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운트는 어떤 곳인가요?”
“조용한 마을이야. 규모가 작아서 따로 다스리는 영주가 없이, 촌장만 있지. 네페에 흡수시킬 수도 있었지만 거리가 애매한 데다 주민 수도 적으니 굳이 그럴 것 없겠다 싶어서 독자적으로 관리하게 두었고.”
“이런 곳에서 주민들이 먹고살긴 힘들었을 텐데요.”
“이쪽의 산맥들은 전부 다 광산이었다는 걸 잊었어? 운트는 작은 마을이지만, 은이 많이 나는 광맥을 차지하고 있었어. 밭 갈면서 근근이 살았다고는 할 수 없지.”
운트까지 도착이나 하면 다행일 것이라는 에리히의 불안한 예상은 적중했다. 테오도르는 길을 막은 바윗덩이들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더라니, 지반이 약한 곳의 절벽이 무너져 내린 모양이었다.
지금 있는 병사들로는 도저히 다 치울 수 없을 흙더미와 바위를 보던 테오도르가 마차 쪽으로 말머리를 돌리자,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에리히가 창문을 열었다.
“문제가 생겼나?”
“예, 폐하. 낙석이 일어나 길이 막혔습니다. 규모가 커서, 이쪽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가지가지 하는군.”
에리히가 말했다. 테오도르도 난감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산속은 해가 빨리 떨어진다.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안전한 곳을 찾는 것이 상책이었다. 아직 해는 골짜기 높은 곳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지만,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길 한복판에서 꼼짝없이 발이 묶일 판이었다.
“어쩔 수 없군. 돌아서 가야겠다.”
“폐하, 하지만 지금 길을 돌리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립니다. 중간까지 가기도 전에 해가 질 텐데요.”
“다른 방법이 있어?”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는 줄 알면서도 에리히는 괜히 신경질을 냈다. 갑자기 기적이라도 일어나 길을 막은 바위들이 다른 데로 미끄러지지 않는 이상 마지막 남은 길을 선택하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고, 그러자면 우물쭈물할 시간이 더더욱 없었다.
“오늘 밤을 길 위에서 보내야 한다면 돌아가느라 시간을 낭비하기보다는 지금부터 숲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나을 거예요.”
테오도르와 에리히가 결정을 고민하는 사이 자는 듯이 눈을 감고 있던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무슨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채 아르사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잖아요. 최근에 무너진 절벽 근처에 막사를 펼쳤다가 밤중에 또 무너지면요? 저런 좁다란 절벽이라면 초원 지대에도 많죠. 늑대나 산양들이 돌아다니면서 예기치 않은 사고를 만들 때도 많아요. 그러니 숲으로 들어가요. 차라리 오늘 밤을 안전하게 보내고, 새벽 일찍 출발하는 게 나을 겁니다.”
숲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말에도 병사들은 크게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들로서는 차라리 앉아서 쉴 수 있는 쪽이 더 반가울 지경이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기는 했다.
로즈안나나 테오도르도 속으로는 어떨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태연하게 행동했고, 아르사크야 원래 비슷한 생활을 했으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불편한 것은 에리히 혼자뿐이었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천막을 따로 챙겨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병사들은 각자 흩어져서 숲의 빈자리에 막사를 세웠다.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천막은 병사들이 쓰는 것보다 크기는 작지만 훨씬 더 질 좋은 직물을 견고하게 짠 것이라 튼튼했다.
막사들이 하나둘 세워지는 것을 지켜보던 아르사크는 어린 병사 한 명이 말뚝을 제대로 박지 못해 끙끙거리는 것을 보고 그에게 다가갔다.
“줘보렴.”
난데없는 말에 고개를 들었던 병사는 앳된 얼굴이 사색이 된 채 허둥지둥 등 뒤로 나무망치를 숨겼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후가 와서 말을 거는 것도 황송할 지경인데 막일이나 다름없는 이런 일에 관심을 보이리라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아르사크는 빙긋 웃으며 쩔쩔매는 병사의 손에서 망치를 뺏듯이 건네받았다.
“아!”
“잘 봐.”
치맛단을 추스르며 앉은 아르사크는 말뚝의 가장자리를 단단히 붙잡은 뒤 비스듬한 각도로 망치를 힘 있게 내리쳤다.
몇 번 두드리지도 않았는데 말뚝은 곧 땅바닥에 단단히 박혔다. 쇠로 된 고리에 가느다란 밧줄을 매듭지어 당기자 축 늘어져 있던 천막이 팽팽하게 펼쳐졌다.
아르사크는 멍청히 선 병사에게 망치를 돌려주고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이런 막사를 세울 때는 말뚝을 똑바로 박으려고 하면 안 돼. 약간 비스듬하게 쳐야 잘 들어가거든. 훨씬 튼튼하기도 하고.”
“네? 아, 그,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마마.”
“그리고 천막 같은 걸 고정하는 밧줄의 매듭은 옭매듭 한두 번으로는 안 돼. 금방 풀어지니까.”
어린 병사는 옭매듭 이외 다른 매듭이 있는 줄도 몰랐고, 사실 자신이 지은 매듭에 옭매듭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아르사크는 병사에게 천막을 고정할 때 짓는 매듭의 시범을 보인 뒤 허리를 펴고 일어섰다.
테오도르가 에리히에게 뭔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르사크 님, 병사들이 오늘 저녁 먹을 것이 부족한 모양이에요.”
천막 세우는 것이 얼추 끝나자 로즈안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기저기서 배가 고프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들이 들리던 참이었다.
