 너도 내게 목숨을 걸어.”
“헛소리 지껄이지 마. 내 부족민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난 뭐든지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신이 원하는 대로 놀아나 준 것일 뿐이야. 내가 바란 선택이 아니라.”
“놀아나 준 것 역시 선택의 일환이지.”
아르사크의 손을 뿌리친 에리히는 냉랭한 표정 그대로 흐트러진 앞섶을 대충 당겨 정리했다.
“병사들을 배치한 건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인상을 찌푸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른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감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병사들이 마을 주변을 돌아다니죠?”
“이 마을을 지키기 위해서지, 다른 이유가 뭐가 있겠어?”
“토르갈은 누군가의 보호를 필요로 할 만큼 약하지 않습니다.”
“그래? 과연 그럴까? 기껏해야 백 명도 안 되는 이 이방인들을 내쫓기 위해 불한당들이 수백 명씩 몰려와도 병사들이 필요 없을 거라 생각하나?”
아르사크의 얼굴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에리히는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쪽 팔을 테이블에 걸쳤다.
“제국 내부에도 굶주리는 사람들은 수없이 많다. 외곽으로 갈수록 더더욱 그렇지. 최대한 그들을 구제하려 애쓰고는 있지만, 귀족들의 착복이나 탈세가 계속되는 이상 아무리 해봐야 모래에 물 붓기나 다름이 없어. 그런데 난데없이 변방의 유목민들을 위해 마을을 세우고, 그들의 생활을 돌보기 위해 세금을 쓰고, 수도에서 가장 큰 상업 지구에 조합 등록도 없이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준다? 지금 이곳의 부족민들보다 형편이 어려운 시민들이 튈브리크에도 많아. 만약 병사들을 배치해두지 않았다면, 누군가 벌써 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도 남았을 테지.”
“그럴 리가요? 그런 사고를 막기 위해 총독이 존재하는 게 아닙니까.”
“튈브리크의 총독은 최소한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한 자다. 이곳의 실세는 상인 조합의 대표들, 그것도 수도 귀족들과 줄줄이 연관되어 있는 대상(大商)들이지. 그들은 상인 계급이기 때문에 정치에는 참여할 수 없지만, 그 정치를 배후에서 주무를 수 있는 막대한 돈을 가지고 있어. 그들 중 누군가가 이 마을이 사라지길 원한다면 누구도 그걸 막을 수 없다.”
아르사크는 입을 일자로 다문 채 침묵했다. 에리히가 없는 말을 꾸며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광장에서 여기까지 오는 길에 마주쳤던, 수없이 많은 적대적인 시선들이 그의 말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자신은 황후의 자리에 있었다. 아무리 정식 행차가 아니라지만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수 있을 리 없는 인물이다. 황후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토록 적의 어린 시선으로 쳐다본다는 것은, 곧 아르사크가 누리는 모든 것을 단 하나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물며 같은 평민, 부와 권력을 가진 것조차 아닌 부족민들에게 그런 사람들이 어떤 대우를 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티리야는 병사들이 부족민들을 감시한다고 말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할 테지. 병사들에게는 마을 사람들에게 어떤 언급도 하지 말라고 일러뒀으니까.”
“어째서입니까? 보호 중이라는 것을 알려줄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알릴 필요가 없어. 오히려 모를수록 낫지. 제국의 병사들이 토르갈 부족민을 따로 보호하고 있다는 말이 돌면 그것도 소요의 원인이 될 테니까. 황제인 내가 제국의 신민들을 의심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진다면 이 마을에 무슨 도움이 될까?”
아르사크는 주먹을 꾹 쥐었다가 이내 힘을 풀었다. 이번에는 에리히를 향해 내는 화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화가 났다.
자신의 부족민들이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위태로운 낭떠러지를 걷고 있는데, 그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에 속이 뒤집어질 것 같았다.
“그대가 그대의 부족민을 보호하고 싶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야. 그대가 황후로서 인정을 받는 거지.”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이제 와서 약한 소리 해봐야 안 먹혀.”
“저는 제국의 정치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벌어진 싸움판에 휘말려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면, 아무도 건드리지 못할 만큼 강한 자가 되는 수밖에는 없어. 감히 그대를 끌어내리려는 시도조차 못 하도록 말이야.”
찻잔에 남은 차는 이미 다 식어 있었다. 아르사크는 찻잔 테두리에 얇게 말라붙은 흰 소금기를 바라보다가 눈을 감으며 짧은 한숨을 쉬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새삼스럽게 자각하자 밀려드는 막막함이 있었다.
그러나 막막한 일이라면 얼마든지 겪어왔다. 이보다 더한 일이 수도 없이 많았다.
아르사크는 핀이 빠져 거추장스럽게 흘러내린 머리를 아예 풀어 내린 뒤 에리히를 바라보았다.
“그래요. 폐하의 말이 맞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혼란스럽거나 고민하는 표정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결심했다면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폐하께서 제 밑받침이 돼주셔야 하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수도 귀족들은 모두들 거미처럼 함정을 판 채 제가 걸려들기만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황제를 발밑에 두고 부리고 싶다는 말을 당당하게도 하는군.”
“배 밑에 두고 싶다는 말보다는 낫잖아요?”
에리히는 잠시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듯 미간을 좁혔다가 헛웃음을 쳤다.
48장 의혹과 소문 (7)
조용하던 마을은 아르사크와 에리히의 방문으로 삽시간에 잔치 준비라도 하는 듯이 부산해졌다. 마을 뒤쪽에서는 양을 잡았고 집집마다 솥과 냄비를 꺼내와 음식을 만들었다.
지나다니던 주변 사람들까지 무슨 일인가 싶어 웅성거리고 모여들었다가 황제와 황후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저희들끼리 수군거리며 흩어졌다 모여들기를 반복했다.
에리히가 마을을 지키는 지휘관들을 만나러 간 사이, 아르사크는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오래간만에 낯익은 고향으로 돌아온 기분에 흠뻑 빠져들었다.
익숙한 재료들과 익숙한 향신료 냄새, 익숙한 요리들. 불린 쌀을 휘저으며 볶고 있던 소녀가 흥얼거리며 노래를 하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르사크는, 이 잔치에 적극적으로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을 발견했다. 티리야였다.
티리야는 음식 준비 같은 것은 도울 생각도 없다는 듯이 없는 사람처럼 한쪽에 앉아 뜬금없이 수를 놓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여 가며 등 뒤로 다가간 아르사크가 어깨를 짚어 놀래키기 직전, 티리야가 말했다.
“뒤에 와 있는 것 다 알아요, 아르사크.”
아르사크는 김샜다는 표정으로 푸, 하는 소리를 내고는 티리야의 옆에 앉았다. 그녀는 팽팽하게 당긴 천 위에 넝쿨을 수놓고 있었다.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야?”
“그런 것 아니에요.”
“아니긴. 다른 사람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이지. 말해봐, 왜 그런지.”
티리야는 그제야 바늘을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아르사크를 빤히 바라보았다. 동그란 눈동자는 아르사크를 질책하는 것 같기도 했고, 무언가를 호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르사크는 티리야가 어렸을 때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염병으로 부모와 일가친척을 모조리 잃고 혼자가 된 티리야를 돌봐준 것이 아르사크였다. 티리야에게는 아르사크가 세상의 전부일 수밖에 없었다. 엄마였고, 아빠였고, 언니였으며 믿고 따를 족장이었다.
“난… 아르사크가 우릴 데리러 왔다고 생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