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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59화 (59/191)

59화

스물세 번, 스물네 번. 스물다섯 번째에 이르렀을 때, 아르사크는 자신의 어깻죽지에 에리히의 손끝이 닿아 있음을 알아차렸다. 머리를 빗기기 위해 로즈안나도 이따금 이렇게 어깨를 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접촉은 로즈안나의 것과는 확실하게 달랐다.

아르사크는 이제 균형 감각이 이상해졌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가느다란 평형대를 아슬아슬하게 디디고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휘청거리거나 발을 잘못 내디디면 곧장 균형을 잃고 아래로 떨어질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 마치 정말로 낭떠러지 위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울렁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스물여덟… 아니, 일곱 번.”

“제대로 세어야지.”

에리히가 말했다.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아르사크는 눈을 깜빡이며 맞은편에서 일렁이는 촛불과, 천막 너머에 숨은 어둠을 응시했다.

어깨를 쥔 에리히의 손은 컸다. 손끝이 쇄골의 도드라진 윗부분을 살짝 건드리고, 아르사크가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약간 움직여 그 안쪽의 살갗을 짚었다.

그대로 미끄러져 내려오기만 한다면 어디를 건드리게 될지는 뻔했다. 그러도록 내버려 둘 아르사크가 아니었지만, 에리히는 결코 그 이상 손을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로 단순히 어깨를 잡았을 뿐인 것 같기도 했다.

미묘하게 아르사크의 신경을 건드리던 정체 모를 긴장감은 마침내 서른 번째 빗질이 끝났을 때에야 바람 앞의 촛불처럼 훅 꺼져 사라졌다.

에리히는 빗을 만지작거리다 바닥에 놓여있던 빗집에 넣어 아르사크에게 건네주었다.

“이걸 매일 안 하면 아침저녁으로 백 번씩 하겠다니, 로즈안나의 팔이 그렇게 튼튼한 줄은 몰랐군.”

놀리듯이 읊조리는 목소리는 평소대로였다. 아르사크는 그 변화에 안심했다. 그러면서도 알 수 없는 아쉬움 같은 것이 느껴져 혼자 소스라쳤다.

“고작 열 번 정도 하시고는 엄살이신가요? 로즈의 팔이 튼튼한 게 아니라, 폐하가 운동을 좀 하셔야 할 것 같군요.”

“열 번은 넘었잖아.”

“두 번 정도는 허용 가능한 오차 범위죠. 깐깐하게 따지긴.”

“그 입은 하루라도 얌전하지 않으면 달라붙나 보지?”

“아뇨, 물어뜯습니다. 뭘 씹어대지 않으면 송곳니가 자라는데 모르셨나 보죠?”

“내가 생쥐랑 결혼을 했나 보군.”

“그럼 제가 결혼한 건 나무토막인 모양이군요. 생쥐가 씹어대기 딱 좋은 게 나무토막이니까.”

애매하게, 불이 붙은 듯 만 듯 피어오르던 묘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에리히는 도무지 상대를 할 수가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자리에 누웠고, 아르사크도 비슷한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누웠다.

천막 안이 워낙 좁아서 매트리스는 하나밖에 깔 수 없었으므로 둘은 별수 없이 평소보다 가까이에 누워있었다. 황궁이나 저택의 침대에 비하면, 거의 껴안기 직전인 상태라고 해도 무방했다.

그러나 조금 전 머리를 빗을 때처럼 아슬아슬한 감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르사크도 그랬고, 에리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아르사크는 눈을 감은 에리히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만약을 위해 켜둔 촛불이 이따금 새어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그의 뺨에 어린 붉은 기운도 그림자처럼 일렁거렸다.

에리히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아르사크는 한쪽 구석에 놓인 자신의 옷을 바라보았다. 로즈안나가 곱게 개어놓은 아르사크의 옷 위에는 에리히가 꺾어다 준 나뭇가지가 놓여 있었다.

꽃송이는 곧 시들어 떨어지겠지만, 나무껍질에서 나는 독특한 향이 밤새도록 배면 내일쯤에는 옷에서도 그 향기가 날지 모른다.

문득 그가 발을 씻겨주던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물에서 피어오르던 부드러운 향과 수증기들이 마치 조금 전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아르사크는 괜히 간질거리는 것 같은 발끝을 이불 속으로 밀어 넣으면서 고개를 기울인 채 눈을 감았다.

42장 의혹과 소문 (1)

네페에서 출발한 시찰은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황제가 올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던 영주들은 난데없는 행차에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 그들이 얼떨떨한 사이 에리히는 테오도르와 병사들에게 명령을 내려 재산과 관련된 모든 장부를 압수할 것을 명령했다.

황제가 보낸 사자도 아니고, 황제 본인이 와서 내놓으라는데 거기서 못 내놓겠다고 버틸 만큼 간이 큰 인물은 없었다.

탈세 혐의가 들통나면 심하게는 작위와 재산이 모조리 몰수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사형감은 아니다. 하지만 황제의 명령을 정면에서 거역하는 것은 분명히 즉결 처분 감이 될 수 있었다.

“내가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들어주지.”

에리히의 말에 오르힙의 영주는 흙이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을 숨기느라 애를 썼다. 얼핏 듣기에는 ‘선처할 수도 있으니 빌어봐라.’처럼 들리는 말이었지만, 실상은 탈세에 얽힌 다른 귀족들의 이름을 대라는 협박이었다.

