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화
병사들은 모닥불을 크게 피우고 식사 준비를 하라는 명령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저녁으로 끓여 먹을 것도 없고, 기껏해야 주머니 속의 육포나 건빵 조각이 전부인데 뭐 하러 물을 길어 오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거역할 수도 없어서, 그들은 각각 조를 나누어 불을 피우고 물을 준비했다.
야영용 솥과 팬까지 모두 꺼내놓았을 무렵 활 하나를 달랑 메고 숲으로 들어갔던 아르사크가 돌아왔다. 산등성이 너머로 해가 떨어져 완전히 어두워지기 바로 직전이었다.
“아르사크 님!”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가장 먼저 들은 로즈안나가 혼비백산한 비명을 지르며 아르사크에게 달려갔다. 아르사크가 사냥을 하러 가기 위해 숲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부터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숲만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어둑한 나무 뒤에서 아르사크가 모습을 드러내자 로즈안나는 물론 지켜보던 병사들조차 입을 딱 벌렸다.
“뭐야? 사슴 처음 봐?”
아르사크는 경악한 표정의 사람들을 지나쳐 모닥불 앞에 잡아 온 사슴을 내려놓았다.
땅에 떨어지자마자 묵직한 소리가 나는 것이, 크기만큼이나 무게도 상당함이 분명했다. 그런 것을 여자가 혼자 어깨에 짊어지고 온 것을 보았으니, 병사들로서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사슴 한 마리만이 아니었다. 뿔에 감긴 밧줄에는 꿩 세 마리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아르사크는 이마에 맺힌 땀을 훔치며 멍청히 선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단검을 가진 사람이 있나?”
누군가 멍하니 단검을 내밀었다. 아르사크는 그것을 받아들더니 가죽으로 된 집을 벗기고 칼끝을 세워 순식간에 사슴의 가죽을 갈라 죽 벗겨냈다.
사슴 사냥이나 사슴 고기를 먹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거기 있는 이들 중 갓 사냥한 사슴을 해체하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검으로 배를 가른 아르사크가 갈빗대 사이를 벌려 열자 내장이 드러났다. 몇몇은 얼굴이 시퍼레졌으며, 한두 명은 등을 돌린 채 헛구역질하는 소리를 내며 멀찌감치 달아났다.
아르사크는 개의치 않고 조심스럽게 사슴을 부위별로 해체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들 멍청히 서 있어? 닭 잡아본 사람이 있으면 와서 이거나 좀 다듬어.”
아르사크가 늘어진 꿩들을 턱짓했다. 병사 중 두어 사람이 주춤거리며 나왔다. 그들이 꿩 세 마리를 낑낑대며 손질하는 동안 아르사크는 순식간에 사슴을 해체하고 내장이 든 양동이를 다른 병사에게 건넸다.
“멀찌감치 가서 땅에 파묻어. 절대로 그냥 뿌리면 안 돼. 밤중에 짐승들이 떼로 몰려들 테니까.”
병사는 양동이에 가득한 내장을 차마 쳐다보지도 못한 채 비척비척 걸어갔다. 전쟁이라도 터지면 벌벌 떨다 심장마비로 죽지나 않으면 다행일 지경인 모습에 아르사크는 기가 막혔다.
‘물러 터진 놈들. 그런 주제에 잘도 그렇게 군사를 끌고 왔겠다. 자세히 알아볼 시간만 있었던들 역으로 협박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토르갈로 군사를 끌고 왔던 테오도르의 모습을 생각하니 이제 와 헛웃음이 났다.
제국이 강성해지면서 전쟁에서 자유로워진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아르사크도 어느 정도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오합지졸일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에리히 성격에 왜 병사들을 이렇게까지 방치해 두는지 의문스러울 정도였다.
“이만하면 오늘 저녁으로는 충분하겠지?”
사슴 한 마리와 꿩 세 마리를 순식간에 먹음직스러운 저녁거리로 바꿔놓은 아르사크가 말했다.
여전히 멍청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던 병사들은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마자 그제야 신이 나서 함성을 질렀다.
“마마, 최고이십니다! 과연 에레벤나의 축복을 받으신 분이네요!”
“야, 이 자식아! 네놈같이 시커먼 게 에레벤나 님의 축복이 어떤 건지 알기나 하고 지껄이는 거냐? 버르장머리 없는 놈.”
“황후 마마께서 듣고 계신데 놈, 놈 소리 하는 놈 입은 어지간히 예의 바른 입이겠다?”
신이 난 병사들은 저마다 떠들썩하게 지껄이면서 저녁 식사를 만들었다.
아르사크는 픽 웃으며 단검을 돌려주고는 피 묻은 손을 씻었다. 그러고 보니 에리히가 보이지 않았다.
“로즈, 폐하께선 어디 계시니?”
“저, 그게… 아까 아르사크 님께서 숲으로 들어가신 후에 뒤따라 숲으로 가셨어요. 그런데 아직…….”
“뭐라고?”
아르사크는 놀란 표정으로 숲 쪽을 돌아보았다. 이미 완전히 어두워진 후였다.
“테오도르는? 같이 갔어?”
“아뇨, 테오도르 님께서는 병사들을 데리고 보초를 설 구역을 둘러보러 가셨습니다.”
“그럼 혼자 가도록 내버려 뒀다고?”
“병사들을 두 명 정도 데리고 가셨어요. 아르사크 님, 횃불을 들고 가셨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병사들과 횃불이 있으면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르사크는 저도 모르게 안심한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가 다시 얼굴을 찡그렸다.
