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화
“어느 쪽도 아니셨지.”
“이런 상황에서 어느 쪽도 아니라는 건 결국 반대하신다는 뜻 아닌가요?”
“농경지가 더 필요하다는 생각 자체에는 동의하셨어. 다만 시기상조라고 말씀하셨을 뿐.”
“폐하의 말씀으로는 어떻게 들어도 시기상조라고 할 수 없는데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제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정말로 듣고 싶으십니까?”
잠시 생각하던 에리히는 결국 아르사크의 말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여쭤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군요.”
아르사크가 못을 박듯이 말했다. 신행에서 돌아왔을 때, 위든은 이미 수도에 없었다.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수도 경계에 도착했을 때쯤 서찰 한 장만을 남긴 채 디몰트로 떠났다는 것이다.
공교로운 엇갈림이었지만, 영지를 너무 오래 비웠다는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게다가 내내 수도에 있었던 위든이, 10년 전 사건의 전말에 대해 아르사크가 알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리도 없었다.
위든이 아르사크와 마주치는 것이 껄끄러워 디몰트로 떠났다는 것은 억측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에리히와 아르사크 모두 찜찜한 기분을 지울 수는 없었다.
“튈브리크라는 곳은 얼마나 걸리죠?”
“가까워. 왜?”
“아뇨, 그냥. 마음의 준비를 좀 하고 싶어서요.”
“마음의 준비씩이나 필요한 사람들인가?”
이번에는 아르사크 쪽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부족민을 몹시 아끼며, 그들을 위해서라면 어떤 일도 하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로 인해 아르사크가 미묘한 갈등을 겪고 있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유목민들이 자신들의 생활을 포기하고 정착하여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말과 가축을 팔아버리고 더 이상 사냥마저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단지 삶의 방식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들 나름의 긍지를 저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홀드빅의 딸이 또 그대를 찾았다는 말을 들었다.”
아르사크가 말을 하지 않자 에리히가 자연스럽게 화제를 옮겼다.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쥐고 있던 고삐를 살짝 당겼다. 내달리려 하던 말의 걸음이 약간 느려졌다.
“찾아올 때마다 매번 상대하지 않아도 될 텐데.”
“이번엔 제가 부른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뜻밖이었다. 에리히는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가 왜냐는 듯이 아르사크를 빤히 쳐다보았다. 아르사크는 소문에 대한 이야기를 에리히에게 할까 말까 잠시 망설였다.
“그대가 불렀다니, 홀드빅의 딸을? 왜지?”
“음… 드레스에 대한 조언을 구하려고요.”
“새삼스레 귀부인들의 찬사를 받고 싶어?”
“조롱보다야 찬사가 훨씬 듣기 좋죠. 그래서 불렀습니다. 홀드빅 자작가의 딸이라면 아마 저보다 유행하는 디자인을 많이 알고 있을 테니까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그러나 에리히는 더 캐묻지 않았다. 여름과 겨울마다 한 번씩, 황후가 직접 고른 드레스가 그해의 유행이 된다는 것은 에리히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아르사크 혼자 하기에는 어려울 만도 한 일이었다. 로즈안나도 안목은 남에게 뒤지지 않지만, 황후가 시녀에게 시시콜콜 조언을 구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아르사크가 그 정도는 생각했으리라고, 에리히는 믿고 있었다.
“가까이하는 건 그대의 자유지만, 지금 수도 귀족들 중 그대를 가장 눈엣가시로 여기는 자가 바로 홀드빅이라는 것도 잊지 말았으면 좋겠군.”
“또 모르죠. 새끼 여우를 매달아서 더 큰 여우를 잡을 수 있을지.”
홀드빅 자작이 들었더라면 입에 거품을 물고 넘어갔을 말을 태연하게 하면서, 아르사크는 루이제가 과연 자신이 시킨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해낼지 고민했다.
46장 의혹과 소문 (5)
튈브리크의 광장으로 접어드는 입구에는 거대한 기둥으로 세운 문이 있다. 문짝은 달려 있지 않지만 튈브리크 중앙으로 곧장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문이었다.
양쪽을 떠받친 두 개의 기둥과 그 위로 놓인 세 개의 가로대는 모두 철을 사용해 만들었고, 가로대 양쪽에도 역시 철을 두드려 만든 쇠판이 걸려 있었다.
“저기에 새겨진 말은 어떻게 읽는 건가요?”
문 아래를 막 통과하려던 아르사크가 물었다. 에리히는 고개를 들고 쇠판을 흘긋 올려다보고는 말했다.
“‘주머니 속의 금화를 정직하게 헤아리라. 그렇지 않으면 그 속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읽는다.”
“제국에 전해지는 경구인가요?”
“정확히는 튈브리크의 경구지. 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상업으로 번창한 곳이었으니까. 값을 속이려 들다가는 주머니만 털리고 끝나지 않을지도 모르거든.”
듣기에 따라서는 섬찟할 수도 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제국에서 가장 큰 상업 지구에 정직한 상인들만 몰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협잡꾼, 사기꾼, 어리숙한 얼굴로 한탕 해보려는 도둑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각지에서 몰려든다면, 규칙이 엄격해야 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이곳은 누가 다스립니까?”
“튈브리크는 수도 안에서는 유일하게 황실의 소유인 지역이다. 이런 곳을 어느 한 사람의 손에 맡겨놓을 수는 없지.”
