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52화 (52/191)

52화

“당신은 왜 그렇게 적이 많죠?”

아르사크의 질문에 손가락의 움직임이 잠시 멈추었다.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에리히의 얼굴이 정면으로 내려다보였다.

과연 설산의 꽃이라는 우스운 평판까지 무색하게 만들 만큼 깨끗하고 아름다운 얼굴이다. 솜씨 좋은 도공이 정교하게 빚어놓은 도자기처럼, 흠집이나 뒤틀린 곳 하나 없는 그 얼굴은 언제고 냉랭한 빛만을 띠고 있었으나 지금은 조금 달라 보였다.

그것은 흐트러진 앞머리 탓인 것 같기도 했고, 그의 얼굴을 위에서 수면의 물결처럼 일렁이는 촛불 탓인 것 같기도 했고, 희미한 수증기와 함께 피어오르는 향기 탓인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아르사크를 바라보며 말이 없던 에리히는 다시 고개를 숙이며 발등 위쪽의 도드라진 뼈를 부드럽게 주무르듯이 눌렀다.

“지킬 것이 많으면 적도 많아지지. 모르는 바도 아닐 텐데?”

“귀족들을 모조리 적으로 돌려야 할 만큼 제국의 상황이 절박하다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만.”

“지금은 그렇지. 하지만 곧 그렇게 될 거야. 그 순간이 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을 테고. 나는 아마 늙어서 누구와 싸울 힘도 없을 테니까.”

“그래서 힘이 있을 때 최대한 물어뜯는 것인가요?”

“잘 아는군. 아무리 강한 맹수라도 늙고 지쳐서 이빨이 빠져버리면 허약한 고양이보다도 쓸모가 없으니까. 아무렇게나 걷어차이다 결국 관짝에 드러눕는 신세나 되겠지.”

자기 자신, 그것도 긴 역사를 자랑하는 제국의 황제의 말로를 논하는 것치고는 지나치게 신랄한 평가였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에게 잡히지 않은 발끝으로 장난치듯이 물을 살짝 휘저으면서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댔다.

“그런 말을 그토록 아무렇게나 내뱉는 건, 선황이신 폐하의 부친께도 이만저만한 불효가 아닐 텐데요.”

“헛소리 마. 난 아버님을 존경해. 그러나 존경하는 것과 현실은 인정하는 건 별개의 일이지. 선황께서는 즉위 초반부터 온화한 정책을 펼치셨고 황제다운 자비를 베푸셨지만, 물어뜯고자 달려드는 이빨을 막을 만한 철갑은 가지지 못하셨지. 그래서 그대의 부친께 도움을 요청해야 했던 거고.”

선황이 즉위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국에는 내란이 일어났다. 선황은 두 번째로 난 황자, 그것도 정식 황후가 아닌 후궁이 낳은 아들이었지만 어릴 때부터 총기가 있고 마음이 넓어 태자가 될 재목으로 일찌감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인간성만으로는 결코 제국의 황태자가 될 수 없다. 선황의 외가가 대대로 세력이 큰 귀족 가문이었다는 점이 아마도 그를 황제로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의 형 역시 다른 후궁이 낳은 아들이었지만 그래도 첫째라는 명분이 있었고, 네 번째, 다섯 번째로 태어난 아들은 심지어 황후가 낳은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황태자가 된 것은 둘째인 그였다.

형제들이 그를 가만히 두고 볼 까닭이 없었다. 조금 괴짜 같은 면이 있어 일찌감치 다른 나라로 유학을 떠난 다섯째 황자와, 세력이 약한 후궁에게서 태어나 비교적 황제의 관심을 받지 못했던 셋째 황자는 선황이 황제로 즉위하는 데에 불만이 없었지만 첫째와 넷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두 번째 형제가 황위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사를 일으켰다.

선황은 누구도 죽이고 싶은 생각이 없었지만 상대방이 먼저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달려드는 데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도 없었다.

내란이 진압된 후, 관련된 귀족들은 당연히 처형을 당했지만 일찌감치 발을 빼거나 몸을 숨겼던 이들은 목숨을 건지고서도 공포에 떨 수밖에 없었다. 황제가 반드시 보복을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선황은 침묵으로써 그들을 용서했고, 내란에 가담한 귀족들의 직계 가족이라 하더라도 열두 살 이하의 어린아이들은 죽이지 않았다.

그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나라를 통치했으나 제국의 사정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 황제의 보복이나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귀족들이 하나둘씩 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에리히보다 앞서 개간 사업을 진행하려 했지만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혀 끝내 합의를 이끌어내지 못했고, 과로로 인한 여러 가지 병이 축적되어 결국에는 많지 않은 나이에 죽고 말았다.

“황제든 왕이든, 누군가를 지배하는 자는 부드러울 수 없다. 진정으로 온화하고 자비로운 군주란 결국 가장 냉혹한 군주라는 뜻이지. 황제는 백성들에게 온화해야 하니까. 그리고 백성들에게 온화한 황제가 되려면 그들에게 들러붙어 사는 기생충부터 퇴치해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겠나? 기생충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발악을 하겠지. 군주에 대한 평가는 결국 양면성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에리히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발끝으로 물을 천천히 휘저으면서 말없이 그와 눈을 마주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 말씀드렸던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에리히의 손이 오른쪽 발목을 쥐었다. 동그랗게 도드라진 복숭아뼈 근처를 손끝으로 부드럽게 적시면서, 이번에는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

“토르갈이 제국에 전염병을 구제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을 때, 그때 국사를 책임지고 있었던 사람이 위든 공입니까?”

