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37장 신혼…여행 (8)
아직 수다 떠는 것을 좋아할 나이인지라, 루이제는 사교 모임을 퍽 즐기는 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직 미혼이므로 엇비슷한 또래의 귀족 영애들과 어울릴 때가 많았지만, 아버지인 홀드빅 자작의 뒷배 덕분에 루이제보다 나이가 다소 많은 귀족 부인들의 모임에 초대되는 일도 잦았다.
사실 루이제는 또래 아가씨들이 아닌 귀족 부인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비슷한 연배의 또래들은 곱게 자란 귀족 영애들답게 저마다 고집도 개성도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은 나이가 어려 터무니없이 순진한 구석도 있었던 것이다.
고만고만한 또래들 가운데서 특출나게 예쁜 루이제는 그 미모만으로도 호감이나 관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좀 더 나이가 많고,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이제 막 결혼을 앞둔 시점의 귀부인들은 루이제의 외모 같은 것에 기가 죽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은 좀 더 복잡하고 은밀한 만큼, 앞에서는 루이제를 칭찬하는 척하면서도 돌아서면 하루 종일이라도 루이제를 헐뜯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인물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소한 신변잡기 잡담이 아닌, 뭔가 제대로 된 정보를 얻고 싶다면 미혼의 아가씨들보다는 귀부인들의 모임에 참석해 앉아 있는 편이 훨씬 더 나았다.
그들이 하는 이야기도 루이제의 또래와 별반 차이가 없을 때가 많긴 했지만, 남편도 있는 데다가 정치적인 연줄에 직접적으로 발을 걸칠 수 있는 위치의 사람들이다 보니 때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쓸 만한 정보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 강보에 싸인 채 눈도 못 뜬 아기의 혼수 이야기며 살림 이야기 사이에서 따분한 표정을 짓고 있던 루이제는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루이제,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나요?”
루이제는 자신에게 말을 건 상대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런 태도는 누가 봐도 실례였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상대는 오늘 모임을 주최한 장본인이자 백작의 후처로, 루이제보다 두 살이 많았는데 어릴 때부터의 꾸준한 취미 중 하나가 루이제의 속을 긁어놓는 것이었다.
“불편하긴요, 차가 아주 맛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답니다.”
“그래요? 그거 다행이네요. 원한다면 돌아갈 때 조금 나누어 줄게요. 하녀를 시켜 챙겨놓으라고 하죠……. 거기, 너. 이쪽으로 와봐. 그래. 주방에 얘기해서 찻잎을 조금 챙겨놓으라고 해. 루이제 양에게 선물로 줄 수 있도록.”
“호의는 고맙지만 됐어요.”
루이제가 샐쭉하게 말했다. 순간 멋쩍은 상황에 놓인 백작 부인의 표정에 불쾌한 기색이 잠시 드러나자, 둘러앉은 사람들은 호기심 반, 우려 반인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우리가 루이제 양을 너무 배려하지 않았네요. 아직 혼인하기 전인 아가씨를 앉혀두고 재미없는 이야기만 했잖아요?”
그나마 눈치가 좀 빠른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은 루이제를 배려해서가 아니라 대놓고 어린애 취급을 하는 것이었다. 단순하고 직설적인 성격이기는 해도 자신을 향한 공격만큼은 잘도 눈치채는 루이제가 그 의도를 모를 리 없었다.
이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황제와 황후가 나란히 궁을 비운 지금, 홀드빅 자작은 아르사크에 대한 쓸 만한 정보를 얻거나 아니면 직접 아르사크에 대한 의혹을 퍼뜨리기에 이런 모임이 제격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자작은 딸에게 단지 ‘너도 곧 그들과 자주 어울리게 될 것’이라고만 말했지만, 그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는 분명했다.
‘당연하지, 내가 황후가 되면 다들 굽신거리면서 내 발치를 서성거릴 테니까. 재수 없는 여자들.’
루이제는 자신이 황후의 자리에 올랐을 때 이들이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볼지 상상하자 썩 기분이 좋아졌다.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불가능한지, 그런 것을 교묘하게 타진하고 계산할 만큼의 교활함이 루이제에게는 없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루이제는 자신의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도 할 줄 몰랐다.
단지 ‘아르사크를 쫓아낸다.’는 데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어떻게 쫓아내야 좋은지, 자신의 손에 쥔 패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참, 제가 놀라운 소문을 하나 들었답니다.”
소문을 하도 잘 듣고 다녀 귀부인들 사이에서 ‘나팔 귀 딜라’라는 우스운 별명이 붙은 딜라이라가 말문을 열었다.
모두들 그녀의 말을 반기는 척하면서도 속으로는 비웃고 있었고, 또 비웃는 한편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소문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단순한 뜬소문도 잘 주무르기만 한다면 급할 때 쓸 수 있는 유용한 칼날로 돌변하기 때문이다.
“자작 부인, 또 재미있는 말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어서 얘기해 주세요.”
“그것이… 저도 건너서 들은 데다, 또 이렇게 떠벌려도 되는지 걱정스러운 이야기라 조심스럽네요.”
