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55화 (55/191)

55화

흰 목덜미 위로 부드럽게 흘러내린 에셴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짝 매만지던 랜크버 백작은 다시금 순진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미소를 띠면서 아내에게 찻잔을 건넸다. 책 읽는 것밖에는 소질이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 랜크버 백작은 차를 끓이는 솜씨도 일품이었다.

에셴은 책상 겸 테이블 앞에 마련된 소파에 앉아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천천히 음미했다. 그러는 사이 랜크버 백작은 하인들이 가져다 놓은 책을 뒤적거리며 금방 무시무시할 정도로 조용해졌다. 하여튼 책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다과회에서는 좀 재미있는 일이 있긴 했어요.”

에셴이 말했다. 랜크버 백작은 코끝으로 흘러내린 동그란 안경을 추켜올리며 눈을 깜빡였다.

“그랬어요? 어떤 일인데요?”

“홀드빅 자작가의 아가씨요. 그냥 얼굴만 예쁘장하고 종달새처럼 떠들기나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꽤 당돌하더라고요.”

“홀드빅 자작에게는… 딸이 여럿 있잖아요? 그중 누구요?”

“당신도 참. 그런 자리에 올 만한 딸이라고 해봐야 한 사람뿐이죠. 루이제 말이에요.”

이름을 듣고도 랜크버 백작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마 루이제의 얼굴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셴은 다시 차 한 모금을 입술 사이로 머금으며 뜻 모를 미소를 띠었다.

“자작이 금지옥엽 막내딸을 어떻게 교육하고 계신지 꼭 한번 들어보고 싶군요. 언제 한번 자리를 마련할까 봐.”

“네……? 그건… 그건 왜요?”

“그냥요. 말을 참 잘하더라고요.”

에셴의 대꾸에 랜크버 백작은 고개를 갸웃하며 안경 코 받침을 만지작거렸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몸짓이다. 에셴이 미소를 띤 채 책을 턱짓하자, 그는 또다시 금세 책 속으로 빠져들어 말이 없었다.

* * *

새벽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폭우 때문에, 원래 네페 영지에 머물기로 한 일정보다 오래 발이 묶이게 되었다.

쏟아지는 빗물과 습기 찬 안개로 뿌옇게 흐려진 창문 밖을 바라보고 서 있던 에리히는 축축한 냉기가 배어 나오는 돌벽을 손끝으로 짚었다. 손톱 아래로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고 코끝에는 이끼 냄새가 끼쳤다.

“만약 오늘 밤까지 이 정도로 비가 내린다면 원래 사용하기로 했던 길은 쓸 수 없게 될 것 같습니다.”

옆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말했다. 다음 목적지인 오르힙까지 가장 빨리 갈 수 있는 길은 네페에서 서쪽으로 난 길을 계속 따라 내려가는 것인데, 길옆으로 작은 강을 하나 끼고 있어 비가 많이 오면 길이 잠기기 십상이었다. 혹시 길이 잠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수위가 높아진 강 근처를 굳이 지나가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에리히는 창밖의 빛깔로 흐려진 유리창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다 말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 낫겠지.”

“하지만 에리히 님, 황궁을 너무 오래 비우시면…….”

“숙부님이 계시니 별문제는 없을 것이다. 어차피 예정된 날짜에서 하루 이틀 정도밖에는 차이가 나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할 것 없어.”

테오도르는 수긍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침착하게 가라앉은 테오도르의 눈을 가만히 쳐다보던 에리히가 어깨를 으쓱이며 화제를 돌렸다.

“누님은 잘 계신가?”

느닷없는 질문에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던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분에 잘 있습니다.”

“저택을 수리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 그건… 그냥 간단한 공사입니다. 처마의 빗물받이를 손봐야 하는데, 그러는 김에 위층의 테라스도 좀 정리하려 한다더군요.”

“랜크버 백작이야 빗물받이가 삭아 내리든 말든 책만 안 젖으면 관심도 없을 테고, 누님이 고생하시겠군.”

“자형은 워낙 책밖에 모르니까요. 다행히, 누님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도와 집안의 대소사를 많이 처리해서 저택을 꾸려나가는 것이 어렵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 사람한테 어려운 일이 있기는 한가?”

에리히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띤 채 시선을 내렸다.

“황궁으로 돌아가면 백작 부인을 좀 뵈어야겠다.”

“예? 폐하께서요? 무슨 일이신지…….”

“부탁드릴 것이 좀 있어서. 설마 황제의 부탁인데 들어주겠지.”

“폐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차라리…….”

“네가 못 하는 일이니까 백작 부인을 모셔 오라는 것 아니냐.”

테오도르는 잠깐 골똘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밤까지 계속될 것 같은 비였다.

39장 신혼…여행 (10)

테오도르가 예상했던 대로, 비는 과연 하루 종일 내렸다. 해가 지고 밤이 되어도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새벽이 깊어졌을 무렵에야 겨우 빗줄기가 가늘어졌고, 아침 식사를 마칠 때쯤이 되니 언제 그렇게 퍼부었냐는 듯 얄밉도록 밝은 햇빛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땅은 진창이 되어 엉망이었지만 시기를 더 지체할 수는 없어서, 에리히와 아르사크는 오후가 되기 전에 네페를 떠나기로 했다.

