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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50화 (50/191)

50화

“테오도르 님, 좀 말려보세요!”

로즈안나가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그러나 테오도르도 별반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지금 아르사크와 에리히 사이에 섣불리 끼어들었다간 자신은 차치하고 두 사람 중 누군가 틀림없이 다칠 것이 분명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마차는 쉽게 세울 수 있지만, 전속력으로 내달리는 마차를 세우려고 했다가는 마차가 뒤집어질 수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황제와 황후가 목검을 들고 맞붙는, 제국 역사상 있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희귀한 구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조차 에리히와 아르사크의 살벌한 시합에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끝장이라도 보겠다는 건가?”

에리히가 말했다. 아직까지는 호흡에 여유가 있었지만 계속 이대로 움직이면 체력이 동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에리히가 쥔 목검의 끝이 아르사크의 왼쪽 어깨 쪽을 향해 뻗쳤다. 아르사크는 반대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피하며 에리히의 손목을 올려 치려 했다.

간발의 차이로 아르사크가 휘두르는 목검을 쳐낸 에리히가 자세를 가다듬으려는 듯이 두어 걸음 물러서자, 아르사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에리히를 칠 수 있을 만한 사정거리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의 움직임은 여전히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아르사크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 에리히의 다음 동작이 어떨지를 어렴풋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그건 폐하께서 원하시는 바인 것 같은데요?”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목검이 서로 부딪쳤다. 맞부딪친 검 사이로 아르사크와 에리히의 시선이 마주쳤다.

햇빛을 받아 파랗게 색이 엷어진 에리히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아르사크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에리히의 눈매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가늘어졌다. 서로를 밀어붙이는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은 채, 한참이나 아르사크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던 에리히가 말했다.

“꼭 대답해야만 하는 질문인가? 아니면 내기에 걸 만한 질문인가?”

“반드시, 꼭 대답하셔야만 합니다.”

아르사크가 대답했다. 에리히의 입매가 일자로 반듯해졌다. 아르사크는 그의 이마와 머리칼에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것을 보았다. 자신도 역시 마찬가지다. 밀어붙이는 팔과 어깨에서부터 이미 신호가 오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대치하고 있던 에리히가 반 발짝 물러난 것은 그때였다. 갑작스러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고, 미처 자세를 갈무리하지 못한 아르사크의 몸이 잠시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에리히는 목검이 닿지 않는 곳까지 순식간에 빠져나가면서 검을 든 팔만을 앞으로 쭉 뻗어 검 끝으로 아르사크의 목을 겨누었다.

로즈안나는 비명이 터지려는 찰나 손바닥으로 입을 꽉 눌렀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러지 못했다.

“폐하!”

아무도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아르사크와 에리히는 서로의 목을 향해 검 끝을 겨눈 채 조용히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흐트러진 아르사크의 머리카락이 에리히 쪽으로 유연하게 흩날렸다. 에리히는 그 향기가 무척 묘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웃음을 터뜨리며 먼저 검을 내렸다.

아르사크의 어깨도 천천히 내려갔고, 테오도르와 로즈안나, 그리고 클루이트는 각각 에리히와 아르사크에게로 달려갔다.

“폐하! 괜, 괜찮으십니까?”

“대련일 뿐인데 뭘 수선을 떨어. 수건이나 가져와라.”

허둥거리던 테오도르는 눈을 휘둥그렇게 뜬 시종의 손에서 깨끗한 수건을 낚아채 에리히에게 건넸다.

아르사크 역시 목검을 늘어뜨린 채 클루이트의 손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아내고 있었다. 당황해 얼어붙었던 로즈안나는 그제야 퍼뜩 정신을 차리고 새 수건을 가져다 아르사크에게 건넸다.

“황제의 목에 칼을 겨누면 반역죄가 된다는 건 알고 있는 거야?”

에리히가 말했다. 아무도 웃을 수 없는 농담이었으나, 아르사크는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를 띠었다.

“혼인한 뒤 폐하와 제가 처음 오는 여행인데 그 정도 긴장감은 있어야죠.”

“두 번만 긴장했다간 목이 달아나겠군. 어쨌든 비긴 건가?”

“아니죠, 제 검이 좀 더 정확한 위치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니 제 승리지요.”

“뻔뻔하긴. 그렇게 따진다면 내가 이긴 거지. 내가 먼저 우위를 점했잖아.”

“반격을 할 수 있었으니 우위를 점하셨다 할 수 없지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 말다툼을 하는 사이 클루이트는 시종을 시켜 목검을 치우게 하고 시원한 음료를 가져오게 했다. 나무 그늘 아래에 임시로 마련한 자리에 에리히와 아르사크가 나란히 앉자, 테오도르는 모여 있던 구경꾼을 돌려보냈다.

사람들은 여전히 얼이 빠진 표정으로 에리히와 아르사크를 향해 절을 한 뒤, 저마다 웅성거리며 흩어졌다. 내일 아침 해가 뜨기도 전에, 황제와 황후가 서로 검을 겨누며 한바탕 부부 싸움을 했다는 소문이 퍼져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 테오도르는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산들바람이 불었다. 얇게 썬 상큼한 오이가 들어간 사과술을 한 모금씩 마시니 달아올랐던 체온이 서서히 식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가 눈치를 주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의자 아래로 다리를 쭉 뻗은 채 어깨를 늘어뜨렸다. 보는 눈이 없으니 에리히도 아르사크의 방만한 자세에 지적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폐하의 검술은 독특하군요.”

