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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황후 따위 되고 싶댔어-49화 (49/191)

49화

에리히는 아르사크가 내려놓았던 목검을 집어 들어 번갈아 쥐어보았다. 미끄러지지 않도록 감아놓은 천은 까맣게 때가 타 있고, 흠집이 생길 때마다 표면을 조금씩 갈아내며 길들인 검의 윗부분은 반들반들했다.

에리히는 클루이트를 힐끔 바라보았다.

“자네 부친은 자네가 약질인 것을 걱정하시던데, 이 목검의 상태만 봐서는 기사단 시험이라도 칠 작정이었던 것 같군.”

“황송한 말씀입니다. 폐하의 신하로서 제국을 지켜야 함이 마땅하나 능력이 미진하여 엄두를 내지 못하였나이다.”

“검과 활을 잘 쓰는 것만이 능력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지. 자네는 네페에 필요한 인물이야. 자작과 자작 부인에게도.”

의례적인 칭찬이었으나 클루이트는 거의 감격한 것 같은 표정으로 허리를 숙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에리히는 목검을 쥔 채 목각 인형을 향해 한 걸음 나섰다가, 마치 경도를 가늠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톡톡 건드려보았다. 그러고는 테오도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테오, 검을 들고 와서 서라.”

시종과 병사들, 클루이트마저도 놀랐지만 테오도르는 예상했다는 듯이 아무런 저항도 없이 다른 하나의 목검을 들고 에리히와 마주 섰다.

두 사람은 옛날부터 같은 스승 밑에서 실력을 갈고닦은 사이였다. 테오도르가 자세를 잡자,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선 에리히도 검을 고쳐 쥐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몸이 앞으로 뻗치는가 싶더니 둔한 검날이 공기를 갈랐다. 빡! 하는 소리가 연달아 들리는 동안, 아르사크는 팔짱을 낀 채 에리히가 검을 쓰는 모습을 분석이라도 하듯 주시했다.

일반적으로 황실 또는 왕실의 자제들이 배우는 검술이란 말이 좋아 궁정식이지 실질적으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경우가 많았다.

개중에 무예에 관심이 있거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 예컨대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 정도의 입지라면 좀 더 체계적으로 실전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지만, 그 이외에는 축제 같은 큰 행사에서 여흥을 돋울 때나 쓰일 법한 화려한 검법이 대다수다. 검술 그 자체보다는, 검을 쥐고 있는 사람을 얼마나 우아해 보이게 하느냐가 더 중요한 동작이 많은 것이다.

그러나 에리히의 몸놀림은 그런 것들과는 달리 움직임이 기민하고 노리는 곳이 정확했다. 테오도르는 황제의 가장 가까운 호위이니만큼 실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매일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에리히도 테오도르에게 그다지 밀리지 않았다.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검을 쓰는 방식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르사크가 잠시 집중력을 잃은 순간, 에리히가 든 목검 끝이 테오도르의 팔 아래로 쑥 들어갔다. 거의 배를 찌르기 직전, 에리히의 목검을 빗겨 쳐낸 테오도르가 재빨리 몸을 뺐다. 잠시 대치 상태에 머물렀던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목검을 아래로 내렸다. 테오도르가 검을 등 뒤로 물리며 허리를 숙였다. 에리히는 시종이 가지고 온 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를 닦고는 픽 웃었다.

“황제라고 봐주는군.”

“그렇지 않습니다.”

테오도르가 말했다. 클루이트가 테오도르에게 수건을 가져다주는 사이, 에리히는 시종에게 수건과 목검을 건넨 뒤 아르사크에게로 다가왔다.

“감탄하는 시늉이라도 해주는 것이 남편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싶은데?”

“방금 그것이 예의를 차려야 할 만한 실력이란 말씀이시군요?”

아르사크의 대답에서는 ‘고작 그 정도로?’라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병사들이 보고 있는 데서 황제의 호위기사를 때려눕힐 수는 없지. 상식 아닌가?”

“전력을 다하면 테오도르를 이길 수 있다는 말씀이신가요?”

“해봐야 알겠지만 형편없이 밀릴 것 같진 않은데. 그만한 안목도 없는 줄은 몰랐군.”

에리히가 빈정거렸지만 그 정도로는 이제 아르사크의 속을 긁을 수도 없었다. 아르사크가 목검을 다시 집어 드는 것을 보고 있던 에리히가 말했다.

“예의 차릴 만한 실력이 아니라고 비웃은 것에 대해 책임은 질 수 있나?”

“어떻게 책임져 드리면 되겠습니까? 제가 테오도르와 대련이라도 하면 될까요?”

듣고 있던 테오도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는 필사적인 시선으로 에리히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아무리 상대가 아르사크라고 해도 감히 황후를 상대로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두를 수는 없다. 그러나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오늘부로 황제의 호위직을 사퇴해야 할지도 몰랐다.

에리히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렸다가 테오도르의 간절한 시선을 마주하고서는 짧게 웃었다.

“내 호위를 잃을 순 없지.”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테오도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가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검을 드시오, 황후.”

에리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모여든 사람들이 삽시간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그 말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목검을 쥐었다.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 수 없을 만큼 팽팽해진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든 것은 로즈안나의 기겁한 목소리였다.

