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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60화 (60/191)

60화

그 말은 여러 가지를 내포한 말이었다. 재단사뿐만 아니라 주변에 여러 시종들이 있었으므로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을 뿐, 로즈안나는 에리히가 약속한 2년 후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아르사크가 바라는 대로 무사히 폐후가 되어 자치구로 이동하는 것도, 그때까지 아르사크와 에리히 모두 무사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로즈안나는 항상 내란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에리히는 그만큼 적이 많았다. 에리히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아르사크 역시 눈엣가시일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아르사크는 로즈안나가 하는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네가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대강 알겠어, 로즈.”

“그러시리라 믿기 때문에 드린 말씀입니다.”

아르사크는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산처럼 쌓인 옷감으로 눈을 돌렸다. 개중에는 미리 수를 놓아 장식한 것도 있었지만 대개는 밋밋했다.

일단 색깔이나 재질을 고르고 나면 그다음에는 주된 장식이 될 자수의 디자인을 고르고, 또 그다음에는 레이스와 갖가지 장식을 골라야 할 것이다. 하루 종일 걸려도 끝날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로즈안나의 말을 듣고 나니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걸리고서야 겨우 다섯 가지의 옷감을 골랐다. 남청색, 붉은색, 연녹색, 그리고 크림색과 파란색. 모두 무난한 색깔이어서 로즈안나는 일단 안심했다.

“이제 드레스의 모양을 골라주셔야 합니다. 다섯 가지 모두 다르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만 두 가지 정도는…….”

“꼭 여기 있는 것으로만 골라야 하는 건가?”

느닷없는 질문에 재단사는 물론 듣고 있던 로즈안나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재단사는 잔주름이 진 눈가를 깜빡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무엇이든 마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럼 이렇게 하지. 펜 이리 줘봐.”

로즈안나가 눈짓을 하자 시녀가 잽싸게 펜과 잉크, 그리고 종이를 가지고 왔다.

아르사크는 잠깐 골똘한 표정을 지었다가 잉크를 묻힌 펜으로 종이 위에 선 몇 개를 슥슥 그었다. 거침없이 그리기는 했지만 분명히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었다.

재단사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도 못한 채 아르사크를 멀거니 쳐다보았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르사크가 단지 운이 좋아 황후가 되었을 뿐인 이방인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아르사크가 그린 것은 사람의 모습이었다. 정확히는, 선으로 된 옷을 걸친 사람의 모습. 의상을 설계하는 예술가들이 그리는 것과 흡사했다.

“이대로 만들어.”

“마, 마마, 이건… 이런 모양의 옷은 지금껏 한 번도…….”

“그러니까 이번에 한번 입어 보자고. 원래 입던 것과 그렇게 많이 다르지도 않잖나?”

“하지만 그, 저… 수도에서는 항상 레이스와 속치마를 이용해서 크게 부풀린 드레스가 유행이었습니다. 작약처럼 부드럽고 하늘하늘한 옷감을 여러 겹 겹쳐서…….”

“지금 나도 그런 걸 입고 있으니 굳이 설명은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원하는 사람은 이 안에 속치마를 겹쳐 입어서 부풀리든지, 마음대로 하라고 해. 하지만 나는 이 드레스를 입을 것이니, 군소리할 시간에 재단을 하는 것이 좋겠지?”

재단사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상대가 황후라는 것을 잊고 가르치려 들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상황을 중재한 것은 로즈안나였다.

“세 벌은 황후 마마께서 원하시는 대로 만들고, 나머지 두 벌은 그대가 작년의 유행에 맞추어 적당히 만들도록 하시지요.”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르사크가 그린 드레스는 이제껏 카툴라에서 그 누구도 입은 적이 없을 것이 분명한 모양이었다. 재단사의 말대로 지금까지 수도 귀족들이 선호한 디자인은 거의 비슷했다.

여름 드레스라면 어깨와 상완 위쪽을 넓고 둥글게 드러내고, 앞가슴에는 프릴이나 레이스, 이따금 보석을 달아 장식한 뒤 허리 부분은 최대한 좁게 조인다. 그리고 치맛자락은 얇은 레이스로 만든 안감을 겹겹이, 이따금은 수십 장이 되도록 덧대어 최대한 아름답게 부풀렸다.

중요한 것은, 화려하게 부풀리되 결코 묵직하게 처지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기 위해 탄력 있고 얇은 최고급의 옷감이 수도 없이 많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그러나 아르사크의 드레스는 안감은커녕 속치마 한 장도 입을 필요가 없어 보였다. 폭이 그리 넓지 않았기 때문이다. 걷거나 뛰기에 딱 좋을 만한 정도라고 할까. 허리 부분은 아예 널찍하게 만든 다음 리본을 허리띠처럼 둘러 몸에 맞게 고정할 수 있도록 했다.

또 다른 것은, 이건 드레스라기보다는 차라리 로브나 가운이라고 부르는 편이 나을 것 같은 모양이었는데, 나이트가운을 약간 변형한 것처럼 몸을 감싸듯이 둘러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아르사크는 거기에 자수를 놓게 했을 뿐 다른 장식은 아무것도 덧붙이지 않았다.

