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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51화 (51/191)

51화

“어이, 킨달! 어디 가?”

슬그머니 자리를 뜨려던 킨달이라는 병사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움찔 고개를 돌렸다.

그는 경갑이 버거워 보일 만큼 왜소한 체격이었으나, 킨달의 발이 누구보다 빠르다는 것을 알고 있는 동료들은 아무도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놀래라. 왜 갑자기 소리를 벌컥 지르는 거야?”

킨달의 목소리는 남자라기엔 너무 가늘고, 여자라기엔 너무 굵었다. 마치 가느다란 활줄을 튕길 때처럼, 묘하게 악기와 비슷한 소리 같기도 했다.

병사로서의 그의 가치는 비웃음의 대상이 되지 않았지만, 그 독특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만은 이따금 놀림감이 되곤 했다.

킨달이 볼멘소리로 중얼거리자 동료들은 끌끌 웃으며 그를 흉내 내는 시늉을 했다.

“저놈 목소리 큰 게 하루 이틀이야? 그나저나 진짜 어디 가? 지금 자리 비웠다가는 자네가 남긴 빵과는 영영 작별하게 될걸.”

“배부르게들 나눠 잡수셔. 난 아무래도 배탈이 난 것 같아.”

“멀리멀리 가서 싸라. 형님들 식사 중이신데.”

“저 어린놈이 뭐라는 거야?”

“뭐, 임마? 내가 너보다 빨리 태어났거든?”

옥신각신하면서도, 킨달은 아랫배를 부여잡은 채 주춤주춤 덤불 사이로 사라졌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병사들은 킨달의 몫을 따로 챙겨놓았다.

이야기의 주제는 아르사크와 에리히의 대결에서 어느새 네페의 음식으로 옮겨갔다. 향이 독특하다, 간이 짜다, 그게 맛있는 건데 이 수도 촌놈이 맛을 모른다, 그런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느라 저녁이 깊어가고 있었다.

병사들이 모인 곳을 벗어나 어둑한 수풀 속으로 들어온 킨달은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까지 와서야 웅크렸던 허리를 폈다. 그러고는 배가 아픈 사람이라고는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막 떠오르기 시작한 달빛이 어두운 숲속을 어슴푸레하게 비췄다. 발끝에 걸리는 돌을 걷어차며 달리던 킨달은 으슥한 그늘 밑에서 번뜩이는 날붙이의 빛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가지고 왔나?”

“예, 가지고… 왔습니다.”

허리를 숙인 킨달은 각반 안에서 조그맣게 접힌 쪽지 하나를 꺼내 그늘 속의 누군가에게 건넸다.

어둠의 한 부분을 잡아 늘린 것처럼, 주변의 색깔과 아무런 구분이 되지 않는 까만 소맷자락이 뻗쳤다 거두어질 때 킨달은 강한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자연적으로는 결코 만들어지지 않는, 독특하게 강조된 나무 향기 같은 것이 킨달의 코끝을 스쳤다.

“빠져나오는 걸 눈치챈 사람은 없겠지?”

“적당히 둘러댔습니다. 배탈이라고요.”

“좋아.”

킨달의 눈앞으로 가느다란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던 그는 그 검 끝에 조그만 주머니가 걸려 있는 것을 금세 깨달았다.

겨우 손바닥 안에 숨길 수 있을 만한 크기였지만 꽤 묵직했고, 그 무게를 느끼자마자 킨달은 얇삭한 입가에 비굴할 만치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감사합니다.”

“소식은 계속해서 전달하도록.”

“여부가 있겠습니까?”

“명심해라. 누구에게 이 일을 발설하는 날에는…….”

“혀가 잘리는 한이 있어도 그러지 않을 겁니다. 염려 놓으십쇼.”

킨달이 말했다. 그렇게까지 장담하는 이유는 아직도 눈을 찌를 듯이 가까운 검 때문이기도 했다. 검이 서서히 물러나며 그늘 속으로 몸을 숨겼다. 킨달은 저도 모르게 긴장한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음 소식을 기다리겠다.”

“살펴가십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인기척이 완전히 가시고 난 후에야 킨달은 손에 든 주머니를 풀어보았다. 끈으로 조인 입구를 벌리자 그 안에 들어 있던 무언가가 달빛을 받아 찬연하게 반짝였다. 무색투명한, 보기만 해도 어지간한 자들은 놀라서 침을 흘릴 법한 다이아몬드였다.

“흐흣, 그까짓 쪽지나 좀 전하고 이런 보수라니. 이게 웬 횡재냔 말이야.”

36장 신혼…여행 (7)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무슨 일을 했는지 들은 자작 내외는 그야말로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다. 자작은 공연히 아들을 불러 말리지 않고 뭘 했느냐며 다그치는 소리를 했고, 자작 부인은 찢어진 풀피리처럼 기묘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수프를 뜨던 스푼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만찬이 소란해진 와중에도 아르사크와 에리히는 태연했다. 아니, 태연한 것을 넘어 자작 내외를 기어이 기절시키기 위해 둘이서 작당이라도 한 것 같았다.

다음에는 목검이 아닌 진짜 검을 가지고 승부를 가려야겠다는 아르사크의 농담에 자작은 수염이 푸들푸들 떨릴 지경이었고 자작 부인은 울기 직전이었다.

“그 심약한 노인들이 오늘 밤 푹 자야 할 텐데.”

에리히의 말에 아르사크는 재밌어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틀어 올렸던 머리를 풀었다. 장식을 하느라 자잘하게 꽂은 산호 머리핀을 하나씩 전부 빼내고 나니 어깨가 다 뻐근할 지경이었다.

