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아르사크는 의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부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로즈안나는 황녀님의 놀이 동무였어요.”
“…어쩌면, 세상에. 마마,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어리석게도…….”
“아닙니다. 부인은 모르고 말씀하신 것이니까요. …그래서, 황녀의 병은 정말로 전염병이었나요?”
“그것은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당시에 듣기로는 돌아가시자마자 황궁에 병이 퍼질 것을 걱정한 디몰트의 전하께서 황녀님의 장례를 관례대로 치르는 대신 시체를 소각하고, 빈 관으로 장례를 치르도록 하셨다지요.”
“…디몰트의 전하께서요? 왜 그분이 명령을 하셨지요? 선황께서는요?”
“선황께서는 그때 병중이셨습니다. 이미 국사를 돌보시지 못할 만큼 쇠약하셨어요. 선황후께서도 황녀님께서 병을 앓으신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오래도록 병석에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셨고요. 에리히 폐하는 그때 황태자의 신분이기는 했으나 아직 열다섯 살… 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실 수 없는 시기였지요.”
자작 부인은 생각만 해도 측은하다는 듯이 손수건으로 주름진 눈가를 찍었다. 그러나 아르사크는 부인을 위로해야 하겠다는 생각도 미처 할 수가 없었다.
황녀가 죽은 것도 10년 전, 토르갈에 병이 돌았던 시기도 역시 10년 전. 시기가 아주 정확히 맞아떨어지진 않는다고 하더라도, 토르갈에 돌았던 병은 오랜 시간을 끌며 초원 전체를 휩쓸다시피 했으니 그사이 선황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리는 없었다.
에리히는 어려서 국사에 참여할 수 없었고, 그 시기에 실질적으로 제국을 다스리고 있었던 것은 위든이었다. 그렇다면 토르갈의 구원 요청을 묵살한 것도 바로 그라는 이야기다.
‘어째서? 왜?’
“마마, 어찌 그러십니까?”
무섭게 굳어진 아르사크의 표정을 본 자작 부인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르사크는 퍼뜩 정신을 차려 그녀를 바라보고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차 잘 마셨습니다, 부인. 저는 이만 일어나야겠군요.”
“마땅히 그러셔야지요. 여정이 고단하셨을 것입니다. 편안히 쉬십시오, 마마.”
침실까지 배웅하겠다는 자작 부인을 뿌리친 아르사크는 견고한 석벽으로 짜인 복도를 뛰다시피 가로질러 침실로 들어왔다.
침상을 정리하러 가겠다던 로즈안나는 방 한가운데에 가만히,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아르사크는 황급히 로즈안나에게로 다가가 손을 붙잡았다.
“로즈안나.”
로즈안나는 울고 있었다. 아르사크를 보고서도 눈물을 닦거나 얼굴을 거둘 생각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눈가에 맺혔던 눈물이 뚝 굴러떨어졌다. 아르사크는 어쩔 줄 모른 채 로즈안나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로즈, 미안해. 네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됐는데…….”
“아닙니다. 아르사크 님이나 자작 부인의 잘못이 아니에요.”
“네가 황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알아. 그 아이가 아플 때 너만이 곁에 있어 줬다는 것도.”
아르사크가 말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입가가 경련하는가 싶더니, 로즈안나는 허탈한 소리로 작게 웃었다.
“맞아요. 그랬습니다. 황녀님도 열 살, 저도 열 살이었죠. 저는… 저는 황녀님을 자매처럼 생각했어요. 황녀님도 저를 놀이 동무 이상으로 아껴주셨고요. 그런 분이셨습니다. 시종들이 실수를 해도 그분은 결코 화를 내거나 매질을 하시지 않았어요. 그토록 모든 사람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떠받들려 자랐는데도. 그런데 그런 분이 그토록 아프고 외로울 때, 황녀님의 보살핌을 받았던 사람들 그 누구도 황녀님을 보살피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르사크 님, 전 분노했어요. 어린 나이였지만, 그토록 사람에게 분노할 수 있을 줄은 몰랐어요. 황녀님이 나으시면 모두 다 황녀님 앞에 무릎을 꿇려놓고 혼을 내시라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죠.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았어요.”
로즈안나의 목소리는 드문드문, 흐느낌과 함께 이어졌다. 아르사크는 천천히 숨을 몰아쉬면서 로즈안나의 말을 들었다.
“아르사크 님, 저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해요. 황녀님이 돌아가신 게 제 탓이 아닐까 하는.”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절대로 그렇지 않아. 로즈안나, 날 봐. 절대로 네 탓이 아니야.”
“하지만 저는 황녀님을 죽게 만든 자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속삭이듯이, 마치 유령이 부는 휘파람처럼, 로즈안나의 목소리는 높낮이가 없고 다만 빨랐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로즈안나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이 어깨를 떨다 흐느끼는 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가 그들을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께서 황녀님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은 게 아닐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악몽을 꿔요.”
“로즈안나, 아니야. 로즈, 날 보라니까. 그렇지 않아.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신이 내린 벌 같은 게 아니었어. 그건 다만 병이었을 뿐이야.”
아르사크는 목이 메는 것을 느끼며 로즈안나의 어깨를 힘주어 잡았다.
병은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아르사크가 그것을 가장 잘 알았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재앙을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듯 병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이 정말 병이라면.
“아르사크 님,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겠어요?”