고민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순순히 이름을 대고 약간의 자비를 바라는 편이 나을지, 아니면 끝까지 입을 다물고 침묵의 대가를 챙기는 것이 나을지.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오르힙을 떠나는 에리히의 손에는 영주가 직접 서명하고 날인한 새로운 문서가 하나 들려 있었다. 탈세 혐의에 함께 가담한 자들의 이름과 성, 빼돌린 액수와 종목이 무엇인지 낱낱이 적어놓은 것이었다.

말로 해도 되는 것을 굳이 문서로까지 만들고, 혹시라도 발뺌하지 못하도록 가문의 도장까지 철저히 찍게 하고서야 에리히는 흡족해진 표정으로 마차에 올랐다.

“그 문서가 도움이 될 거라 보시나요?”

처음부터 끝까지 없는 사람인 양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아르사크는 마차의 문을 닫고서야 에리히에게 물었다.

“장기적으로는 별 도움이 되지 않겠지.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확실히 도움이 될 거야.”

“도장까지 받아 오신 건 감탄스럽네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그건 솔직한 심정이었다. 말로만 들었더라도 물고 늘어졌다면 결국 이기는 건 황제 쪽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말을 번복할 수 없도록, 작위를 가진 주인이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도장으로 날인을 남긴 철저함은 감탄할 만했다. 물론 도장을 찍은 장본인은 징글징글한 놈이라고 욕을 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폐하. 이건 명목상 신행이 아니었나요?”

“그렇지.”

“만약 오르힙의 영주가 다른 귀족들에게 소식을 전하면요?”

“아마 그럴 테지. 하지만 상관없다. 이건 어차피 장기전을 예상하고 시작한 싸움이니, 오히려 당장 소문을 퍼뜨려준다면 고맙지. 곧 각지에서 이번 분기의 세금을 납부할 때가 될 테니, 손을 대려던 놈들이 있었더라도 이번만큼은 몸을 사릴 거야.”

돌아가는 길에는 다행히 내내 날씨가 쾌청했다. 일행은 네페에 올 때와는 다른 길을 통해 수도로 들어갔는데 이것도 신행을 떠났다 돌아오는 길임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꾸민 것이었다.

에리히의 말마따나 단 며칠이면 사실은 황제와 황후가 진짜 신행을 다녀온 게 아니라는 소문이 퍼질지 모르지만, 어차피 그런다고 한들 두 사람 모두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후 에리히는 물론 아르사크도 바빠졌다. 여름용 드레스를 미리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의 손에 이끌려 산더미 같은 옷감을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했다.

“마마, 이런 색깔은 어떠신지요? 갓 만든 캐러멜처럼 달콤한 피부빛에 무척 잘 어울리실 것입니다.”

호들갑스러운 재단사의 말은 무슨 색의 옷감을 집어 들든 다 비슷비슷했다. 캐러멜 같은 피부빛, 호안석 같은 눈동자, 밤의 요정들도 찬사를 보낼 머리카락… 뭐 그런 말들이었다.

“조금 전에 봤던 붉은색도 내 피부에 잘 어울리고, 지금 보여주고 있는 남청색도 내 피부에 잘 어울린다니,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피부색이람? 얼룩덜룩한가 봐?”

“예? 그, 그럴 리가요. 마마께는 뭐든지 어울리지 않는 것이 없다는 그런 뜻이지요.”

“그럼 굳이 내가 고를 필요가 없잖아.”

“아르사크 님.”

비스듬히 앉은 채 투덜거리던 아르사크의 말을 로즈안나가 조용히 끊었다.

“아르사크 님께서 어떤 색의 옷감을 고르시느냐에 따라 이번 여름에 유행하는 드레스 색이 결정됩니다. 그러니 부디 제국의 백성들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시고 집중해 주세요.”

“정작 백성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은 이렇게 좋은 옷감은 구경도 못 해볼 텐데 무슨 소리야? 유행이야 어쨌든 귀족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옷을 만들어 입는 것 아니었어?”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황후께서 선택하신 색깔이나 디자인이 우선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 이건 옷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아르사크 님의 안목을 다른 사람들에게 선보이는 일이기도 해요.”

아르사크는 그런 사교적인 일 따위 요만큼도 관심이 없었지만, 로즈안나는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황후는 물론이거니와 사교계에서 내로라하는 귀족들의 옷차림은 늘 중요한 화젯거리다. 어떤 색깔인지, 어떤 옷감인지, 치마폭의 모양이나 주름의 개수, 폭, 어깨를 드러냈는지 아닌지, 소매 길이는 어떤지, 레이스는 어떤 종류를 사용했는지… 그 모든 것들이 입방아에 올라 동경의 대상이 되거나 반대로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아르사크는 사교계에 아무런 기반이 없는 데다가 본인이 귀족들과 어울리는 일에 일체의 관심이 없으니, 하다못해 이런 일로라도 호의적인 세력을 조금씩 늘려가야 한다는 것이 로즈안나의 생각이었다.

“아르사크 님을 동경하는 귀족들이 늘게 되면 자연히 아르사크 님을 지지하는 세력도 생길 겁니다. 그러니까…….”

“로즈, 난 정치 싸움 같은 건 딱 질색이라니까. 내가 말했잖아.”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사크 님. 아르사크 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무사히 이루기 위해서는 정해진 시간을 잘 버티시는 것이 우선 중요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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