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아저씨, 건강은 어때요? 아픈 데는 없어요?”
“괜찮아. 난 괜찮다. 도대체 네가 여긴 어떻게… 아니, 아니지. 이젠 이렇게 부르면 안 되는데…….”
“무슨 말이에요? 아저씨는 제 아버지의 오랜 친구인데. 여태까지처럼 아르사크라고 부르세요. 그게 더 좋아요.”
그러나 데르가는 에리히와 테오도르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황제 앞에서 황후를 사사로이 부른다는 것은 생각하기 힘든 일이다. 아르사크는 데르가의 갈등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데르가에게서 천천히 떨어지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아저씨, 다들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보러 왔어요.”
“그… 그렇구나. 아니, 그러셨군요.”
데르가가 머뭇거리듯 어색하게 말했다. 아르사크는 잇새로 혀를 꾹 깨물면서 그에게 안내를 부탁했다. 그리고 데르가가 앉아 있던 좌판을 흘긋 쳐다보았다.
가죽으로 만든 칼집이나 허리띠, 말고삐 같은 것들이 눈에 띄었다. 옛날부터 가죽을 잘 다루던 사람이다. 여기서도 그 특기를 살려 장사를 하는 모양이었다.
토르갈 부족민이 사는 곳 주변은 여전히 병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아르사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당장은 그것을 따지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는 이미 뛰고 있었다. 병사들은 한눈에 아르사크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멀리서 걸어오는 에리히와 테오도르를 보고서는 당황하며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아르사크는 그들을 무시한 채 안으로 뛰어들었다.
가장 먼저 아르사크를 발견한 것은 티리야였다.
“아르사크!”
“티리야!”
티리야는 다듬고 있던 약초를 팽개치고 달려와 아르사크의 손을 꽉 맞잡았다. 마을에 남아있던 사람들, 시장에 나가 있다가 소식을 듣고 온 사람들, 모두가 아르사크 주변으로 몰려들어 한바탕 북새통이었다. 에리히와 테오도르는 완전히 뒷전이었다.
“맙소사, 이 옷은 대체 뭐야? 황후라서 이런 걸 입는 거야?”
“대체 값이 얼마일지 짐작도 안 되는데.”
주변에서 그런 말들이 들려오자 아르사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발끈해서 소리치려는 티리야를 눈짓으로 말리며, 아르사크는 부족민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천천히 뜯어보았다.
결혼식 때 보았던 사람들도 있었고, 제국으로 온 후 한 번도 못 본 사람들도 있었다. 모두 다 건강해 보였다. 굶주림이나 병 같은 불행은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 같았다.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정말로요.”
“우리는 모두 잘 지내고 있어요. 아픈 사람도 없고, 죽은 사람도 없고요. 족장님에 대한… 아니, 황후 마마에 대한 소식도 꾸준히 듣고…….”
“그냥 족장이라고 불러도 돼. 아르사크라고 불러도 되고, 알린.”
아르사크가 말했다. 티리야가 그것 보라는 듯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알린은 멀찌감치 선 에리히와 테오도르를 힐끔 보더니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겁쟁이. 황제가 무서워서 족장님을 족장님이라고 부르지도 못해?”
“야, 티리야! 너……!”
“티리야, 알린을 너무 나무라지 마. 그리고 다들, 날 어떻게 부르든 상관없어요. 지금의 나는 카툴라의 황후지만, 동시에 토르갈의 족장이기도 해요. 그리고 하르슈의 자손인 아르사크이며, 여전히 가장 높은 곳을 나는 매예요.”
아르사크의 말은 토르갈 부족민들 사이에 기묘한 울림을 가져다주었다. 말도, 양도, 활과 화살조차도 모두 팔아버린 채 제국에 정착한 그들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사크의 흔들림 없는 눈은 초원을 누비며 바람을 맞던 그때와 비교해 전혀 달라지지도, 무뎌지지도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리히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이 묘한 기분을 느꼈다. 황궁 안에서, 황후로서 얼굴을 마주하는 아르사크와 지금의 아르사크는 분명히 다른 데가 있었다.
눈으로 보기에는 무엇 하나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아르사크는 카툴라의 황후도, 자신의 시한부 아내도 아니었다. 단지 이들을 이끄는 토르갈의 족장이었다. 당장이라도 말을 달려 머나먼 곳으로 떠날 것 같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테오도르.”
“예, 폐하.”
“너는 지금 황궁으로 돌아가라. 그리고 오늘은 내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측근들 이외에는 모르게 해라.”
“괜찮으시겠습니까? 폐하, 튈브리크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곳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괜찮으니까 가. 내일 저녁이 되기 전에는 돌아갈 것이다.”
머뭇거리던 테오도르는 별수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 아르사크는 부족민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에리히에게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 자리에 에리히가 있다는 사실마저도 잊어버린 듯했다.
누군가 에리히 쪽을 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한 뒤에야 아르사크는 에리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폐하, 테오도르는 어디로 갔습니까?”
“돌려보냈어.”
사람들이 다시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눈치 빠르게 행동한 것은 알린이었다.
“아르사크, 폐하를 모시고 날 따라와. 차를 준비할게.”
47장 의혹과 소문 (6)
알린은 자신의 집으로 아르사크와 에리히를 데리고 들어갔다. 흙벽을 세우고 나무를 이용해 지은 소박한 집이긴 하지만 깔끔하고 튼튼해 보였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영 낯선 표정으로 집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앉으십시오.”