로즈안나가 물었다. 아르사크는 로즈안나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해보라는 듯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그렇게 돌아가시지 않는다고 약속해 주세요. 제가 어찌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아프시지 않겠다고. 아프더라도 곧 털고 일어나시겠다고. 제게 약속해 주세요.”
“…약속할게, 로즈. 난 괜찮아. 난 아프지 않아. 너무 건강해서 탈이잖아, 안 그래?”
넉살을 부리는 것 같은 아르사크의 말에 로즈안나는 그제야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띠었다. 그러고는 운 것이 민망한 듯 볼을 붉히며 침대를 정리하겠노라 말하고는 아르사크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아르사크는 이불을 펴느라 분주한 로즈안나의 뒷모습을 보며 혼란한 생각들을 정리하려 애썼다.
황녀의 병이 전염병이었다면, 왜 혼자 남아 황녀가 죽을 때까지 간호했다는 로즈안나는 멀쩡했던 걸까?
전염성이 강한 병은 환자가 죽을 때 가장 독하고 악랄하게 퍼진다. 그것은 아르사크도 이미 겪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정말 전염병이었다면 로즈안나가 멀쩡했을 리 없다. 아무리 격리를 잘했다 하더라도 황궁에서도 어느 정도는 발병이 있어야 옳다.
그렇다면 전염병이 아니었던 걸까? 그것은 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죽은 황녀는 에리히와 마찬가지로 위든의 조카다. 어린 조카가 죽어 가는데 위든이 그 병이 어떤 병인지 제대로 조사도 하지 않았을 리 없다.
만약 황녀가 죽은 것이 병 때문이 아니었다면?
‘진정해야 해. 이건… 성급하게 결론을 내릴 수 없는 일이야.’
그리고 문제는 황녀뿐만이 아니다. 그때 제국을 다스리던 사람이 위든이었다면 어째서 토르갈을 외면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토르갈 출신임을 알면서도 왜 그 사실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었는지, 그것 역시도 큰 문제였다.
‘본인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겠지.’
아르사크는 속으로 생각했다. 심장이 너무 빠르게 뛰어 숨을 진정하기가 힘들었다. 불길한 예언이라도 들은 것처럼,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비명을 지르며 날뛰는 것 같았다.
34장 신혼…여행 (5)
“등과 어깨를 좀 더 곧게 펴도록 해요. 검에 끌려가는 게 아니라, 내가 검이 가는 곳을 결정해야 한다는 걸 잊지 말고.”
클루이트는 단 며칠 만에 아르사크의 착실한 제자가 된 것 같았다. 아르사크는 활 솜씨에 비하면 검은 거의 막무가내로 휘두르는 수준에 가까웠지만, 기초조차 엉성한 클루이트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클루이트는 아르사크가 하는 말이라면 종이가 물을 빨아들이듯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덕분에 어떻게 해도 엉성하던 자세가 빠르게 교정되었고, 큰 키를 활용해 안정적으로 힘을 쓸 수도 있게 되었다.
“오늘은 이쯤 하도록 하지요.”
아르사크가 말했다. 클루이트는 높이 들고 있던 목검을 내리며 마른 천으로 이마께에 맺힌 땀을 닦았다.
“실력이 아주 빨리 느는군요.”
“과찬이십니다, 마마.”
클루이트가 말했다. 아르사크는 클루이트가 들고 있던 목검을 건네받아 한 손으로 쥔 채 공중에서 두어 번 휘둘렀다.
“하온데 마마.”
“뭐죠?”
“외람된 말씀일지 모르오나… 어째서 폐하와는 시간을 보내지 않으십니까?”
아르사크는 코웃음을 치며 목검을 고쳐 쥐었다.
“폐하께서는 나와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이 있으시니까요.”
“하지만 명목상으로 폐하와 마마, 두 분은 신행을 오신 것이 아닙니까.”
“그렇긴 하죠. 하지만 신행이라고 해서 꼭 둘이 붙어 다녀야 할 이유도 없으니.”
목검을 휘둘러 목각 인형을 연달아 내리친 아르사크는 클루이트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결혼을 했나요?”
“아직입니다, 마마.”
“난 원래 결혼할 생각이 없었어요. 제국에 오기 이전에도 마찬가지였죠. 내게는 책임져야 하는 부족민들이 있었고, 해야 할 일도 많았기 때문에요. 부족을 지키는 것이 최우선이었으니, 개인적이고 낭만적인 감정 같은 것에 빠질 수가 없었어요.”
“마마, 그 말씀은…….”
클루이트가 큰 키를 아르사크 쪽으로 숙인 순간 인기척이 났다. 아르사크와 클루이트가 미처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빈정거리는 것 같은 에리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처럼 어울리는 옷을 입고 영지 관광이나 하라고 시간을 주었더니, 허구한 날 검만 휘두르고 있군.”
“…폐하를 뵙습니다.”
클루이트는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다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아르사크는 시종과 병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팔짱을 낀 채 에리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폐하께서도 한번 휘둘러보시지 그러세요?”
아르사크의 말투는 마치 어린아이에게 목마를 타보라고 권하는 것 같았다.
에리히는 마뜩잖은 표정을 지었지만 의외로 순순히 앞으로 나섰고, 옆에 서 있던 시종은 아르사크를 힐끔거리며 에리히가 벗은 망토를 공손한 태도로 받아들었다.