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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58화 (58/191)

58화

“대체 어떤 분인 거지? 난 그냥 이방인 여자라고만 생각했는데 말이야.”

“쉿! 목소리 낮춰, 인마. 목 떨어지고 싶냐?”

“아니, 그랬다는 얘기지! 지금은 아니라고! 지금은 어엿한 우리의 황후 마마시지. 생각 좀 해봐. 어떤 나라의 황후가 우리 같은 놈들을 먹이려고 손수 사슴을 잡아다 주느냔 말이야.”

“게다가 과일이랑 버섯은 폐하께서 손수 구해 오셨다던데.”

“에이, 그건 아니겠지. 할이랑 시르, 저놈들 혓바닥이 얼마나 긴지 몰라서 하는 소린가?”

“아니, 그런 거짓말을 뭐 하러 하겠어? 안 그래?”

옥신각신하는 말들은 두서가 없었지만 어쨌든 하나로 귀결되었다. 그것은 바로 ‘황후 마마께선 보통 사람과 다르시다.’라는 것이었다.

“그건 그렇지. 며칠 전에도 내가 얘기했잖아. 우리 황후 마마는 보통 분이 아니시라니까. 난 책봉식 때 난간 바로 앞에 있었다고. 빛에 눈이 멀지 않은 게 다행이지.”

호칭도 어느새 그냥 ‘마마’에서 ‘우리 황후 마마’로 바뀌어 있었다. 마치 숭배자라도 된 듯한 말투에 병사들은 피식거리고 웃긴 했으나 부정은 하지 않았다.

병사들 사이의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가장 빨리 눈치챈 것은 의외로 로즈안나였다. 그녀는 나무로 된 스푼으로 스튜를 떠먹으면서 테오도르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번 일 때문에 모두들 아르사크 님을 달리 보게 된 것 같아요.”

그즈음에는 테오도르도 병사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말을 어느 정도 듣고 있었다. 그는 익힌 버섯과 사슴 고기를 로즈안나의 몫으로 덜어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체로 꿈이라도 꾸는 기분이겠지. 아마 내년쯤엔 제국 전체에 소문이 파다할 거야. 화살 한 대로 병사 수천을 먹여 살린 황후라고 말이야.”

소문은 순식간에 눈덩이처럼 퍼질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 있었던 병사들 중 절반이 입을 다문다고 해도, 나머지 절반은 병영에서, 집에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붙잡고 오늘 아르사크의 무용담을 떠들어대리라.

그리고 소문을 들은 사람들 중 또 절반이 입을 다물더라도 그 나머지가 다른 친구에게, 이웃에게, 시장이나 광장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소문이 퍼지다 보면 테오도르의 말마따나 내년쯤에는 아르사크가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어가던 병사들을 화살 한 대로 살려낸 에레벤나의 화신 같은 것이 되어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 소문이 퍼지면 오히려 아르사크 님께 해로운 것이 아닐까요?”

로즈안나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섣부르고 부풀려진 유명세는 빛나는 영광이 될 수도 있지만 까딱 잘못하면 추락해 죽기 딱 좋은 절벽의 끄트머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대체로 후자의 경우가 전자보다 훨씬 많았다.

아르사크가 자신을 둘러싼 유명세에 신경을 쓸 사람이 아니다 보니, 누가 그 유명세를 이용해 그녀를 공격하려 한다 해도 까맣게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적어도 수도 귀족들이 얽힌 황실에서는, 검을 든 육탄전보다 무서운 것이 혓바닥을 이용한 정치 싸움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당장의 아르사크 님께는 지지 기반이 필요하다. 그게 어떤 부류든 상관없어. 평민이든, 귀족이든, 병사들이든. 누군가 아르사크 님을 공격하려 시도할 때 그것을 같이 막을 세력이 있어야 해. 아르사크 님은 정치에 민감하지 않으시지. 그런 걸 좋아하시지도 않고 말이야. 강한 사람일수록 자신이 잘 모르는 부분에서는 한없이 허약할 수 있어. 눈 뜨고 당하고서도 당한 줄 모르지.”

“하지만… 테오도르 님. 그런 일이라면 병사들보다 시급한 게 귀족들로 이루어진 기반을 모으는 것일 테지요. 하지만 아르사크 님께는 무리입니다.”

로즈안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테오도르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리고 갑자기 에리히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백작 부인을 좀 뵈어야겠다.’

“테오도르 님?”

생각에 잠겼던 테오도르는 로즈안나의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얼른 정신을 차렸다.

“왜 그러세요?”

“아니다. 갑자기 딴생각을 좀 했어.”

“식사를 다 하셨으면 그릇을 치울게요.”

“병사들이 할 테니 내버려 둬도 괜찮아. 너는 가서 아르사크 님이 주무실 수 있도록 준비를 도와드리거라.”

로즈안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빈 그릇을 내려놓았다. 거나한 식사를 마친 병사들은 모두 다 기분 좋게 배를 두드리며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테오도르도 빈 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르사크와 에리히 쪽을 돌아보니 로즈안나가 병사를 불러 이미 치우게 시킨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어디론가 가고 없었고, 에리히 혼자 잔불이 남은 모닥불 앞에 앉아 꺼져가는 불씨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폐하, 식사는 마치셨습니까?”

“그래. 이런 데서 식사를 해보긴 또 처음이군. 제대로 된 식기도 없이 말이야. 그 망나니가 내게 주는 고기를 나뭇가지에 꽂아줬다니까.”

에리히가 말했다. 과연 타다 남은 장작 옆에 그을린 나뭇가지들이 몇 개 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껍질을 벗겨 깨끗하긴 했다.

“밤 보초는 저와 병사들이 돌아가며 설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편히 주무십시오.”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는 자가 있거나 무슨 일이 생기면 곧장 깨워라.”