나무로 된 테이블과 의자를 가리키며 알린이 말했다. 바닥에도 나무를 짜 맞춰 깔았고, 안쪽으로는 작은 방 두 개가 보였다. 얼핏 들여다보니 침대가 보였다.
토르갈에서는 아무도 침대를 사용하지 않았다. 천과 가죽, 나무 기둥을 이용한 집을 만들었으며 자수를 놓은 융단과 양탄자로 바닥과 벽을 장식했다. 이 집에는 그런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제국식으로 지은 집이어서 오히려 알린의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낯선 감각에 아르사크가 어리둥절한 사이, 알린은 차를 끓여 왔다. 곁들인 것이 과자가 아니라는 점은 토르갈다웠다. 볶은 견과류와 말린 과일이 나무로 된 접시에 놓여 있었다. 아르사크는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매만졌다.
“말린 과일은 오랜만에 봐.”
“제국에서는 이걸 먹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요. 몇 가지 팔아봤더니 반응이 꽤 괜찮아서, 다음 해에 과일을 많이 구할 수 있으면 본격적으로 팔아볼까 싶은…….”
말을 잇던 알린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아르사크를 힐끔 바라보았다. 티리야가 이 자리에 없는 게 다행이었다. 만약 티리야가 있었더라면 또 정강이를 걷어차이고도 남았을 것이다.
“살기에 불편한 점은 없나?”
계속 침묵을 지키고 있던 에리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알린은 움찔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없습니다.”
“다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야.”
아르사크가 말하자, 에리히는 다시 입을 다물고 차를 마셨다. 항상 황궁에서 마시던 차와는 다른 맛이 났다.
황실이나 귀족가에서 소비하는 찻잎보다 질이 나쁜 탓도 있겠지만, 차이점이 그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묘한 향기가 나는 데다가 차라기에는 약간 짭짤한 맛이 났다.
“이 차는 뭘로 끓인 거지?”
“네? 아, 네. 어, 이건… 뜬꽃이라는 꽃으로 끓인 차입니다.”
“뜬꽃?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군.”
“아… 네, 여기선 다들 그 꽃을 잡초 취급하더라고요. 줄기가 워낙 가늘어 꽃이 피면 허공에 떠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뜬꽃이라고 부르는데, 숲의 길가에 가보면 아무 데나 피어 있습니다.”
“짠맛이 나는 이유는?”
“이 꽃으로 만든 차에는 원래 소금을 살짝 타서 마시는 게 몸에 좋거든요.”
알린이 말했다. 아르사크는 간만에 마시는 뜬꽃차가 마음에 드는지 연신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그런 아르사크를 물끄러미 보던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몇 모금 더 마셨다. 아무리 마셔도 그 희한한 맛이 혀에 감기지는 않았지만, 한 잔을 다 마시고 나자 배 속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도는 것이 느껴졌다.
“알린, 잠시만 자리를 좀 비켜주겠어?”
알린은 아르사크를 바라보고, 그다음에는 에리히를 한번 바라본 뒤 다시 아르사크와 눈을 마주쳤다.
알린이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자, 아르사크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에리히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따지고 싶은 게 아니라?”
“둘 다라고 할 수 있겠군요. 따져 묻는다고 하죠.”
“해봐.”
“왜 아직까지 병사들을 물리지 않으셨습니까? 아직도 내 부족민들을 인질로 잡아두고 있는 건가요?”
데르가의 안내를 받아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 아르사크는 주변을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보자마자 그들에게 당장 꺼지라고 소리를 칠 뻔했다.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아예 마을 주변을 빙 둘러 서 있었고, 모두 갑옷과 창으로 무장을 한 상태였다.
“병사들은 그냥 마을 밖에 서 있을 뿐이다. 그대의 부족민들을 위협하는 것도 아닌데 문제 될 것이 있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요? 죄지은 자들을 몰아넣어 가둔 것이나 다름없는 꼴을 만들어 놓고?”
“그대가 황실과 황제에게 저지른 불경죄를 감안한다면 그러고도 남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나?”
에리히가 빈정거렸다. 그러자마자 아르사크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에리히는 무시무시한 기세로 자신을 노려보는 아르사크를 삐딱하게 쳐다보며 팔짱을 끼었다. 소란에 놀란 알린은 문을 열었다가 아르사크의 형형한 시선을 보고 도로 얼른 문을 닫았다.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 아니기를 바랍니다, 폐하. 지금 이 자리에서 후회하게 만들어드릴 수도 있으니까요.”
“토르갈만 얽히면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변하는 이유가 뭐지? 이들은 여기서 잘 살고 있어. 그대의 눈으로 똑똑히 보지 않았나?”
‘잘 살고 있다.’는 말이 아르사크를 더욱 분노하게 했다. 그러나 반대로 말문을 잃게도 만들었다.
에리히의 말대로, 부족민들은 분명 ‘잘 살고’ 있었다. 굶주리지도 않고, 학대받은 흔적도 없고, 병든 사람도 죽은 사람도 없었다.
알린의 집만 해도, 소박하나마 깔끔하게 갖추어진 살림살이들로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다. 이런 집이라면 모래바람이나 추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굶주린 늑대나 이리떼의 침입을 경계할 필요도 없다.
객관적인 기준에서 보자면 부족민들은 초원과 사막에서보다 훨씬 ‘잘 살고’ 있음을 아르사크도 부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는 그 사실을 순순히 납득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