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44장 의혹과 소문 (3)
“자, 그럼.”
아르사크가 찻잔을 내려놓자 루이제는 눈에 띄게 어깨를 움찔거리며 잔뜩 겁을 집어먹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진정했으면 소문에 대해 자세히 말해봐.”
루이제는 무릎 위에 모은 손을 부산하게 꼼지락거리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말을 해도 목이 떨어질 것 같고, 말을 안 해도 목이 떨어질 것 같은 흉흉한 기분을 떨치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자신을 죽일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어디까지나 그럴 가치가 없다고 했을 뿐이지 ‘죽이지 않는다.’는 약속은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계산은 빠른 루이제였다.
그녀는 지금, 언제라도 아르사크의 손에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푹 빠져 있었다. 어쨌든 목숨을 살려주겠다는 확답을 받아내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었다.
“말… 말씀드릴 테니까, 약속해 주세요.”
“무슨 약속?”
“절 안 죽이신다고요!”
아르사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루이제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누구한테서 무슨 소리를 들었길래 아까부터 계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는 것인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말했잖아. 난 널 죽일 생각이 없다니까.”
“야, 약속해 주세요. 안 그러면 말 안 할래요.”
이쯤 되니 기가 막히다 못해 약간 신경질이 날 지경이다. 겁이 나서 입술을 실룩이면서도 뾰로통한 척 몸을 돌리는 루이제를 빤히 바라보던 아르사크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널 안 죽일게. 왔던 모습 그대로, 손가락 하나 떨어진 곳 없이 곱게 돌려보낼 테니까 이제 말해봐.”
“정말이시죠?”
“한 번만 더 물으면 그땐 나도 약속 같은 건 없던 셈 칠 거야.”
더 귀찮게 굴면 죽일 수도 있다는 협박이다. 루이제는 도로 겁에 질린 눈을 한 채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렇게 된 이상 솔직하게 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루이제는 긴 심호흡을 한번 한 뒤, 결심한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폐하와 마마께서 신행을, 떠나셔서 궁을 비우셨던 사이에… 수도의 귀부인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어요. 황후 마마께서… 비터 경의 아드님과, 저기… 부적절한 관계에 있다는 소문요. 그리고… 그, 그분만이 아니라, 제국에 오시기 전에도 남, 남편이 많았다는…….”
“아니, 나한테 남편이 있었으면 내가 무슨 수로 후녀가 됐겠어?”
“그, 저기, 음… 저, 정식으로 혼인을 하지 않고…….”
루이제의 뺨이 빨갛게 물들었다. 아무리 되바라졌다고는 하나 미혼인, 그리고 귀족 가문에서 숙녀다운 교양을 갖추며 자라난 그녀에게 있어 이런 화제는 거북하기 짝이 없었다.
또 소문의 대상이 아르사크라는 점도 루이제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있었다. 분노한 아르사크가 자신의 목을 날려버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뿐만 아니라, 마음 한구석에서 아르사크가 그럴 리 없다는 것을 강하게 믿고 있는 이상한 신뢰 때문이었다.
“루이제, 네 말을 정리하자면, 내가 토르갈뿐만 아니라 제국에도 남첩을 여럿 둔 희대의 난봉꾼이라 이 말인데.”
아르사크가 말했다. 루이제는 찔끔했지만, 아르사크의 표정이나 말투는 그다지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누가 처음 얘기한 거지?”
“네? 저기, 음… 피먼 자작 부인이요. 딜라이라 피먼이라는 분인데… 사교계에선 다들 딜라라고 불러요. 워낙 희한한 소문 같은 걸 많이 듣고 다녀서 ‘나팔 귀 딜라’라는 별명이 있죠.”
어감으로 보나 떠오르는 이미지로 보나 그다지 귀족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별명이었다. 아르사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지근해진 차를 마시는 척 찻잔을 기울였다.
“그럼 그 사람은 어디에서 그런 소문을 들었고?”
“그건… 몰라요. 그냥 ‘어디서 들었다’고만 말했지, 누가 어디서 말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어요. 그 사람은 항상 그런 식이에요. 출처가 정확하지 않은 소문을 많이 가져오죠. 꼭 사교계와 관련된 것들이 아닌 소문들도 퍼뜨려요.”
예상은 했지만, 출처가 분명하지 않다면 조사할 일이 난감해진다. 딜라이라라는 그 여자가 자신에 대한 소문을 스스럼없이 퍼뜨렸다는 것은, 그 자리에 있는 인물들이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는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배신할 만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상관없었겠지. 누구도 아르사크에 대해 충성심을 갖지 않았을 테니까.
로즈안나가 말한 ‘어려울 때 도울 수 있는 내 편’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이런 뜻이었던 모양이다. 자신 대신 귀족들 사이에서 눈과 귀가 되어 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그 소문의 출처는 알 수 없지만, 평소 그 딜라이라라는 사람이 어디서 소문을 얻는지, 그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아니야?”
“그, 글쎄요… 그 사람은 정말 발이 넓어요. 그리고… 정말 재미로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정해진 정보통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거네.”
루이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랬다. 딜라이라는 귀족들에게서도 소문을 얻어들었고, 시녀나 정원사에게서도 소문을 얻어들었다.
그러니 자연히 사교계와 무관한 소문도 많이 알고 있었고, 그것이 다른 귀부인들이 딜라이라를 은근히 멸시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그녀가 퍼뜨리는 소문에 까마귀처럼 달려들면서도 말이다.