반나절쯤 지났을 때, 아르사크는 완전히 녹초가 되어 있었다. 뒤로 가면 갈수록 아르사크의 인내심이 짧아지는 것이 눈에 보였기 때문에 곁에 서 있던 로즈안나가 적당히 그녀가 할 말을 대신해 주었다.

재단사 역시 생전 처음 받아보는 의상 도안을 가지고 지친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자마자 아르사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소파에 드러누웠고, 이번만큼은 로즈안나도 몸가짐 운운하는 잔소리 없이 찬 수건을 가져다 아르사크의 이마에 얹어주었다.

“훌륭하셨어요, 아르사크 님.”

“이걸 다음 여름에 한 번 더 해야 해?”

“아뇨.”

그나마 듣던 중 다행이었다. 아르사크가 반색을 하며 올려다보자, 로즈안나가 말했다.

“이번 겨울에도 하셔야 합니다. 여름과 겨울에 한 번씩요.”

“내가 비명 지르길 기다리는 거지? 못된 계집애.”

“보통 이 일은 황후께서 혼자 하시는 일이 아니랍니다. 곁에서 시중을 드는 귀부인 중 안목이 높은 두세 명이 동석하지요. 오늘은 아르사크 님 혼자 하셔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더 오래 걸렸던 것이고요.”

“진작 말했어야지. 그럼 누구든 불러 왔을 것 아니야?”

“아르사크 님, 이런 말씀을 드려야 하는 저를 부디 용서하십시오. 아르사크 님께서 부르셨다고 해도, 기꺼이 올 귀족은 수도에 없었을 것입니다.”

아르사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물론 귀족들이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황후가 직접 호출하는 것을 거절할 만큼 무시당하고 있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어쨌든 나는 지금 황후의 위치에 있어. 그런데도?”

“황후의 이름을 가지셨지만, 진정한 지위까지는 아직 가지지 못하셨지요. 아르사크 님께서 그런 것에 미련이 없으시고, 또 권력 다툼에 흥미가 없으시다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억지로 사교 모임을 열거나, 원치 않는 사람들과 가식적으로 어울리시는 것은 저도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아르사크 님이 필요로 하실 때 언제든 손을 내밀어 줄 사람을 적어도 두 명쯤 만들어 두시는 것이 좋습니다.”

“네가 있잖아, 로즈.”

어린애처럼 순진하고 또 솔직한 말이었다. 로즈안나는 그제야 평소대로의 표정으로 돌아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 미소에는 일말의 안타까움이 있었다.

“저는 귀족으로서 어떤 지위도 갖지 못합니다. 단지 아르사크 님의 측근 시종일 뿐이죠. 선황후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황궁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을 때, 저는 제가 속했던 집안에 대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그곳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고, 돌아간다 해도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테니, 저로서는 아르사크 님께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어도 한계가 있어요.”

믿고 일을 맡길 수 있는 측근 또한 몹시 중요하지만, 그 측근이 귀족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진다.

에리히가 테오도르 하나만을 믿고 움직일 수 있는 데에는, 테오도르 자신뿐만이 아니라 그 뒤에 존재하는 그의 집안의 힘이 있었다.

운트겔 가문은 대대로 황제의 호위기사를 배출해 온 무인 집안이었다. 그들은 결코 주인을 배신하지 않으며, 주인인 황제를 지키며 죽어갈 수 있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명예로 여겼다.

“아르사크 님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적당한 사람들을 찾아보도록 할게요.”

“그래, 좋아. …아니, 한 사람은 이미 정했어.”

“네? 누구를 생각하고 계신 건가요?”

로즈안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르사크는 짓궂은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띠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루이제 홀드빅.”

43장 의혹과 소문 (2)

아르사크가 자신을 부른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루이제는 기겁을 했다. 지금껏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아르사크와 에리히가 신행에서 돌아왔으니 곧 황궁으로 가 그녀를 염탐하라는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질 것이었지만, 설마하니 아르사크 쪽에서 먼저 만남을 청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가씨, 지금부터 준비를 서두르셔야 해요. 벌써 시간이…….”

“나도 알아!”

애꿎은 하녀에게 신경질을 낸 루이제는, 대답과는 다르게 또다시 선 자리에서 뱅뱅이를 돌았다.

“날 왜 찾는 거지? 왜 날 부르는 거야? 설마 그 소문에 내가 가담했다고 생각해서 날 추궁하려는 걸까? 아니, 내가 퍼뜨렸다고 생각하는 것 아니야?”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루이제는 아르사크가 아직 근거 없는 추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으므로, 그렇게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생각은 불안을 좀먹고 순식간에 커져서, 루이제의 머릿속에는 이제 아르사크가 휘두른 검에 목이 떨어진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있었다. 루이제의 얼굴이 눈에 띄게 하얘지자, 안절부절못하며 서 있던 하녀가 기겁을 하며 그녀를 부축했다.

“루이제 아가씨!”

“나… 나 못 가겠어. 싫어, 안 갈래. 안 갈 거야. 아파서 못 간다고 해.”

“아가씨, 안 돼요. 벌써 아까 전부터 마차가 와서 기다리고 있단 말이에요.”

“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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