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54화 (54/191)

54화

“뭐… 뭐라고 했어요? 루이제 양! 이게 무슨 무례한 소리죠? 근거도 없이 그런 말을 하다니, 대체 나를 뭐로 보고……!”

“아, 그러면 황후 마마에 대한 건 근거가 있어서 그렇게 신나게 떠드셨어요? 세상에나. 제가 요새 황후 마마께 자주 드나드는 편인데, 꼭 말씀을 전하고 여쭤봐야겠어요!”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루이제는 콧방귀를 뀌고는 고개만 까딱이는 시늉을 한 채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또 몸을 돌려 얼어붙은 귀부인들을 삐딱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그리고 백작 부인.”

다과회의 주연인 백작 부인의 어깨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숨을 쉬는 것이 힘든 듯 앞가슴에 손을 올려놓는 그녀를 쳐다보던 루이제가 샐쭉하고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백작 부인께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자랑한 그 새 향수에 대해 황후 마마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안 치운 마구간 냄새가 난다.’고요. 설마 존귀한 마마의 의견에 토를 다실 배짱은 없으시겠죠? 말똥 냄새 같은 걸 좋다고 온몸에 바르고 다녀도 백작께서 아무 말씀 없으셨던 걸 보면, 부인께선 참 좋은 남편을 만나신 것 같아요. 그렇게 좋은 남편을 두시고선 설마, 아직도 애인을 셋이나 두고 계신 건 아니죠?”

“루이제!”

“이만 실례할게요. 전 바빠서.”

닫히는 문 뒤에서 신경질적인 소리들이 터져 나왔지만 루이제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턱을 치켜든 채 백작가를 걸어 나갔다. 그러나 마차에 타자마자 기분이 뒤숭숭해졌다.

왜 아르사크의 편을 들었을까?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아르사크의 존재를 가장 거슬려 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루이제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흥,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설치니까 꼴 보기 싫었던 것뿐이지.”

아무도 듣지 않는데 꼭 누가 있기라도 한 양 혼잣말을 한 루이제는 예쁘장한 입술에 뾰로통한 기색을 띤 채 눈을 감았다. 그러다 문득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라니. 도대체 그런 터무니없는 소문이 어쩌다 퍼진 걸까?

“네페는 여기서 꽤 먼데…….”

황제 부처가 신행에서 돌아온 후로 생긴 소문이라면 모를까, 아직 신행지에서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수도 귀족들 사이에 소문이 돌기 시작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갑자기 골치가 아팠다. 왠지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38장 신혼…여행 (9)

루이제가 나가버린 이후, 뒤에 남은 부인들은 부채를 흔들며 얼굴의 열을 식히느라 바빴다. 간간히 기가 막힌다는 듯한 신경질적인 한숨들이 터져 나왔지만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는 못했다.

루이제가 했던 말들 중 사실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입 밖에 내서 말하지 않는 공공연한 비밀을 포대 자루 털듯 털어버리고 가버렸으니 루이제 홀드빅에게 굴욕을 당했노라고 어디 가서 씩씩거릴 수도 없었다.

“실례지만, 저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군요.”

모두가 시뻘게진 얼굴을 식히고 있던 찰나에 구석진 곳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풀이할 대상을 찾아 씨근거리고 있던 부인들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이 누구인지를 확인하자 입술 뒤까지 치솟았던 욕설을 다시 삼키느라 애를 먹었다.

“랜크버 백작 부인, 무슨 말씀을요. 저희들은 그저…….”

“오해 마세요. 여러분들은 부디 계속 말씀을 나누시길. 저택을 수리하기로 해서, 오늘 중으로 끝내야 할 일이 많을 뿐이랍니다.”

랜크버 백작 부인이라 불린 여자가 생긋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부인들은 저희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건성으로 고개를 숙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랜크버 백작의 저택은 수도의 중심부에 위치하지는 않았지만 숲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황궁의 북쪽 성 끄트머리가 보이는 조용한 곳에 있었다.

정원을 가로질러 저택의 현관 앞에서 마차가 멈추자, 백작 부인은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석조 바닥을 디디는 우아한 구두 소리가 미처 홀을 다 지나기도 전에 계단 위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작 부인은 고개를 들고 난간 쪽을 올려다보았다. 여러 권의 책이 아슬아슬하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아니, 휘청거리는 것은 책을 든 사람의 걸음걸이였고 책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여보.”

백작 부인이 말했다. 그러자 책더미 뒤에서 안경을 쓴 얼굴이 쑥 튀어나왔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머리카락이 귓가에서 온통 흐트러졌고, 입술 옆에는 잉크 자국인지 뭔지 지저분한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남자는 부인의 얼굴을 보자마자 순한 양처럼 미소를 띠었다.

“부인, 오셨어요?”

“그러다 책을 다 떨어트리겠어요.”

백작 부인은 치맛자락을 잡은 채 두 칸씩 계단을 뛰어올랐다. 하인들도 허둥지둥 그 뒤를 따라 올라왔다. 남편이 품 안 가득 안고 있던 책을 하인들에게 반씩 나누어 들게 하고, 그녀는 남편의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삐뚤어진 안경을 바로잡았다.

부부라기보다는 마치 아이를 돌보는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남편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는 애정이 담겨 있었다.

“하인들을 부르시지 않고요.”