“저기… 마마, 제가 아는 건 이게 다예요. 정말이에요. 저랑은 상관도 없는 일이고…….”
생각에 잠긴 아르사크가 골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이 루이제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자신과 관계가 없다는 루이제의 말은 아마 거짓이 아닐 것이다. 자신이 퍼뜨린 소문이라면 부르는 대로 순순히 왔을 리가 없고, 무엇보다도 이렇게 꿋꿋하게 주장할 만한 배짱도 없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결론을 내린 아르사크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루이제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좋아, 그 말은 믿어주겠어.”
하얗게 질렸던 뺨에 그제야 혈색이 돌아왔다. 루이제는 애써 당당한 표정을 꾸며내면서 조그만 턱을 치켜들었다.
“그럼 전 이만 가봐도 되나요?”
“아니? 안 돼.”
당당해졌던 표정이 다시 침울하게 쪼그라들었다. 아르사크는 짓궂다 못해 악당 같은 미소를 띠면서 자세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아까 네가 네 입으로 털어놨지. ‘날 염탐하려 했던 건 맞다.’고. 누가 시킨 염탐인지 그게 참 궁금한데.”
루이제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르사크는 변명할 틈을 주지 않고 몰아붙였다.
“감히 불손한 의도로 황후에게 접근하다니, 폐하께 이 사실을 고하면 널 어떻게 하실까? 네 아버지와 오라버니는? 네 가문은?”
“마, 마마, 잠시만요. 그게……!”
겨우 안도의 빛을 되찾았던 얼굴이 다시 파랗게 질렸다. 루이제는 거의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자신이 거한 실수를 저질렀음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만약 아르사크가 정말로 황제에게 그 사실을 알린다면, 황후가 되기는커녕 가문이 통째로 몰락할 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보다 훨씬 세력이 막강했던 볼핀 후작도 수도에서 추방령이 내려진 후로는 감감무소식이지 않은가.
정치 싸움에는 둔한 루이제였지만, 황제가 모처럼 잡은 꼬투리를 놓칠 리 없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작가가 그런 꼴이 된다면 누구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마마! 잘못했어요! 저, 제, 제가 뭐든지… 할게요! 그러니까 제발 폐하께 고하지는 말아 주세요! 이렇게 빌게요!”
“뭐든지 하겠다?”
루이제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녀는 아버지를 무척이나 사랑했다. 아버지가 모든 자식들 중 자신을 가장 아끼고 사랑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애초에 황후를 염탐하라 지시한 것은 아버지였지만, 그것도 역시 딸을 황후로 만들어주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의 실수로 아버지가 몰락하는 꼴을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좋아, 루이제. 네가 한 말을 지켜야 할 거야. 그렇게만 한다면 나도 널 죽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킬게. 폐하께 네 말을 일러바치지도 않을 거고.”
처음부터 그럴 생각도 없었으면서, 아르사크는 태연하게 루이제를 협박했다. 꼼짝없이 외통수에 걸린 처지가 되었지만, 루이제로서는 아르사크의 협박을 받아들이는 것밖에 살아날 도리가 없었다.
* * *
테오도르가 랜크버 백작가를 방문했을 때, 저택의 분위기는 무척 어수선했다. 빗물받이와 지붕을 수리하느라 불려온 인부들이 정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이었다.
투박한 걸음걸이에 꽃가지가 상할 때마다 나이 든 정원사가 가위를 휘두르며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 탓이기도 했다.
“이 무뢰한 같은 양반들아! 마님께서 아끼시는 꽃인데 그걸 망가뜨려!”
“아니, 영감님. 우리더러 어쩌란 말입니까? 지금 이 짐들이 안 보이쇼? 이걸 들고 귀부인들처럼 사뿐사뿐 걷기라도 하란 말인감?”
“뒷길을 이용하면 될 것 아니오!”
“앞쪽 지붕을 수리해야 하는데 뭣 하러 뒷길을 쓰겠소? 어차피 꽃이야 다음 계절에 또 필 것 아니오? 귀찮게 하지 말고 저리 좀 가시우.”
노인이 아무리 역정을 내본들 입심 좋고 성격 괄괄한 인부들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엉망으로 넘어진 꽃들을 일으켜 세우느라 애를 쓰는 정원사의 등을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그에게로 다가갔다.
“영감님.”
“또 뭐야!”
주름진 손에 든 가위가 휙 들려 올라갔다. 테오도르는 놀란 표정으로 양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뒷걸음질을 쳤다. 정원사는 그제야 그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질겁을 하며 땅에 엎드리려는 시늉을 했다.
“아, 아이고. 죄송합니다. 도련님을 몰라뵙고 이 늙은 것이……!”
“아뇨, 아닙니다. 진정하세요.”
테오도르는 허둥거리며 노인을 붙들었다. 그는 원래 랜크버 백작가의 사람이 아니었다. 누나가 결혼을 할 때 그녀를 따라 랜크버 백작가로 왔을 뿐, 원래는 운트겔의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인 것이다. 훌쩍 커버린 테오도르를 아직도 ‘도련님’이라고 부르는 이유였다.
“빌어먹을 놈들이 공사를 하면 하는 것이지, 마님이 아끼시는 꽃들을 죄 망쳐놓지 뭡니까.”
“어쩔 수 없지요.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누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다음 해에 더 예쁜 꽃을 피워주실 거잖아요.”
테오도르의 말을 듣고서야 그는 겨우 속상한 마음을 추스르는 듯했다. 그러면서도 쓰러진 꽃가지들이 애처로운지 눈을 떼지 못하다가 뒤늦게야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