“하지만 관리자는 있을 텐데요.”
“맞아. 튈브리크에는 총독이 있지. 지금은 한스라는 자가 총독의 지위에 있는데, 내년이면 다른 사람으로 바뀔 거다.”
“기간제인가요?”
“그래. 3년에 한 번씩 바뀌지. 각 지방의 귀족들이 돌아가면서 맡으니까 굳이 아귀들처럼 몰려들어 총독 지위를 놓고 싸울 일도 없고.”
그것은 현명한 방식이었다. 그렇다 한들 누군가 음흉한 속셈으로 손을 뻗치고자 한다면 그러지 못할 것도 없었지만, 지위가 한 사람이나 가문에 고정되는 방식이 아니니 뻗친 손을 유지하는 것이 훨씬 힘들었다.
게다가 튈브리크에는 상인들이 모여 만든 각종 조합과 조직이 있었고, 그들이 총독보다 훨씬 더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중앙 광장으로 진입하자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조리 그들에게로 날아들었다.
이층, 삼층으로 건물을 올린 큰 규모의 상점 주인에서부터 좌판이나 노점을 펴 놓고 있던 사람들, 악을 쓰며 흥정에 매달리던 사람들까지 모두 다 웅성거리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어마어마한 인파에 눈을 둥그렇게 떴다.
“…굉장하군요.”
“말에서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 인파에 깔려 죽는 게 무슨 말인지 몸소 체험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폐하야말로 고삐를 잘 잡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여긴 귀족들도 많은 것 같은데, 누가 돌이라도 던지면 어쩌시려고요?”
광장은 말만 광장일 뿐, 그곳도 하나의 거대한 시장이었다. 주로 큰 상점들이 모여 있고, 경매 같은 것들이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이 중앙 광장으로부터 각각 다른 방향으로 뻗어 나가는 거리가 다섯 개 있어서, 튈브리크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이곳은 오거리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각각의 거리는 또 제가끔의 특징이 있었다. 드레스와 향수, 화장품, 구두에서부터 옷감의 원단과 가죽을 파는 곳, 보석과 장신구, 무기, 가구, 곡식과 농수산물, 서적, 약… 돈만 충분하다면, 튈브리크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도 좋았다.
구리 동전 한 개로 살 수 있는 작은 꽃다발에서부터, 금화를 수레째 실어와도 살 수 있을까 말까 한 보석까지 없는 게 없었다.
아르사크는 도대체 어디에 정신을 집중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얼떨떨했다. 어디로 고개를 돌려도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지나다니는 마차와 말, 수레가 너무나 많았다. 사람은 그보다 더 많았고, 물건은 사람보다 훨씬 더 많았다.
“마을은 대체 어디 있는 건가요?”
“마을은 외곽에 위치해 있다. 튈브리크는 중앙 광장에서 다섯 개의 거리로 뻗어 나가면서 시장이 형성돼 있고, 마을은 바깥쪽을 둥그렇게 두르고 있는 모양으로 되어 있지. 그대의 부족민들이 사는 곳은 이쪽이다.”
에리히는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뻗은 거리로 말을 몰았다.
아르사크는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표정이 굉장히 다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체로 호기심 섞인 시선을 보내왔지만, 개중에는 무척 불쾌해하는 것 같은 시선도 있었다. 제국 바깥에서 온 이방인을 황후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귀족들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절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꽤 많군요.”
“그래서 겁나?”
“아뇨. 여기서 신나게 말을 타는 걸 보여주고 싶네요. 입이 쩍 벌어져서 다시는 밥을 먹을 수 없게 되면 그때는 반성하겠죠.”
“상인 조합이 어마어마한 복구 비용을 청구할 테니 금광이라도 찾거든 그렇게 해.”
세 사람이 들어선 거리는 광장보다는 덜 북적거렸지만 짐마차나 일꾼들이 많이 지나다녀 말을 몰기에 불편했다. 결국 셋은 말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테오도르는 주변 상가를 총괄하는 상인 대표에게 말을 맡겨두고 에리히와 아르사크를 따라왔다. 광장과 가까운 초입에는 원단과 드레스, 구두 등을 파는 큰 가게들이 많았지만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상가의 규모는 작아지고 평범한 마을 시장 같은 모습이 뚜렷해졌다.
노점이나 좌판의 수가 늘어났고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점점 더 평범해졌다. 파는 물건도 두서가 없었다.
아르사크는 과일을 쌓아놓고 파는 좌판 근처를 지나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데르가 아저씨!”
아르사크가 갑자기 소리를 치자 반 발짝 앞서 걷던 에리히도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데르가라고 불린 중년의 남자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으며 아르사크를 쳐다보고 있다가, 갑자기 벌여놓은 좌판을 뒤엎을 기세로 뛰쳐나왔다.
“아르사크!”
난데없이 달려든 그의 몸을 껴안자 코끝이 찡하게 저렸다. 아르사크는 울지 않기 위해 입술 안쪽을 꽉 깨물면서 데르가를 이리저리 살폈다.
예식을 마치고 결혼을 했을 때, 토르갈 사람들이 연회에 초대되어 아르사크를 위해 악기를 가지고 황궁으로 왔지만 그때 데르가는 오지 못했다. 데르가만 오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아버지와 가장 가까운 친구였기 때문에 아르사크는 못내 서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