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루이제의 얼굴은 이제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보였다. 아끼는 드레스 자락이 마구 구겨지고 밟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창가로 달려간 루이제는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온 얼굴을 마구잡이로 찌푸렸다. 황실의 문양이 찍힌 마차가 정말로 떡하니, 저택 아래에 버티고 서 있었다.
“왜 빨리 말하지 않았어! 마차가 왔다고 말했어야지!”
루이제는 다시 하녀에게 발을 탕탕 구르며 짜증을 냈다. 벌써 세 번이나 마차가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하녀는 억울했지만 감히 그녀의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녀는 울상을 하고 있는 루이제를 황급히 의자에 앉혔다. 그런 다음 흐트러진 머리만 대강 정리한 뒤 장식용 핀을 꽂았다.
“아가씨, 옷을 갈아입으실 시간은 없어요. 지금도 충분히 어여쁘시니 이대로 다녀오셔요. 황후께서 부르신다는데, 너무 늦으면 안 되잖아요.”
“싫어, 싫단 말이야! 지금 거길 갔다간 관짝에 실려서 돌아올걸!”
“무슨 말씀이세요, 그렇지 않을 거예요. 여태 황후 마마와 담소를 나누시곤 하셨잖아요.”
“아버님은 왜 하필 이런 날 집을 비우신 거야! 오라버니도 안 계시고! 누가 날 지켜줘? 난 버들가지처럼 연약하다니까!”
어느 정도는 맞는 소리였다. 하녀는 울고불고 난동을 피우기 직전인 루이제를 가까스로 달래어 마차에 밀어 넣다시피 했다.
그녀로서는 루이제가 왜 그렇게 난리법석인지 알 턱이 없었고, 루이제의 아버지인 홀드빅 자작이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는 더더욱 몰랐으므로 그러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결국 마차에 실려 황궁으로 가는 동안 루이제는 조그만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어떻게 하면 그 무지막지한 여자가 날 죽이기 전에 용서를 빌 수 있을까? 가련하게 보이면 불쌍해서 살려주려나? 아직 살날이 많다고 빌어볼까?
‘아니, 차라리 기절을 해버릴까?’
그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들어가자마자 쓰러지는 것이다. 설마 정신도 없는 사람의 목을 치진 않겠지.
‘아니야! 오히려 잘됐다고 좋아하면서 죽여버리면 어떡해!’
울음을 참으려 했지만 도저히 눈물이 멈춰지지가 않았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엊그제 집을 떠나는 아버지에게 잘 다녀오시라 인사라도 할걸.
홀드빅 자작은 새벽 일찍 집을 나섰고 그때 루이제는 자고 있었다. 행선지가 어디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하인들이 뭐라고 말해주긴 했는데.
‘아버지! 오라버니! 제발 절 구해주세요!’
그러나 빌어봤자 이뤄지지 않는 기도가 훨씬 많은 법이다. 나타날 리 없는 아버지와 오빠를 찾다 못해 차라리 바퀴축이라도 빠지기를, 아니 마차가 뒤집어지기를 바라는 루이제의 간절한 소망은 마차가 조용히 멈춤과 동시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이 문을 열었을 때, 루이제의 얼굴은 눈물 때문에 엉망진창이었다. 예상치도 않은 모습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그는 어쨌든 루이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가 끝도 없이 길게 느껴졌다. 걷다 보니 정말 어지러운 것도 같았다. 붉은 융단이 마치 피로 물든 것 같아 목덜미가 다 섬뜩할 지경이었다. 문 앞에 다다랐을 때, 루이제는 사시나무 떨듯 후들후들 떨고 있었다.
“마마, 홀드빅 자작가의 아가씨가 도착하셨습니다.”
안에서 대답이 들리기 전에 문이 열렸다. 시종이 한쪽으로 비켜나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루이제는 주춤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무언가 길쭉한 것을 들고 있는 아르사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과장된 신음을 내지르며 그대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루이제 아가씨?”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로즈안나였다. 시녀들도 당황해서 우왕좌왕했다.
루이제는 엎드린 채 쓰러지지 않은 것을 후회하면서 필사적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왠지 코가 간질거리고 곧 재채기가 터질 것 같았지만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폐가 터지는 쪽이 나을 것 같았다.
로즈안나가 시종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르사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좋아, 조금만 더 버티다가 깨어나서 한껏 아픈 척을 하면…….
“모두 멈춰.”
아르사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이제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안 돼, 설마 진짜로 죽이려나? 쓰러진 김에?
그러나 아직 칼을 뽑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좀 전에 손에 들고 있던 길쭉한 건 뭐였을까. 혹시 불쏘시개 같은 건 아니었을까? 아니야, 어쩌면 거대한 바늘 같은 것이었을지도 몰라. 그걸로 내 목을…….
갑자기 코 밑이 참을 수 없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참는다고 참아 보았지만 콧구멍이 움찔거리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눈을 뜨지 않겠다는 일념만으로 버텨보았지만, 무언가 보드랍고 탄력 있는 것이 콧속을 건드리자마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에, 엣취!”
“어머나, 깨어났네?”
재채기를 내뱉느라 웅크린 허리를 천천히 편 루이제는 여전히 바닥에 쓰러진 그대로 고개만 슬그머니 들어 아르사크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을 먼저 쳐다보았다.
그 길쭉한 것의 정체는, 그냥 막대기였다. 끝에 깃털이 한 가닥 달린.
