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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63화 (63/191)

63화

“그러고 보니 도련님께서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마님을 뵈러 오셨습니까?”

“예. 미리 기별했는데, 누님이 안 계십니까?”

“아마 2층에 계실 겁니다. 그쪽 테라스를 고치기로 했거든요.”

“알겠습니다. 가위 조심하시고, 가서 쉬세요. 오늘은 정원을 돌보시기 힘들 테니까요.”

노인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테오도르는 2층으로 올라갔다가 안쪽 방에서 에셴을 찾아냈다.

그녀는 인부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남자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테라스 수리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았다.

테오도르가 문을 살짝 두드리자 그제야 고개를 돌린 에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벌써 왔니?”

“네. 좀 일찍 왔습니다. 바쁘신 것 같네요.”

“아래층에서 잠시 기다리렴. 곧 내려갈 테니.”

테오도르는 얌전히 고개를 숙이고 아래로 내려갔다. 집사가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집안 어디를 가든 공사 소음이 들려서 그다지 아늑하지는 않았지만, 북적거리지 않으니 그나마 견딜 만했다.

45장 의혹과 소문 (4)

테오도르가 자리에 앉자마자 하인이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접시에 놓인 자두잼 과자는 테오도르가 어릴 때 무척 좋아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이가 든 뒤로는 과자를 찾기가 민망해 거의 먹지 못했는데, 뜻밖에도 에셴이 마음을 써준 것이 기뻤다.

차를 마시기도 전에 과자부터 한 입 베어 무는데 때마침 에셴이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그 과자를 그렇게 좋아해?”

“그런 줄 알고 준비해 주신 게 아닌가요? 누님.”

“흠, 네가 내 앞에서 시건방지게 담배나 피우는 꼴은 눈 뜨고 못 보니까.”

담배 같은 건 입에도 안 대는 걸 알면서 괜히 그래 보는 것이다. 테오도르는 특유의 서글서글한 웃음을 띤 채 에셴이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켰다. 하인은 찻잔 두 개에 딱 알맞게 우러난 차를 채워 넣고 응접실을 나갔다.

“자형은 외출하셨어요?”

테오도르가 물었다. 에셴은 그림으로 그린 것처럼 완벽한 자세로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골 서점에 갔을 거야. 피라르 황제 시절의 기록서를 입수했다면서 여간 신난 게 아니던걸. 아마 하루 종일 걸릴 테지.”

“여전히 책을 좋아하시네요.”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을 거야.”

에셴의 남편인 랜크버 백작은 수도 귀족들 사이에서 괴짜로 유명했다. 유서 깊고 부유한 가문의 아들이지만, 그는 정치적인 성공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아내인 에셴을 만나기 전에는 여성과 사적으로 말 한마디 나눈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따금 그의 순진한 얼굴에 끌린 귀부인들이 대놓고 추파를 던져도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대답을 하곤 했다.

그가 에셴과 약혼했을 때 귀족들이 충격에 빠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랜크버 백작이 여태까지 여자에 관심 없는 흉내를 냈을 뿐이라고도 했고, 책에만 관심이 있는 척 연기를 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결혼을 한 후로도 랜크버 백작의 기행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책과 학문과 글을 사랑했으며, 오래되고 흥미로운 책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먼 여행도 마다하지 않았다. 가문을 이끄는 것은 모두 아내의 손에 맡겼지만 불평 한마디, 간섭 한번 하는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자형 같은 분이 과연 누님과 어울릴지 고민이 많았습니다만.”

테오도르가 말했다. 에셴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형이기 때문에 누님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그래. 그 사람은 얌전하지. 내 말이라면 오리에게 닭벼슬이 돋았대도 믿을 사람이니까. 거들먹거리는 남자는 질색이야. 당장 이혼하고 말았을걸.”

“그랬다면 어머니가 쓰러지셨을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다행이니?”

에셴과 테오도르의 어머니는 정숙하고 조용한, 귀족 부인이라는 이름에 딱 걸맞을 만한 인물이었다. 어릴 때부터 자기주장이 강하고 굽히지 않는 딸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을 만도 했다. 에셴은 어머니의 젊었을 적 모습을 빼다 박았지만, 성격은 전혀 달랐다.

“한담은 이쯤 하고, 이제 날 찾은 이유를 말해봐.”

에셴이 말했다. 테오도르는 입에 물었던 자두잼 과자를 얼른 씹어 삼켰다.

“실은… 폐하의 명령으로 왔습니다. 폐하께서 누님을 좀 보자시기에.”

“나를 왜 찾으시지? 그럴 이유가 없는데.”

“폐하께서는 이유가 있으시겠죠.”

에셴이 가늘게 눈을 흘겼지만 테오도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누나의 성격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우물쭈물 망설였다가는 본전도 못 찾는다. 고집에는 더 센 고집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 상책이었다.

“지금은 바빠. 저택 수리 중이잖아.”

“오늘 당장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내일이라도…….”

“공사가 하루 만에 뚝딱 끝나는 줄 아니?”

“제가 폐하께 말씀드려 궁에 소속된 인부들을 더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훨씬 더 빨리 끝내실 수 있겠죠?”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던지고 봤다. 안 될 것 같지도 않지만, 설령 안 된다고 하더라도 설마 친동생을 죽이기야 하겠는가.

에셴은 마뜩잖다는 듯이 팔짱을 끼는 시늉을 하다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왕이면 테라스에 깔 좋은 타일도 보내 달라고 말씀드려. 날 움직이려면 폐하께서 그 정도는 쓰셔야지.”