“알겠습니다.”

믿을 만한 병사들로 뽑아 데리고 왔다고는 하지만,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 때문에 경계를 소홀히 할 수는 없었다.

다행히 테오도르는 그런 점에서는 믿음직했다. 비록 전쟁에 나가본 적은 없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에리히는 테오도르의 용맹함을 알고 있었다.

“혼자서 무리하지 말고 보초는 꼭 돌아가면서 서도록 해.”

“알고 있습니다. 쉬십시오.”

시종의 시중을 받아 옷을 갈아입은 에리히가 휘장처럼 드리운 천막을 들추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와 엇갈리듯 로즈안나가 밖으로 나왔다.

병사들이 자는 천막에선 언감생심 꿈조차 꾸기 힘들 깃털 매트리스와 이불 덕분에, 침대가 없어도 바닥은 충분히 푹신했다.

기름을 빨아올린 촛불이 유리등 안에서 가물가물 타오르고 있었다. 아늑했지만, 에리히 평생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잠을 자보긴 처음이다.

그는 약간 새삼스러운 눈으로 안쪽을 둘러보다 자리에 앉아 머리를 빗고 있는 아르사크를 내려다보았다.

“머리 빗는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은데.”

“로즈안나가 하도 잔소리를 해서요. 매일 밤 서른 번씩만 빗질을 하는 것으로 타협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아침저녁으로 백 번씩 빗질을 하러 오겠다더군요.”

아르사크가 툴툴거리듯 말했다. 에리히는 그녀의 손에 들린 빗으로 시선을 주었다. 귀부인들이 자주 사용하는 상아 빗이 아니었다.

“그 빗은 뭐지?”

“토르갈에서 쓰던 제 빗입니다. 티리야가 주고 갔죠.”

토르갈에서는 아무도 상아나 보석으로 장식된 빗을 쓰지 않았다. 그 대신 나무를 깎고 다듬어 납작하고 조그만 빗을 만드는데, 쓰는 사람의 취향에 따라 양각이나 음각으로 무늬를 넣거나 수를 놓은 조그만 장식을 걸어 꾸미기도 했다.

아르사크의 빗은 아무런 장식이 없었다. 가죽에 수를 놓아 만든 빗집만큼은 훌륭했지만, 빗 자체는 그저 밋밋한 나무 빗이었다.

아르사크는 정말이지 질린다는 표정을 한 채 입속으로 수를 세면서 느리게 빗질을 했다. 지켜보고 있던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손에서 빗을 가져와 그녀의 어깨를 잡고 돌려 앉혔다.

“뭐 하시는 거예요?”

“머리 빗다가 밤 샐 생각이야? 난 피곤해.”

“머리를 빗겨주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시면 아까 먹은 사슴 고기가 튀어나오나요?”

“그대야말로 감사하다고 솔직하게 인사하면 혓바닥이 버섯으로 변하기라도 해?”

“조난이라도 당하면 유용하겠군요. 제 혀를 잘라서 구워 먹으면 될 테니까요.”

“퍽이나 맛도 있겠군. 밉살맞게 종알거리는 걸 듣지 않게 되니 그것도 괜찮을 테고.”

살벌한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에리히는 난생처음 보는 모양의 빗을 서툴게 쥐었다. 조그만 데다 손잡이랄 것이 없어서 어떻게 빗어내려야 하는지 잠시 헤맸지만 곧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는 아르사크의 머리카락을 쥔 채 천천히 머리를 빗겨주었다. 피곤하다느니 하던 것치고는 터무니없이 느린 속도였지만 아르사크는 왠지 말이 없었다.

허리께를 넘어 바닥까지 흘러내린 긴 머리카락을 빗어 내릴 때마다 은은한 향이 났다. 그 때문인지, 에리히는 저도 모르게 조금씩 아르사크의 어깻죽지 쪽으로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래로 처진 머리카락 사이로 작은 귀가 드러났다 곧 사라지고, 빗질을 하면 목덜미와 어깻죽지의 매끄러운 선이 보였다.

그리고 아르사크 역시 에리히의 기척이 자신의 등 뒤로 바짝 가까워진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그가 숨을 들이마셨다 내뱉을 때마다 피부에 돋은 보드라운 솜털들이 눈치채기도 어려울 만큼 희미하게 떨렸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갓 불어오기 시작한 봄바람에 연약한 새순이 떨리듯.

육체적인 욕망이나 행위에 대해서는 거의 백지에 가깝다시피 살아 온 아르사크였다. 당연히 이토록 가까이에서 누군가의 숨결을 느껴본 것은 태어나서 처음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 첫 상대가 에리히인데도 불쾌하지 않은 것은 무척 이상한 기분이었다.

“몇 번쯤 빗었지?”

침묵을 깨트리며 에리히가 말했다. 그러나 평소 그의 냉랭하고 무감동한 목소리와는 어딘가 조금 달랐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와 자신 사이의 팽팽하던 균형이 뭔가 이상하게 바뀌었다는 것을 감지했지만,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 그리고 어디가 이상해진 것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신의 착각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에리히가 너무 조용하기 때문에, 혹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부드러운 빗질 때문일 수도 있었다.

“…글쎄요. 스무 번쯤.”

고개를 끄덕여 봐야 등을 돌리고 앉은 아르사크에게는 보이지도 않을 테지만 에리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풍성하게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하나로 훑어 모으며 부드러운 결을 따라 빗을 내렸다. 그러자 아르사크가 조그만 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스물한 번.”

잠시 멈추었던 빗이 한 번 더 머리카락 아래의 연약한 피부를 살짝 건드리고,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스물두 번. 아르사크의 입에서도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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