비터 자작 내외와 클루이트가 배웅을 나왔다. 영지의 주민들도 몇몇이 얼굴을 보였다. 아르사크는 그새 친밀해진 주민들 한 명, 한 명과 인사를 나누고, 마지막으로 클루이트와도 작별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르사크가 네페에 머무는 동안 클루이트의 검술은 일취월장했다. 에리히의 말대로 기사 시험을 치를 정도는 아니었지만, 어정쩡하던 자세며 검을 휘두르는 방식이 완전히 딴판으로 달라졌던 것이다.

그 변화를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클루이트 본인이었고, 당연히 아르사크에게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클루이트는 아르사크가 마차에 오르기 전에 조그맣고 까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게 뭐죠?”

“원래 제국에서는 제자가 스승을 떠날 때 가르침에 대한 보답으로 선물을 드리는 관례가 있지요. 그러니 저도 마마께 감사와 존경의 뜻을 담아 드리는 선물입니다.”

“가르친 것이 많지도 않은데 이런 걸 받을 수는 없어요.”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성의이오니 부디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아르사크는 미소를 띠며 상자의 모퉁이를 매만졌다. 결이 반들반들하고 부드러운 것으로 미루어 어제오늘 급하게 만든 것은 아니고, 아마 주인이 오랜 시간 아끼고 소중하게 다루던 물건인 것 같았다. 경첩만은 새로 달았는지, 얇은 금속이 흠집 없이 반짝거렸다.

“그럼 고맙게 받죠.”

“부디 평안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에레벤나께서 폐하와 마마를 축복하시기를.”

클루이트는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아르사크는 상자를 손바닥 안에 감싼 채 마차에 올랐다.

먼저 마차 안에 앉아 있던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손에 들린 상자를 보고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건 뭐야?”

“저의 첫 제자가 작별 선물로 준 것이죠.”

“그깟 목검 휘두르는 방법 좀 가르치고 스승 대우라니.”

말하는 어조가 왠지 불평이라도 하는 듯이 삐딱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개의치 않고 무릎 위에 상자를 올려놓았다. 뚜껑을 고정하고 있는 잠금쇠를 풀자 경쾌하게 딸깍거리는 소리가 났다.

에리히는 심드렁한 척 턱을 괴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상자 쪽을 향해 있었다.

“뭔데? 금화라도 들었나?”

“아뇨, 금화는 아니고… 돌이네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 쪽으로 몸을 당겨 앉았다.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크기의 돌덩이였다. 세공된 것도 아니고 투박하게 울퉁불퉁한 것이, 마치 조금 전에 길바닥 어딘가에서 주워 온 것 같기도 했다.

돌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돌려보던 에리히가 말했다.

“수정 원석이군.”

“원석이라고요?”

“그래, 봐.”

에리히의 손끝이 돌의 갈라진 틈새를 가리킨다. 자세히 들여다보자, 안쪽으로 장밋빛의 소금 알갱이 같은 것들이 보였다.

아르사크가 신기해하자, 에리히는 짧게 코웃음을 치면서 상자 안에 돌을 내려놓았다.

“이런 건 처음 보는군요. 분홍색 수정도 있다는 건 처음 알았습니다.”

“이 지역에서만 나는 희귀한 보석이지. 그 보석을 채굴하던 광산은 오래전에 폐광되어 이제 더는 나지 않는데, 클루이트가 그대와 헤어지는 게 몹시 아쉬운 모양이야.”

“질투가 난다면 그렇다고 말을 하시죠.”

아르사크의 말에 에리히는 다시 한번 노골적으로 비웃는 소리를 냈지만 더 빈정거리지는 않았다. 다만 아르사크가 상자를 소중히 갈무리하는 것을 쳐다보는 눈빛은 왠지 아니꼬운 장면을 볼 때처럼 마뜩잖은 빛을 띠었다.

큰길이 아닌 데다 이틀 내내 내린 비로 마차의 속도는 무척 느렸다. 아르사크는 지루한 표정으로 연신 하품을 하면서 의자에서 이리저리 자세를 바꾸었다. 그나마 옷이 좀 편했기 망정이지, 차려입은 드레스였다면 견디지 못하고 마차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했을 판이다.

“오늘 안에 도착하긴 글렀군.”

마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에리히에게도 고역이긴 했다. 창을 열었다 닫으며 에리히가 말하자, 아르사크는 비단으로 감싼 등받이에 머리를 괴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빠른 길로 가지 않으면 오르힙까지는 만 이틀 정도가 걸린다고 들었는데, 노숙을 각오하신 게 아니었나요?”

“중간에 작은 마을이 있어. 원래 호수였던 자리의 물이 마르고 생긴 마을이라 운트라고 부르는 마을인데, 거기서 묵을 생각이었지. 이 진창에서 무슨 수로 노숙을 하나?”

“진창이라고 해서 노숙을 못 할 것은 없지요. 그럼 폐하의 말씀은 운트까지도 못 갈 것 같단 말씀이신가요?”

“이 속도로는 밤이 깊어서야 도착하겠지. 그렇게라도 도착을 하면 다행이지만.”

만약 운트까지 도착하는 길도 쓰지 못하게 되면 그때는 정말로 멀리 돌아가는 길밖에 남지 않는다.

마차가 느린 것은 그렇다 치고 에리히는 병사들이나 말의 체력도 염려스러웠다. 제 속도를 내지 못해 일정이 지체되면 좋을 것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