발뒤꿈치를 훑던 손이 또다시 멈추었다. 에리히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아르사크는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 읽어낼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뜻밖에도 그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당혹감이나 분노, 둘 중 하나는 분명히 드러날 것이라 생각했건만, 에리히는 마치 갑작스럽게 벽장 뒤로 사라져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텅 비어 보였다. 눈앞에 남은 것은 그가 빠져나가면서 놔둔 껍데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

“왜 그런 것이 궁금하지?”

“제 질문에 먼저 대답해 주신다면 저도 대답하겠습니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말을 들은 체 만 체 다시 발을 씻기는 일에만 골몰한 사람처럼 멈췄던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나 말을 꺼낸 순간 인내심을 발휘해 줄 여유가 사라진 아르사크는 그의 손에 붙잡혔던 발을 뒤로 확 빼냈다. 그 서슬에 대야가 약간 덜컹이고, 물방울 몇 개가 융단과 에리히의 팔목 위로 튀었다.

“대답하십시오.”

“지금 내게 명령하는 건가?”

“그건 좋으실 대로 생각하시고요.”

젖은 손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도록 가만히 팔을 늘어뜨리고 있던 에리히는 잠시 쓴물이라도 삼킨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에리히가 고개를 끄덕인 순간, 아르사크의 눈동자가 험한 빛으로 번득였다.

“전하께서는 왜 토르갈의 도움을 거절하신 거죠?”

“그대는 믿지 못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도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그 당시 나는 황태자였지만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아직 국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병중이시긴 했지만 아버님 역시 살아계셨지. 나라 안에서 벌어진 큰 사건들은 알고 있었지만, 그 이외의 문제들은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부분이었어.”

“제가 직접 여쭤본다면 전하께서 대답해 주실 것 같은가요?”

“그야 모르는 일이지. 원한다면 여쭤보도록 해. 그대가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있다는 보장은 못 하지만.”

숨을 몰아쉬느라 아르사크의 어깨가 약간 큰 폭으로 들썩였다. 그러나 에리히는 아랑곳하지 않고 놓았던 아르사크의 오른발을 다시 쥐었다.

“황녀께서는.”

손이 다시 멈추었다. 방금 전 아르사크의 눈에서 튀어 오른 불씨가 이번에는 에리히의 눈동자로 옮겨 가 있었다. 어둠이 깔린 호수처럼 푸른색이 깊어진 눈동자와 가늘게 떨리는 속눈썹 위로 불빛이 소스라치듯 일렁거렸다.

“그 애가 뭐.”

“황녀께서는 정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까?”

“그럼 열 살짜리가 무엇 때문에 죽었을 거라 생각하나?”

“폐하께서는 시신을 보셨나요?”

“보자 보자 하니 못 하는 말이 없군. 대체 그게 왜 궁금하지? 벌써 10년도 더 전에 죽은 황녀를 왜 그대가 궁금해하는 거야?”

“소문 같은, 얄팍한 호기심 때문에 묻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폐하도 아실 테죠.”

아르사크가 말했다.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었던 에리히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는 다시 벽장 속으로 사라져버린 것처럼 어딘지 허해 보였다.

“봤어. 아주 잠깐이었지만.”

에리히가 대답했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미간을 좁혔다가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이었더라도, 그의 눈으로 직접 시신을 보았다면 그게 병인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머릿속으로 혼자 짜 맞췄던 의혹 섞인 가설들은 무용지물이 되었지만, 아르사크는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이유라고 해도, 그토록 어린아이가 어쩔 수 없는 질병이 아닌 다른 이유로 고통받고 목숨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 애가 죽은 후, 나는 곧장 그 애의 방으로 달려갔지만 시종들이 날 끌어내는 바람에 오른팔밖에 보지 못했다. 피부 전체가 열꽃과 반점으로 엉망이더군. 마치… 불에 달군 쇠막대로 몹시 맞기라도 한 것처럼.”

“…열병이었나요?”

“아마도. 하지만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그 뒤로도 그 애처럼 죽은 사람은 없었어. 내가 알기로는 말이야.”

물이 거의 식었다. 에리히는 미리 가져온 보드라운 수건으로 아르사크의 발을 감싸 물기를 닦아준 뒤 대야를 들고 일어섰다.

발끝까지 온기가 돌고 온몸이 나른했다. 아르사크가 침대로 자리를 옮긴 사이, 물을 버리고 온 에리히는 창문을 등진 채 앉은 아르사크의 옆모습에 물끄러미 시선을 두고 있다가 말했다.

“그대와 그대의 부족에게 일어난 일은 유감이다.”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지요.”

“알아. 그러니 나도 무릎까지는 꿇지 않을 생각이야.”

밉살스럽게 들리는 말이었지만 아르사크는 코웃음으로 응수할 뿐 더는 받아치지 않았다.

에리히는 아무렇지도 않게 침대를 반 바퀴 돌아 올라오더니 베개 하나를 끌어다 베고 누웠다.

“은근슬쩍 뭐 하시는 거죠?”

“불만이면 소파에서 자.”

“또 말하지만 여긴 내 방이에요.”

“정확히 말하면 신방이지. 자작 내외가 그러라고 내준 방이니까. 그러니 내 방이기도 해. 내 말이 틀렸나?”

그리고 에리히는 더 이상 아르사크의 불만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모로 돌아누웠다. 약간 굽어진 등을 확 걷어찰까 말까 아르사크가 몹시 고민을 하는 동안 에리히는 금세 잠에 빠졌다.

규칙적으로 내쉬는 낮은 숨소리를 듣던 아르사크는 불만스레 눈을 굴리면서도 침대에 누웠다. 손바닥 하나도 미처 들어가지 못할 정도의 틈만을 남겨둔 채, 맞닿을 듯 말 듯 가까운 몸에서 침향목 향기가 은은하게 풍겼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