“숲엔 왜 가신 건데?”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르사크 님을 찾으러 가신 게 아닐까요?”
“그럴 리가. 시끄러우니 오지 말라고 했는데.”
어쩐지 사슴을 잡는 내내 시비도 안 걸고 얼굴도 안 보인다 싶더니.
아르사크는 어둑한 숲속을 바라보다가 작은 횃불을 하나 들고 숲 입구를 서성거렸다. 나뭇가지 사이로 불빛이 어른거리고, 이윽고 병사 둘과 에리히의 모습이 불쑥 나타났다.
아르사크는 안도한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렸다가 에리히와 병사들의 손에 들린 바구니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에리히 쪽이었다.
“돌아왔군.”
“저더러 위험하다시더니, 폐하께선 무엇 하러 숲속에 다녀오신 건가요?”
“토끼 두 마리 잡아 올 때를 대비해서 그대의 체면이라도 세워줄까 하고.”
바구니 안에는 열매와 버섯 같은 것들이 가득 차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에리히의 손에도 흙이나 자잘한 나뭇잎 같은 것들이 붙어있었다. 그만한 일쯤이야 병사들을 시키면 됐을 것을, 굳이 자신이 직접 다녀왔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
아르사크도 그럴진대 병사들은 어련했을까. 그들은 바구니를 들고서도 여전히 무엇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표정으로 에리히와 아르사크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토끼보단 먹을 것이 넉넉한 것 같군. 너희 둘, 그 바구니를 가져가서 나눠줘라. 버섯은 요리하기 전에 한 번 더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폐하.”
병사들이 바구니를 들고 모닥불 옆으로 다가가자 또 한 번 와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기를 굽는 고소한 냄새와 기름이 튀는 냄새,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들을 뒤로 한 채 침묵하던 아르사크는 별안간 조그만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에리히는 마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눈썹을 치켜든 채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왜 웃지?”
“버섯도 딸 줄 아는 분이었다는 게 재미있어서요.”
“어렸을 땐 주방장이 냄비를 휘저으면 수프가 만들어지는 거라고 생각하긴 했지.”
“차라리 사냥을 하지 않으시고요?”
“난 활이 없잖아. 이런 숲에서 검 한 자루 들고 무슨 수로 사냥을 해?”
활이 있었던들 반드시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다는 말은 일부러 하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흙이 묻은 에리히의 손을 잡았다. 예고 없는 벌어진 일이어서, 에리히가 얼떨떨할 틈조차 없었다.
손수건을 꺼낸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손마디에 묻은 나뭇잎이나 잔가시를 떼어내고 얼룩덜룩하게 묻은 흙을 닦아주었다. 곧고 단정한, 그러나 힘 있게 느껴지는 손마디 사이, 사이를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문질러 닦은 아르사크는 에리히의 손바닥과 손등을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손수건을 다시 집어넣었다.
“깨끗해졌네요.”
손수건을 집어넣으며 아르사크가 말했다. 손과 손이 서로 떨어지려는 찰나, 에리히가 다시 아르사크의 손목을 붙잡았다. 역시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르사크는 의아한 표정으로 잡힌 손목과 에리히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왜 그러시나요, 폐하?”
에리히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눈꺼풀이 가만히 깜빡거릴 때마다, 섬세하게 자란 속눈썹이 희미한 눈그늘을 만들었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가만히 아르사크를 내려다보던 에리히는 잡았던 손목을 천천히 놓은 뒤 소매 안에서 조그만 나뭇가지를 꺼냈다. 꾀꼬리의 꼬리를 닮은 잎사귀 사이에 연녹색 꽃송이가 숨듯이 매달려 있고, 가지에서는 쌉싸름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릴리시움이라는 나무의 가지다. 꽃이 피는 시기에만 나무껍질에서 독특한 향기가 나지.”
“절 주려고 굳이 꺾어 오신 건가요?”
에리히는 대답하지 않고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41장 신혼…여행 (12)
저녁 식사는 왁자지껄했다. 조를 이루어 모닥불 근처로 둘러앉은 병사들은 저마다 같은 양의 고기와 과일을 나누어 받았다. 대충 나뭇가지에 꽂아 굽기만 해서 먹는 조부터 아예 본격적으로 스튜를 끓이는 조까지 먹는 모양새는 저마다 다양했다.
아르사크와 에리히, 테오도르와 로즈안나는 각각 둘이서 식사를 했다. 병사들은 게걸스레 식사를 하면서도 아르사크 쪽을 흘끔거리며 저마다 쑥덕거렸다.
“저기 봐. 황후께서 직접 요리를 하고 계신 것 같은데.”
“보면 볼수록 놀라운 일들뿐이네.”
“폐하께서도 별말씀 안 하시잖아. 저런 모습을 상상이나 해본 놈 있냐?”
“그나저나, 아까 죽은 사슴 말이야. 자네들도 봤어? 화살 맞은 자국이 딱 한 군데더라니까. 그것도 여기.”
병사가 자기 턱 아래의 목덜미를 툭툭 짚으며 말했다. 직접 본 병사들도 있었고 못 본 병사들도 있었지만, 모두들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살 자국은 보지 못했어도 벗겨낸 가죽이 흠 하나 없이 깨끗하다는 것은 그들 모두 보았기 때문이었다. 당장 무두질만 한다면 내다 팔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훌륭한 솜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