“어떤 점이?”

“궁정식 검술은 화려하고 군더더기가 많다고 들었는데 그렇지 않아서요.”

“그런 것도 배우긴 배워. 하지만 실전에서는 아무 쓸모가 없지.”

“그리고 폐하의 움직임이 왠지 익숙하게 느껴졌습니다.”

에리히가 잠시 아르사크를 바라보았다. 그럴 만도 했다. 어릴 적, 선대 황제와 함께 토르갈을 방문했을 때 당시의 족장, 그러니까 아르사크의 부친이 에리히에게 장난삼아 몇 가지의 동작을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반면 아르사크는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검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녀가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을 때 이미 아버지가 마음의 병으로 빈껍데기처럼 공허해진 탓이었다.

고작해야 아주 어린 시절 어깨너머로 본 것이 전부일 텐데, 그 미묘한 공통점만으로 익숙하다는 감각을 깨닫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에리히는 아르사크의 총명한 감각에 새삼스럽게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물어볼 일이란 뭐지?”

“여기서는 곤란합니다.”

아르사크가 말했다. 아무리 사람이 적다지만, 그래도 남들이 있는 곳에서 위든에 대해 미심쩍은 태도를 대놓고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의 성품과는 상관없이, 그는 공작령 중 가장 세력이 큰 디몰트의 지배자이자 황제의 숙부였다. 아무리 아르사크라고 해도 아랫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곳에서 위든에 대해 함부로 논하기는 껄끄러웠다.

“둘만 있을 장소가 필요하다면 핑계 댈 필요 없는데. 부부니까.”

“저더러 망나니라 험담을 하시더니, 폐하야말로 망나니처럼 추근대시는군요.”

“황제에게 추근댄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지.”

“그럼 수작 부린다고 해드릴까요?”

에리히는 품을 뒤지더니 네모반듯하게 접은 손수건을 아르사크에게 건넸다. 이게 뭐냐는 표정으로 아르사크가 멀뚱히 쳐다보자, 그는 아르사크의 손목을 쥔 채 손바닥 위에 손수건을 얹어준 뒤 일어섰다.

“맡아두도록 해. 저녁 식사를 한 후에 찾으러 갈 테니.”

손수건에서는 침향목의 은은한 향기가 났다. 아르사크는 손수건 끄트머리를 코끝에 살짝 대었다가 허리께에 달린 주머니 안에 갈무리해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아르사크와 에리히의 시합 아닌 시합에 대한 소문은, 삽시간에 사람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테오도르가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빨랐고, 소문이라는 것이 으레 그렇듯 입에서 입을 거칠 때마다 부풀려져 나중에는 완전히 허황된 소리까지 나왔다.

아르사크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빛이 번쩍거렸다느니, 에리히가 아르사크와 검을 부딪친 순간 입맞춤을 했다느니, 그게 아니라 입맞춤을 하려 했는데 아르사크가 피했다느니 등등.

과연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평가를 내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개중에는 아르사크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아무리 황후의 자리에 있고, 에리히가 먼저 청한 시합이라고 해도 아내인 이상 그 자리에서 거절해야만 했다는 것이다.

그런 의견을 내놓는 사람들은 대체로 남자였고, 그에 반대하는 여자들은 오히려 아르사크가 아름답고 똑똑한 데다 용맹하기까지 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황후 마마는 여자라고, 여자! 폐하께서 봐주신 거라니까?”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야, 네놈은 남자 아니냐? 그럼 너, 황후 마마랑 맞붙어서 이길 자신 있어?”

“내가 어떻게 감히 황후 마마와 시합을 해? 누구 목 날아가는 꼴 보고 싶나.”

“아무튼 대단하긴 대단한 분이잖아? 책봉식에서 있었던 일을 벌써 잊은 건 아니지?”

소문은 영주민들 사이에만 퍼진 것이 아니었다. 임시로 막사를 친 병사들도 저녁 식사 시간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자마자 에리히와 아르사크 이야기로 왁자지껄했다.

아르사크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실제로 본 자들의 이야기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그 자리에 없었던 사람들은 아무리 구체적인 설명을 들어도 도통 상상이 되지 않는다는 듯, 저들끼리 머리를 갸웃거리며 저 이야기가 진짜네 아니네 소란스럽게 떠들었다.

“그나저나 정말로 황후 마마가 폐하의 목을 겨눴을까?”

“또, 또 저 귀 얇은 놈이 또 시작이다. 야, 말이 되는 소리여야지. 어쩌다 보니 그 정도 높이에서 검이 부딪친 거겠지.”

“그렇겠지? 아무리 황후 마마라도 폐하의 목을 겨누고 무사하실 수가 있나?”

“이봐들, 황후 마마가 우리 같은 병사 나부랭이랑 같다고 생각하기라도 하는 거야, 뭐야? 자네들은 부부싸움 하면서 뺨도 한 대 안 맞아봤어?”

“우리 마누라는 뺨은 고사하고 냄비를 들고 덤비는데, 뭐.”

“맞을 짓을 하니까.”

와 하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간만에 일상적인 업무에서 벗어나 새로운 장소에 온 것은 병사들도 들뜨게 하는 모양이었다. 하는 일이야 황궁에서와 별로 다를 것도 없었지만, 선선한 계절에 천막을 치고 둘러앉아 하는 식사는 별미였다. 물론 전쟁 중이었다면 얘기가 달랐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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