예의상 가식적인 의뭉을 떨고 있지만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딜라의 말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들 어서 말해보라며 장단을 맞추자 딜라는 그제야 만족한 듯이 부채를 펼쳐 우아하게 흔들면서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여러분 중에도 아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그런 말을 하면서 딜라는 왜인지 루이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이제는 그녀가 왜 자신을 쳐다보는지 몰라 새초롬한 표정으로 부채의 깃만 만지작거렸다.
“폐하와 황후께서 신행을 떠나신 지 열닷새가 지나지 않았겠어요? 듣자니 여느 관광지도 아닌, 네페 영지로 떠나셨다 하시는데…….”
“그 먼지만 날리는 곳으로 어째서 신행을 가신 걸까요?”
“황후 마마의 취향이신가 보죠.”
말이 가로막히자 딜라의 입가에 초조한 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다른 귀부인들은 저마다 아르사크에 대해 빈정거리느라 딜라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결국 참다못한 딜라가 다시 과장스레 목 가다듬는 소리를 내며 귀부인들의 얼굴을 천천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이야기하는 양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저도 이야기를 들었을 땐 참 이상하다 생각했답니다. 신행을 떠나시기에 더 훌륭하고 적합한 곳이 얼마든지 있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소문을 듣자니 황후 마마께서… 네페 영지에 정부(情夫)를 두셨다는 소문이에요.”
갑자기 테이블 위로 놀란 숨소리와 웅성거림이 쏟아졌다. 그게 정말이냐고 되묻는 사람부터, 그럼 그 신행은 정부를 만나기 위한 가장일 뿐이었냐는 경악스런 설레발까지 다양했다.
루이제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루이제는 다른 귀부인들과 달리 딜라의 말에 그렇게 빨리 반응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든 생각은,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지만 ‘그럴 리 없는데’라는 생각이었다.
“황후가 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정부를 두다니, 보기보다 수완이 대단하신 분이었네요.”
“또 모르는 일이죠. 에레벤나께서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그렇잖아요? 변방의, 이름도 잘 모르는 부족… 그런 곳에서 온 분이니…….”
“어쩌면 그 부족은 남편을 여럿 두는 풍습이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말도 안 돼!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렇게 질서가 없으려고요?”
“어머, 모르는 말씀이에요. 제가 옛날에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곳에서는 따로 정해진 반려가 없이 마을의 모든 남성들이 자유롭게…….”
“세상에, 믿을 수가 없네요. 끔찍해요. 그런 곳에서 온 여자 앞에서 머리를 숙여야 한다니…….”
이야기는 금방 부풀려졌다. 딜라가 더 이상 재잘대고 말고 할 틈이 없었다. 그녀들은 마치 이 화제를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아르사크를 사정없이 헐뜯기 시작했다.
한번 나온 말은 입 하나를 지날 때마다 더욱더 거칠어지고 조심성이 없어졌다. ‘황후 마마’라는 호칭은 어느샌가 사라지고, 귀부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아르사크는 ‘그 여자’였다. 마치 천대받는 무희나 광대, 혹은 그보다 더 나아가 작부라도 부르는 듯한 경멸이 담겨 있었다.
루이제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찌나 드세게 몸을 일으켰는지 테이블이 덜컹거리며 찻물이 흘러넘쳤다.
떠들어대던 목소리가 일시에 멈추고, 모든 눈들이 놀라움으로 휘둥그레져 루이제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이제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왜 자리에서 일어섰는지 알지 못했다. 의혹과 의문을 품은 시선들을 마주치자 더 혼란스러웠다.
아르사크에 대한 험담이 화제가 되길 가장 기다린 것은 자신이었다. 눈치를 보아가며 언제 이야기를 꺼낼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정작 아르사크가 도마에 오르자 견딜 수 없는 기분이 치솟았던 것이다.
이 자리에 모인 귀부인 대다수가 별장이나 다른 곳에, 남편 몰래 정부나 애인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루이제는 알고 있었다. 사실 정도가 심하지만 않다면 그 정도는 공공연한 비밀에 불과할 뿐이다.
황후 정도나 되는 인물이 그럴 마음만 먹는다면, 그야 말할 도리도 없다. 경우에 따라서는 집요하게 문제 삼는 자가 오히려 촌스럽고 깐깐하다는 취급을 받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이 반응은 뭐람? 게다가 아르사크의 경우는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이 아닌가. 몇 번 소곤거리고 끝날 만한 뜬소문을 진실인 양, 그것도 살까지 붙여가며 아르사크를 헐뜯는 것이 가증스러웠다.
루이제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도도하게 턱을 쳐들었다.
“이 자리에 모인 분들은 모두 사교계에서 대단히 정숙하고 우아한 숙녀분들이라 명성이 자자하신데, 오늘 보니 그 명성이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네요.”
“루, 루이제 양?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남작 부인, 사람들이 부인을 두고 뭐라고 수군거리는지 아세요? ‘남작 부인의 여름 별장에 있는 정부들이 헐벗기 시작하면, 그때 비로소 여름이 온 것이다.’라는 말이 있던데,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