시중을 드는 일은 대개 로즈안나가 했지만, 오늘은 에리히와 할 이야기가 있다는 핑계로 먼저 들여보낸 참이었다.

시녀들이 미리 촛불을 밝혀두고 잠자리를 정리해 놓은 터라 방 안은 쾌적했다.

벽 모퉁이에 세공된 석조 장식 위로 일렁이는 불빛을 올려다보던 에리히는 거울 앞에 선 아르사크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코르셋을 벗어 던지며 씩씩거리던 날처럼, 슈미즈 한 장만 달랑 걸친 채 머리를 빗고 있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거의 속옷만 입고 산발한 머리를 한 채 말 위에 당당하게 앉아 있던 아르사크의 모습은 에리히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지금 아르사크의 머리카락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매끄럽고 윤택했지만, 아르사크가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에리히는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밤새도록 폐하와 제가 칼부림하는 꿈을 꾸느라 내외가 모두 수척할지도 모르겠군요.”

“노인을 괴롭히다니, 악취미야.”

“폐하를 따라가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는 코웃음을 치며 의자 등받이에 걸려 있던 나이트가운을 들고 아르사크의 등 뒤로 다가갔다.

거울 너머로 서서히 가까워지는 에리히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아르사크는 그가 등 뒤에서 가운을 펼치자 의외로 순순히 팔을 벌렸다.

“오늘따라 친절이 과하시네요, 폐하.”

“그게 불만인가?”

아르사크의 표정이 잠깐 골똘히 가라앉았다. 이윽고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운의 앞섶을 여몄다.

“이왕 시중을 들겠다는데 말릴 필요는 없겠지요.”

“다음번엔 아주 발도 씻겨달라고 할 기세로군.”

“할 수 있으면 해보시든지요.”

그 말 앞에는 ‘걷어차이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이라는 의미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뜻밖에도 에리히는 잠시 아르사크를 쳐다보다가 어딘가로 향했다.

아르사크가 에리히로부터 받은 손수건을 찾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사이, 에리히는 은으로 된 대야에 물을 받아와 아르사크 앞에 섰다.

“앉아.”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폐하?”

“할 수 있으면 해보라며. 내가 못할 줄 알았나? 앉아.”

숫제 강압에 가까운 명령에 아르사크는 약간 얼떨떨한 기분으로 긴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아르사크의 발치에 대야를 내려놓은 에리히는 소매를 걷더니 로즈안나가 마련해 놓은 향유 보관용 상자 안에서 몇 가지를 꺼내 다시 돌아왔다.

아르사크는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도통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에리히를 멀뚱히 쳐다보기만 하고 있었다.

“뭐 해?”

“뭘요?”

“물 식기 전에 발 넣어.”

대야를 턱짓한 에리히는 그대로 아르사크의 발치에 앉더니 향유가 든 병의 뚜껑을 하나씩 열어 향을 맡기 시작했다. 병목이 좁고 길쭉한 병을 기울여 안에 든 기름을 한두 방울 떨어트리자 메리골드의 익숙한 향이 코끝에 훅 끼쳤다.

에리히는 다른 병에 든 것들도 한두 방울씩 비슷하게 떨어트린 뒤 손끝으로 물을 휘저었다. 알싸하고 달큰한 향기가 풍겼다.

아르사크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에리히를 쳐다보고 있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슬리퍼를 벗고 대야 안에 발을 집어넣었다. 살에 닿기에는 약간 뜨거운 물 때문에 순식간에 정강이와 허벅지에 소름이 죽 돋았다.

에리히는 물속에 잠긴 아르사크의 왼쪽 발을 부드럽게 쥐었다. 완만한 산처럼 아름답게 도드라진 발등을 엄지 끝으로 천천히 문지르는 그를 내려다보던 아르사크가 말했다.

“오늘 만찬에 뭔가 이상한 게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랬던 것 같군. 진작에 대야를 걷어차고도 남았어야 하는데 말이야.”

“이 융단은 아주 오래되고 귀한 물건인데, 남의 집에 와서 그런 행패를 부릴 수는 없지요.”

“아하, 황궁은 남의 집이 아니어서 그렇게 행패를 부리셨나?”

“거긴 당신의 집이었으니 안 부릴 행패도 부린 거고.”

“그렇게 나오시겠다. 이런 망나니를 떡하니 황후로 뽑아놓다니 에레벤나의 눈은 발등에 가 붙었나 보군.”

에레벤나는 제국에서 신을 부르는 여러 가지 이름 중 하나다. 비터 자작보다 더 이전의 세월을 살았던 사람들은 신을 엑타, 사펜티나 등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지만, 대중적으로 가장 많이 불리는 이름은 에레벤나였고 현재 제국에서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에레벤나 신이라는 이름만을 사용했다.

“신관들이 들으면 폭동이라도 일으키겠군요.”

“제발 그러라지.”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그때야말로 에리히가 원하는 대로 신관들의 지위를 박탈할 당당한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아르사크는 발을 씻기느라 아래로 숙어진 에리히의 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옴폭하게 팬 발바닥과 동그란 발뒤꿈치를 단단한 손가락으로 누르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묘한 통증과 간지러움 때문에 발끝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누가 발을 씻겨주는 상황 자체도 낯설었지만, 그 누군가가 에리히라는 것을 떠올릴 때마다 몸속 어딘가가 이상한 방향으로 묵직하게 떠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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