“폐하, 안 됩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문제 될 것이 뭐냐? 로즈안나. 테오도르도 나와 대련을 했는데, 황후와 못 할 것도 없지.”

“그래도 안 됩니다. 테오도르 님과 마마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습니까? 이건 마마께 불공평한 대련입니다. 마마는 결코 폐하께…….”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 얘길 하고 싶은 거냐?”

에리히의 질문에 로즈안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대련이라 해도 황제에게 무기를 겨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처음에는 여흥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까딱 잘못하면 모반으로 오해를 받기 십상이다.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이해한다 하더라도, 아르사크가 쫓겨나기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귀족들의 귀에 이 일이 전해진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설령 진다고 해도 황후를 나무랄 사람은 없을 테니까.”

“폐하, 그런 문제가…….”

“정작 본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저렇게 서 있는데.”

그 말대로였다. 로즈안나는 벌써 저만치 물러나 자세를 잡고 있는 아르사크를 보며 작은 소리로 탄식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와의 대련에서 애교를 부릴 생각 따위는 추호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국에서 온 황후가 제국의 황제를 검으로 이긴다면 문제의 소지가 될 가능성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게다가 황제의 명예까지도 실추될 수 있는 중대한 문제다.

반대로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이긴다고 해도 나아지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아르사크의 성미도 성미려니와, 존중받지 못하는 황후라는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그 결과 역시 참담할 것이 뻔했다.

로즈안나는 거의 울기 직전인 얼굴로 에리히를 올려다보았다.

“울 것 없다. 넌 테오 옆에 가서 구경이나 해.”

“폐하, 제발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걱정 마. 저게 아무리 망나니라 한들 내가 설마 죽이기야 하겠느냐? 다들 부부간의 여흥이려니 할 테지.”

“욕하시는 것 다 들립니다, 폐하. 로즈에게 제 험담을 하시다뇨.”

아르사크가 말했다. 에리히가 목검을 쥐고 몇 발짝 앞으로 나섰다. 로즈안나는 그의 발목이라도 붙잡고 매달리려는 기색이었으나 테오도르가 로즈안나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잡고 뒤쪽으로 물러났다.

“걱정하지 마라. 폐하는 물론이거니와 아르사크 님도. 설마 서로를 다치게는 하지 않으실 테니까.”

“어떻게 그렇게 속 편한 말씀을 하십니까! 다치게 하려는 의도가 없어도 다칠 수 있는 것이 검인데요!”

“목검일 뿐이니 염려 놓으래도.”

“정말 두 분 다 구제 불능입니다. 전 못 보겠어요.”

시종들과 병사들, 그리고 웅성거리는 소리에 근처의 텃밭에서 일을 하던 사람들까지도 몰려들어 뒤뜰은 순식간에 격투장 같은 모습이 되었다.

군중들은 에리히와 아르사크를 반원 모양으로 둘러싼 채 마른침을 삼키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감히 입을 열어 크게 떠들지는 못했지만, 그들 모두가 이 승부의 행방이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한 심정으로 지켜보고 있음이 분명했다.

“옳지 않아요, 테오도르 님.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요.”

로즈안나가 말했다. 그러나 그녀도 걱정스러운 시선을 아르사크에게서 떼지는 못했다.

손목을 몇 번 움직이다 검을 쥔 에리히는 자신을 똑바로 쳐다보는 아르사크의 표정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쳤다.

“원한이 있어 맞붙는 것도 아닌데 표정이 너무 살벌하지 않나?”

“제가 검을 뽑아야 할 만큼 깊은 원한이 있었다면 제 표정에 대해 논할 시간은 없으셨을 겁니다, 폐하.”

“그냥 맞붙긴 아쉬우니 내기라도 하지.”

“내기를 참 좋아하시네요. 이기지도 못하시면서.”

“이번엔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할 거야, 말 거야?”

에리히가 목검을 쥐고 자세를 잡았다. 아르사크는 그의 몸이 굽어진 정도와 땅을 디딘 다리의 모양, 그리고 검날이 비스듬히 돌아간 약간의 각도를 유심히 보았다.

“좋습니다, 하지요.”

“그대가 이기면 원하는 걸 하나 들어주지. 가능한 선에서.”

“제가 지면요?”

“소파에서 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리히의 발이 땅을 세게 박찼다.

35장 신혼…여행 (6)

둥글게 모여 있던 사람들은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바닥을 박찬 에리히가 앞으로 나아가는 속도는 그만큼 빨랐다.

목검의 날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로즈안나는 에리히가 아르사크를 향해 먼저 검을 한 번 휘둘렀고 나머지 두 번은 아르사크의 공격을 막아냈다는 것을 겨우 알 수 있었다.

아르사크는 에리히가 빠르게 달려드는 것을 본 순간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테오도르와 대련을 할 때도 상당히 진지한 태도라고 생각했으나 착각이었다. 지금 에리히가 움직이는 속도에 비한다면 테오도르와의 대련은 그야말로 보여주기식 장난에 불과했다.

에리히의 실력이 정말로 무시할 만큼 허술하지는 않았지만 반대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는 것이 첫 번째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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