“아, 그럴 걸 그랬군요. 흥미로운 연구거리를 생각하면서 들떴더니, 그만… 아, 그 책들은 서재로 옮겨놔. 떨어트리지 않게 각별히 조심하고.”

“입술 옆에 이건 뭔가요? 학문의 신인 인케와 입맞춤이라도 하신 건가요?”

“예? 어, 그, 그렇지 않아요. 아… 아무리 학문의 여신이라도 난 부인이 있잖아요. 다른 여자랑 입맞춤 같은 건 안 해요.”

웃자고 한 소리인데 죽자고 진지한 대답이다. 그러나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듣기 좋자고, 또는 아부를 하자고 꾸며내는 말이 아니라는 점이 랜크버 백작의 독특한 점이었다.

그는 입에 발린 소리라곤 할 줄 몰랐다. 거짓말은 세 살배기만도 못 한 수준이다. 백작 부인은 다과회에서와는 딴판인, 장난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띠면서 손수건으로 남편의 입가를 가볍게 문질러주었다.

“당신이 제게 얼마나 충실한지 알아요.”

“그럼요. 난 부인밖에 없어요.”

“엄밀히 말하면 저밖에 없는 건 아니죠. 저만큼이나 사랑하는 것들을 저 서재 안에 수백, 수천 권씩 쌓아두고 있잖아요.”

“네? 무, 물론… 물론 책은 좋아하죠. 연구도… 공부하는 것도 내 인생이긴 하지만, 그래도 부인하고 비교할 수는 없어요.”

“정말요? 그럼 당신 서재에서 연구를 방해하면서 차를 좀 마셔도 되겠어요?”

“물론이죠.”

백작 부인은 생긋이 웃으며 남편의 팔을 자연스럽게 잡았다. 부부는 키가 비슷했다. 구두 때문에 부인이 좀 더 키가 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랜크버 백작은 누가 말을 걸거나 건드리지 않으면 하루 온종일이라도 서재에만 틀어박혀 책을 읽고 뭔가를 끄적거리는 게 일과의 전부여서, 어깨나 등이 늘 구부정했고 움직임에도 그다지 씩씩한 활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백작 부인은 등을 펴라는 뜻으로 남편의 허리를 툭 두드리고는, 하인들에게 차를 끓여 오라 한 뒤 서재의 문을 닫았다.

랜크버 백작의 저택은 다른 수도 귀족들의 저택만큼 화려하지도, 웅장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장식이나 정원은 큰 자랑거리가 못되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가치가 있고 자랑스러운 것은 화려한 석조 난간이나 정원의 분수가 아니라 바로 이 서재였다. 줄잡아 백 년, 혹은 그 이상은 되었을 희귀한 고서적에서부터 최근 제국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학자들의 연구 자료의 필사본, 황실에서도 여러 번 탐을 낸 바가 있는 다른 나라의 다양한 책들까지 그야말로 없는 게 없었다.

제국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국가 도서관 다음으로 큰 서고가 바로 랜크버 백작의 서재였고, 다양성으로만 따지면 국가 도서관을 능가할 수도 있었다. 물론 백작의 대에서만 이루어진 수집이 아니라, 몇 대에 걸쳐 이어져 내려온 집안의 가보 또는 유물이기도 했다.

“에셴, 당신이 좀 더 늦게 오실 줄 알았어요.”

랜크버 백작 부인, 에셴은 먼지 쌓인 책등을 훑어보다 남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따분해서요.”

“오늘 모인 분들은… 부인과 평소에 친분이 많지 않은 분들이었지요?”

“전 따로 친분이 있는 사람이 없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전 그게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평소에도… 아, 고마워. 여기다 내려놔.”

차와 과자가 든 쟁반을 내려놓은 하인은 조용히 서재의 문을 닫고 나갔다.

랜크버 백작은 손수 차를 우려내며 안경 너머로 에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마치 초식동물처럼 얌전하고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이상하다니. 뭐가 이상하다는 건가요, 여보?”

“그게, 부인은… 모임에는 자주 참석하시면서, 따로 누굴 저택에 부르거나…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상대가 없다는 점이요. 아, 호, 혹시 내가 너무 틀어박혀 있기만 해서 민망한 거라면, 부인이 친구들과 편하게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저택 옆에 작은 별채를…….”

“여보.”

찻잔에 차를 따르고 있던 랜크버 백작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안경에 김이 뿌옇게 서려 눈이 보이지 않는데, 그 와중에 입술은 약간 벌리고 있어서 그렇게 바보스러울 수가 없었다.

에셴은 콧잔등을 찡그리며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그에게로 다가가 김 서린 안경을 벗겼다. 색이 연한 녹색 눈동자가 보였다.

순진하게 눈을 깜빡이는 남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에셴은 느닷없이 상체를 기울여 그의 입술 근처의 얼룩에 짧게 키스했다.

랜크버 백작은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이 새빨개졌다. 쑥스러움을 숨기려 헛기침을 해보았지만 움츠러든 어깨까지는 숨길 수가 없었다.

“난 누구 앞에서도 당신을 민망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요. 설령 황제 폐하가 납신다고 해도 당신이 부끄럽다는 생각은 안 해요.”

“…그, 그건 알아요. 그냥 내가… 저기, 다른 남편들처럼 뭔가… 그, 그렇잖아요. 난 책 읽는 것밖엔 재주가 없고…….”

“당신이 그 나무 아래에서 책에 푹 빠져 있지 않았더라면 제가 당신에게 반할 기회도 없지 않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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