* * *

궁을 비운 동안 또 부쩍 몸집이 커진 소르흐를 데리고 사냥터를 한 바퀴 돌고 왔을 때, 에리히를 모시는 시종장이 아르사크를 찾아왔다. 외출을 해야 하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외출이라니, 어디로 외출을 한다는 거야?”

“행선지는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아르사크가 다른 것을 묻기도 전에 그는 뭔가에 쫓기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둥지둥 가버리고 말았다.

평생을 궁 안에서 산 시종장조차도 아르사크를 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안절부절못하곤 했다.

에리히의 시중을 들면서 그녀가 황제와 맞붙어 싸우는 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분명 며칠이 지나지 않아 에리히 손에 목이 떨어지리라 생각했는데, 버젓이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이제는 황후가 되었다.

심지어 속옷―코르셋―조차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는데 에리히는 그녀에 대해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의 성격을 누구보다 잘 아는 시종장으로서는 아르사크가 무서울 수밖에 없었다.

로즈안나는 시종장이 자리를 뜨자마자 아르사크를 깨끗하게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외출할 준비를 해주었다.

기온이 퍽 올라가 따뜻해진 날씨에 맞추어 연한 회록색의 가벼운 드레스를 고르고 머리카락은 가볍게 꼬아 목 위로 틀어 올린 뒤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핀을 꽂았다.

아르사크가 바깥으로 나가자, 에리히와 테오도르가 말을 탄 채 기다리고 있었다. 마차는 없었다.

“갑자기 외출이라니, 어딜 가시는 건가요?”

“가면 알아.”

에리히가 손짓하자 시종이 말 한 필을 끌고 왔다. 에리히가 혼수로 준비했던 말이다. 갈기에 얇은 금줄을 둘러 장식을 하고, 안장까지도 가죽과 보석으로 장식해 누가 봐도 황후나 황녀가 탈 만한 말이었다.

아르사크는 손으로 차양을 만든 채 에리히를 쳐다보다가 별말 없이 말에 올랐다. 일행은 에리히와 아르사크, 그리고 테오도르뿐이었다. 로즈안나를 포함한 시종들은 뒤에 남았다. 사람이 적어지자 에리히는 그제야 행선지를 알려주었다.

“토르갈 부족민들이 정착한 마을에 갈 거야.”

“네? 거긴 갑자기 왜… 무슨 일이 생겼나요?”

“무슨 일이 생겼는데 그대를 데리고 갈까? 아무 일도 없어. 신행을 다녀올 때 들르려고 했는데, 일정이 늦춰져 그러지 못했을 뿐이야.”

티리야나 알린이 아르사크를 찾아온 일은 이따금 있었지만, 아르사크는 여태 한 번도 토르갈 부족민들이 사는 마을에 가보지 못했다.

가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지만 왠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가본다고 한들 그들과 함께 떠날 수 있는 것도 아닌 데다가, 티리야의 말대로라면 이미 제국에서 사는 데에 적응한 부족민들을 어떤 감정으로 바라보게 될지 스스로 확신이 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족장으로서 더는 바랄 것이 없다. 그것이 최우선이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서 그들을 낯설게 느끼는 감정이 솟아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상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래. 튈브리크라는 곳이지. 제국에서 가장 큰 상업 지구인만큼 인구가 많다.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도 있고, 그대의 부족처럼 유목 생활을 하다가 귀화한 사람들도 소수 있지. 수도 내에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그곳이 최선이었다.”

“차라리 농사를 짓게 하시지 그러셨나요?”

“농사와 장사가 다른가? 어차피 그대의 부족민에게는 두 가지 모두 낯선 환경이야. 그런데 수도에서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지. 귀족들의 영지로 묶여 있던 숲을 개간해 농경지를 일구기 시작한 것은 고작 이삼 년 사이의 일이야. 내가 즉위한 첫해에 밀어붙여서, 본격적으로 공사를 시작한 게 그다음 해부터니까.”

개간은 제국의 중요한 과제였다. 내다 팔 목재와 광물이 모자라고 경쟁력을 잃었으니 더는 무역에만 치중해 살림을 꾸려나가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보다 빨리 이루어졌더라면 사정이 이렇게까지 어려워지지도 않았겠지만, 개간을 하려면 귀족들의 영지에 포함된 숲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였다. 황실 소유의 땅만 개간해서야 이렇다 할 소득이 나올 리 없었다.

국가사업을 농업으로 전환하고자 한다면 대규모의 토지가 필요했다. 에리히는 반대하는 귀족들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였고, 그 때문에 수도 없는 적을 만들었다.

“개간에 찬성하는 귀족들은 없었나요?”

“거의 없다고 봐야지. 찬성해 봐야 영지가 워낙 작아 어차피 잃을 것도 없는 사람들이거나, 아니면 귀족들 사이에서 입지가 좁은 인물들뿐이라.”

“숙부님은 어느 쪽이죠?”

에리히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아르사크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는 아르사크가 질문한 의도를 알고 있었다.

토르갈의 도움을 거절한 사람이 다름 아닌 위든이었다는 것을 안 뒤로, 아르사크는 그가 과연 진심으로 에리히를 돕고자 하는 사람이 맞는지 의심하고 있었다.

대놓고 에리히에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의식 없이 나오는 말이나 태도에서 여실하게 느껴졌다.

에리히 역시도 오랫동안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아르사크의 의심을 더 민감하게 알아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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