“네페 영지에서 먹을 것을 가져오지 않았지?”
“네. 오늘 밤중에는 운트에 도달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많은 양을 챙겨오지 않았어요. 점심 식사를 할 정도만 챙겼고, 그나마도 이동하면서 먹느라 간단한 빵과 햄 한두 조각뿐이었죠.”
“하룻밤쯤 굶어도 죽진 않는데. 왜들 이렇게 나약해 빠져 가지고.”
아르사크가 말했다. 로즈안나도 그 말에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오랫동안 힘든 상황이랄 만한 것을 겪어보지 않은 제국의 병사나 기사들은 아르사크의 생각보다 훨씬 이름값을 못 하는 편이었다.
기사단의 단원들은 대부분 가문의 차남 아니면 그 이하의 자식들로, 집에 붙어 있어 봐야 별달리 떨어지는 것이 없어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들어온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일반 병사들은 거의가 평민 출신이었는데, 그들 역시도 꾸준히 급여가 나온다는 이유로 입대를 했을 뿐, 진짜 전쟁이라는 것을 겪어본 적은 없었다.
“전쟁이라도 나면 당장에 망하겠어.”
“아르사크 님, 그런 말씀을 함부로 하셔서는 안 됩니다.”
로즈안나가 목소리를 낮추며 경고하듯이 말했다. 그 와중에도 아르사크의 말을 들은 병사들이 있었는지 서너 명이 이쪽을 이상한 표정으로 힐끔거렸다.
아르사크는 어깨를 한껏 치켜들었다가 푸, 하고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었다.
“어쩔 수 없지.”
“네? 아르사크 님, 어쩔 수 없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가는 내내 이 덩치만 큰 아기 같은 놈들이 배가 고파 징징대는 걸 들어줄 순 없는 노릇이잖아? 우는 놈한테 과자라도 하나 더 쥐여준다는 옛말도 있잖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저는 잘…….”
“나더러 제국의 어머니라며? 그럼 있는 자식들은 거둬 먹여야지. 비록 내일 아침에는 속옷 바람으로 엉덩이를 걷어차 내쫓더라도 말이야.”
40장 신혼…여행 (11)
사냥을 해올 테니 활을 달라는 아르사크의 말에, 에리히는 본인의 귀를 의심했다.
“방금 뭐라고?”
“제 활을 달라고요. 배가 고프다고 칭얼거리는 소리를 못 들어주겠으니까.”
당당한 태도였지만 아르사크의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에리히는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단칼에 거절했다.
“안 돼.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도 마.”
“그럼 폐하께서는 어쩔 셈이시죠? 이대로라면 내일은 하루 종일 굶어야 할걸요? 오늘 점심도 빈약하게 먹었다니 꼬박 이틀을 굶어야겠군요. 다들 배가 고파서 길바닥에 엎어져 풀이라도 뜯어 먹을 기세가 되지 않을까요?”
“어떤 놈이 내 이름을 앞에 달고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
“물론 폐하께서는 그 기분을 모르시겠지요. 비터 자작 내외가 폐하와 저를 위해서는 간식 바구니를 따로 챙겨주었으니까요.”
그건 사실이었다. 식량이 적다고 한들 에리히와 아르사크, 그리고 로즈안나 정도는 내일 저녁까지 굶주리지 않아도 될 정도의 간식이 바구니에 있었던 것이다.
상대가 황제와 황후이니 자작 내외로서는 당연한 조치였으며 그 정도는 병사들을 차별했다고 불평할 건수조차 못 된다.
아르사크도 그 점을 모르지 않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동행이 굶는데 자기만 배부르고 싶지는 않았다.
토르갈에서는 대규모의 병사를 이끌 일이 없었다. 함께 싸우든, 여행을 가든, 모두 가족이나 친척, 아니면 친구가 아닌 사람이 없었다. 그러니 아무리 적은 양의 식량이라도 똑같이 나눠 먹는 것에 더 익숙했다. 병사들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 정도 의리는 지켜야 한다고 아르사크는 생각했다.
“그렇다고 이 숲속에서 사냥을 하겠다고? 황후가 병사들을 위해?”
“황후가 병사들을 위해 사냥을 하는 편이 보기 좋을까요, 아니면 병사들을 풀어서 황제와 황후가 먹을 것을 구해오라 명령하는 편이 보기 좋을까요?”
“보기 좋고, 안 좋고, 그런 것은 문제가 안 돼. 터무니없는 소리거니와 위험해. 곧 해가 질 텐데, 눈에서 불빛이라도 나오나? 아니면, 횃불은 입으로 물고 활을 쏠 건가? 묘기 부릴 무대라도 차려줘?”
“그렇게 시시콜콜 따질 시간에 활을 줬으면 벌써 토끼 두 마리쯤은 잡았겠지요, 폐하. 그리고 잊으셨나 본데, 제가 폐하의 말을 얌전히 따라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아르사크가 마차의 아래에 실린 짐칸의 손잡이를 발로 툭 걷어차자 안에서 활과 검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이것 또한 천막과 마찬가지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을 대비해 챙긴 것이었다. 활줄을 확인한 아르사크가 화살통을 허리에 고정했다.
에리히는 초조한 얼굴로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정 가고 싶으면 병사들이라도 데리고 가.”
“안 돼요. 저렇게 시끄러운 신발을 신고 철커덕거리다간 있는 짐승도 다 쫓아버릴 겁니다.”
“그럼 내가 가지.”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잠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다녀오는 게 빠릅니다. 모닥불이나 잘 피워놓으라고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