“마, 마마……?”
“어제 혼나고 저녁이라도 굶었어? 들어오자마자 쓰러지게. 다과를 좀 준비하렴. 그 물이랑 수건은 치우고.”
당황한 채 모여들었던 시녀들은 아르사크의 말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은 채 이리저리 흩어졌다.
천연덕스러운 아르사크의 표정을 보며 한발 늦게 상황을 파악한 로즈안나는 저도 모르게 질책하는 듯한 눈으로 루이제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루이제는 순순히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아직은 도망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저, 마마… 콜록. 불러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콜록, 콜록. 제가 오, 오늘은 몸이 좋지 아, 않아서… 콜록! 저, 병을 옮길까 걱정입니다. 그러니…….”
“저런, 감기에 걸렸어? 날도 더운데 어쩌다가 그랬담? 셔벗으로 샤워라도 한 거야?”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떤 바보가 셔벗으로 샤워를……!”
저도 모르게 빽 소리쳤던 루이제는 헉하는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입술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다시 기침을 하는 척하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올려다보았다.
커다란 눈동자를 글썽거리며 비스듬히 올려다보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루이제가 갈고닦은 특기이자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 얼굴로 쳐다보면 누구든 그녀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다섯까지만 셀게, 루이제.”
“…네?”
“하나, 둘, 셋…….”
그 순간, 루이제는 땅에서 튕겨지기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진 모르겠지만 아르사크가 숫자를 다 셀 때까지 누워있었다가는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질 것 같다는 예감 때문이었다.
벌떡 일어난 루이제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아르사크는 깃털을 매단 막대를 살랑살랑 흔들며 돌아섰다.
“이쪽으로 와서 앉아.”
이제는 돌이킬 수 없었다. 루이제는 품위도 교양도 잊은 채 비척비척 걸었다. 코끝이 저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먼저 자리에 앉았던 아르사크는 그런 루이제를 보고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왜 울어?”
“제가 그런 거 아니에요, 마마! 진짜예요! 믿어주세요!”
외마디 비명 같은 울음이 터졌다. 느닷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가 아르사크의 무릎에 매달리다시피 하는 루이제의 행동 때문에 방 안의 모두가 경악스런 표정을 지었다. 때마침 다과를 가져왔던 시녀도 루이제의 서슬에 놀라 차를 엎을 뻔했다.
로즈안나는 방 안의 시녀들을 모두 내보내고 문을 닫았다. 루이제는 여전히 아르사크의 무릎에 이마를 댄 채 대성통곡 중이었다.
“루이제, 대체 왜 이래? 울지 말고 말을 해.”
“그, 그게, 으흑… 저, 저는 진짜로 그런 소문 안 냈어요. 흐엉… 제가 마마를 염, 염탐하러 왔던 건 맞지만… 진짜로 제가 지어낸 소문이 아니에요…….”
루이제는 아예 목 놓아 울었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없는지, 자신이 무슨 말을 내뱉고 있는지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 같았다. 아르사크마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루이제의 뺨을 엄지 끝으로 닦아주었다.
“소문이라니, 무슨 소문? 그만 좀 울어.”
“으흑, 소, 소문… 그, 저기, 황후 마마가… 흑, 저기, 네페 영지에, 저, 정부를 두고 계신다고. 으앙! 진짜 제가 안 그랬어요! 거기서 떠들던 사람들한테 제가 화도 냈다고요! 절 죽이시면 안 돼요! 전 이렇게 어리고 예쁜데! 제 얼굴을 봐서라도 살려주세요!”
아르사크는 순간적으로 로즈안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로즈안나도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아르사크를 마주 보았다.
“루이제, 뚝 그쳐.”
아르사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리적인 위협은 하나도 가하지 않았지만, 루이제는 정말로 울음을 뚝 그쳤다. 반들반들하게 젖어 하늘색으로 빛나는 커다란 눈동자가 더욱 휘둥그렇게 떠졌다. 겁을 집어먹은 토끼처럼 바들바들 떨리기까지 했다.
목소리와는 달리 아르사크의 표정은 침착하고 부드러웠지만, 그래도 루이제는 주춤주춤 눈치를 보았다.
“누가 널 죽인다고 했어? 내가 너를 왜 죽여?”
“네? 그… 그거야… 제, 제가… 아버님… 아니, 그보다 그… 소문을 제가, 내, 냈다고 생각하실 것 같아서…….”
“내가 그런 생각을 왜 하겠어? 뭐 찔리는 짓이라도 했니?”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결백해요!”
“그럼 울 필요 없잖아. 그만 눈물 닦고 앉아. 얼굴이 꼬질꼬질해.”
루이제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입술을 벌렸다. 여태까지 그녀가 들었던 말들, 특히 외모에 대한 말은 찬사와 칭송뿐이었다. 꼬질꼬질하다니, 흙바닥에 뒹굴다 일어서도 땅에서 갓 튀어나온 요정 같을 텐데!
“자, 앉아. 그리고 차 마시고 진정 좀 해. 내가 널 죽여서 뭘 하겠니? 그럴 바에야 사슴이나 한 마리 더 잡고 말지.”
순식간에 사슴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일단 목숨을 건졌다는 안도감에 굴욕감도 느끼지 못했다. 루이제는 훌쩍거리면서 주섬주섬 일어나 겨우 의자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